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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19. 개전

작성자jager|작성시간08.12.09|조회수3,456 목록 댓글 15

 

 

 

 

체첸은 러시아의 땅이 아니다. 알라의 땅이다.

                                                                                                    - 두다예프 정부의 슬로건

 

 

  두다예프의 독립선언에 대한 첫번째 기싸움에서 밀린 러시아는 한발 더 물러서야 했다. 체첸 그로즈니에 주둔하고 있던 기존의 러시아군은 적대적인 체첸인들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1992년 6월까지 모두 철수해야 했다. 그것도 비축하고 있던 막대한 무기와 전차, 장갑차, 중화기를 거의 놔두고 몸만 빠져 나왔다. 러시아 하원 (두마)의 보고서에 의하면 체첸인들은 42대의 전차 (T-62, T-72), 56대의 장갑차(BMP-1,2, BTP-70), 139문의 야포(D-30, PM-38, B-21 GRAD), 2만 5천정의 소총과 500자루가 넘는 RPG, 500정의 저격총, 77발의 미사일 (Concurs, Fagot, Metis), 1천정의 기관총과 수십만발의 탄알을 러시아군으로부터 보유하게 되었다.

 

 

 

 

1994년 11월 독립 기념식 퍼레이드에 나온 체첸군 장갑차

 

  거듭 물러서게 된 러시아는 체첸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 사용을 자제하게 되었고, 두다예프와 옐친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흐르게 되었다. 옐친으로서는 아직 붕괴 중인 러시아의 상황에 대처하느라 버거운 상태였고, 두다예프로서는 러시아의 공세가 없는 한 더 나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2년간 러시아와 체첸 사이에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기묘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신생 독립 공화국 체첸의 상태는 그 2년 동안 놀라운 속도로 악화되었다. 우선 체첸 공화국 내의 90만의 체첸인과 30만의 러시아인의 사이에는 힘의 균형이 역전되었다. 소비에트 시절에 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하던 러시아인들은 이제 숫적인 열세에 몰리며 박해와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자기들 집 밖으로 잘 돌아다니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으며, 결국 겁에 질린 러시아인들은 이웃 공화국이나 러시아로 피난을 가야 했다.

 

 

 

 

 

 

 체첸 공화국 내의 러시아인의 이탈은 공화국의 기간산업인 석유채굴과 정제사업을 마비시켰다. 원가가 적게 드는 천혜의 원유산지인 그로즈니는 소련 시절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 유전에 뒤이은 2위의 원유 산지였다. 그러나 이에 종사하는 인력의 90프로가 러시아인이었으며, 전문 기술을 익힌 체첸인들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기술을 익힌 러시아인의 이탈로 체첸의 주요 산업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두다예프의 정부는 서방세계가 상상하는 민주적인 정부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으며, 씨족 (테이프) 들 사이의 알력과 이권 다툼을 통제할 능력도 부족하였다. 경제가 가파른 하락 곡선을 그림과 동시에 지역 치안도 형편없이 떨어졌으며, 납치와 몸값이라는 코카서스 지역의 오랜 '전통'이 이 틈을 타고 기승을 부렸다. 거기에 미국 서부극을 방불케하는 철도 강도가 엄청나게 발생하였고, 러시아측 자료에 의하면 1993년 한해에만 러시아 로스토프와 바쿠를 연결하는 열차  중 559대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단순한 치안 악화에서 더 나아가 체첸은 국제적인 밀수 사업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전쟁 직전까지도 체첸과 러시아의 항공편은 유지되었으며, 해외 각국의 밀수품이 체첸을 거쳐 러시아 암시장에 반입되었다. 관세를 내지 않고 시장에 돌아다니는 이 밀수품은 암시장을 석권하였으며, 체첸인들은 이를 통해 막대한 돈을 축적하게 된다. 그들이 취급한 상품은 일본 전자 제품, 프랑스 향수, 터키 목재와 유럽 스포츠 티 등의 자질구래한 것부터, BMW나 볼보 등의 고급 스포츠카, 불법 시추한 석유, 특히 무기를 많이 거래하였다.

 

 

 

 

 

  
   옐친의 러시아 정부는 체첸을 '최악의 범죄 해방구'로 규정하였지만, 사실 소련 붕괴 직후의 상황은 어디서나 대동소이하였다. 러시아는 암시장과 마피아, 이들과 결탁한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연방 정부는 이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신흥 공화국 곳곳에서 번지고 있는 것을 추스리느라 여념이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러시아의 경제도 급격한 하락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옐친의 인기 역시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를 빌미로 공산당 강경파 세력들은 다시 옐친의 지배권에 도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여러차례 국회와 실랑이를 벌이던 옐친은 자신의 개혁법안이 번번이 거부되자 인내력의 한계를 느끼고 1993년 9월, 의회 해산과 헌법 개정을 골자로 한 대통령령을 발표한다. 공산당 강경파들과 의회 내의 반 옐친 세력들은 루츠코이 부통령과 루슬란 하스블라토프  하원 의장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그리하여 의회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며, 시내에 대규모 옐친 반대 시위를 주도하였다.

 

  사태는 2주를 끌었고, 결국 옐친이 전차부대를 동원하여 의사당을 포격하여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볼세비키의 10월 혁명 이후로 모스크바 최악의 유혈 사태라는 '93년 헌정 위기'에서 정부 공식 발표에 의해서만 7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옐친은 이 사태 이후로 자신에 대한 군부의 지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전차 포격으로 '함락'된 러시아 국회 의사당

 

   군부를 장악하게 된 옐친은 이제 '범죄 해방구' 체첸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 이미 체첸에는 반 두다예프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이미 1992년에 두다예프를 전복시키려는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며, 1993년 6월에는 자신에 대한 탄핵 소추를 하려는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공교롭게도 옐친이 의회를 해산한 시기와 비슷한 때였다. 두다예프는 군인으로서 뛰어났지만, 정치나 경제 쪽으로는 무능력했으며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기만 하였다.

 

   옐친은 이 틈새를 이용하여 체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반 두다예프 세력들은 체첸 북서쪽 나드테레치니 지역에 거점을 둔 '잠정 평의회'를 만들었는 데, 이들은 1993년 12월의 또 다른 쿠데타 시도도 실패하자 러시아 측에 원조를 요청했다. 옐친은 이들을 '체첸 내 유일의 합법 정부'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막대한 돈과 무기와 인력을 제공하여 체첸인들의 손에 의해 두다예프를 전복시키기를 원했다.

 

 

 

 

체첸 북부의 반 두다예프 군의 검문소

 

   당시 반 두다예프 세력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사람은 루슬란 하스블라토프였다. 러시아 하원 의장까지 올라갔던 그는 체첸인 중에 가장 출세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93년 헌정 위기에서 옐친에 대항하였던 전력으로 인해 러시아의 매력적인 대안은 아니었다. '잠정 평의회'의 핵심은 전 내무부 (MVD) 장교 우마르 아부투하노프와 베슬란 관타미노프였다. 전직 그로즈니 시장이었던 베슬란 관타미노프는 과거 두다예프 세력에서 빠져나온 인물이었다.

 

  연방 방첩부 (FSK. 훗날 FSB로 개편됨)의 지원을 받은 그들은 1500억 루블 (당시 시세로 5천만 달러에 해당)의 활동비와 수십대의 전차와 이를 운전할 전차병을 지원받았다. 전차병들은 일인당 600달러에서 1500달러의 돈을 약속받았으며, 이들의 작전에 임박했을 때 러시아는 식별 마크를 지운 하인드 헬기까지 동원하여 두다예프 비행장을 폭격하였다. 러시아 정보총국 (GRU)는 두다예프의 군이 군기도 형편없고 장비도 빈약하며 체첸인들의 반감도 높아졌기 때문에, 전차가 그로즈니 시가에 돌입하기만 해도 사태가 종료될 거라는 보고를 올렸다. 러시아가 생각하기에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

 

 

 

 

 

 

  1994년 11월 26일, 잠정 평의회의 반 두다예프 군이 그로즈니 시내로 진격하였다. 40대의 전차 (T-72)와 8대의 장갑차 (BTR-80)를 앞세우고 러시아 헬기의 지원을 받으며 3방향에서 시내 중심가로 들어섰다. 당시 공격부대 지휘관인 달칸 코자예프는 3천의 병력이 그로즈니에 들어섰다고 했지만, 그들의 군기는 형편없었으며 시가지에 돌입했던 병력은 불과 1천이었다고 한다.

 

   시내에 들어선 뒤 10시간 뒤, '전차를 보기만 해도 사태가 종료' 될 것이라는 러시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시가지에 들어선 반 두다예프 군은 사방에 포진한 두다예프 군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두다예프 측의 주장에 따르면 350명의 반군이 사살되었고 20대가 넘는 전차가 파괴되었으며 4,5대의 전차가 노획되었다. 또한 지원 사격을 하던 4대의 하인드 헬기와 1대의 수호이 25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반 두다예프 파의 회심의 일격은 실패로 끝났다.

 

  두다예프는 옐친에게 3번째 굴욕을 안겨주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 공격이 체첸 내부의 문제라며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두다예프가 전투에서 생포된 20명의 러시아군 포로들을 퍼레이드하게 하였다. 이틀 뒤에는 체첸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두 처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러시아로서는 감내할 수 있는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였다.

 

 

 

 

두다예프군에 생포된 러시아 전차병들

 

   이제  옐친 행정부 내에서의 진보주의자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고, 마침내 체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신속하고도 확실한 전쟁' 만이 해답이라는 인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점점 바닥을 기는 지지도 속에서 1996년의 재선을 노리기 힘들어진 옐친으로서도 러시아에 반항하는 '범죄 해방구'를 제압하여 자신의 인기를 회복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옐친은 '헌법을 위협하는 무장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군 동원을 승인하였고, 1994년 12월 11일, 3만의 러시아군이 체첸의 국경을 넘는다. 지난 2년간의 기묘한 전쟁 (Phony war)가 끝나고 진정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출처 : http://kr.blog.yahoo.com/pershing11111/1381603
          http://en.wikipedia.org/wiki/First_Chechen_War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Grozny_(November_1994)
          http://en.wikipedia.org/wiki/1993_Russian_constitutional_crisis
          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981969,00.html
          Moshe Gammer의 The Lone Wolf And the Bear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s
          Yossef Bodansky의 Chechen Jih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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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2.09 말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다스릴 수는 없다.. 이 말이죠?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08.12.09 이래서 오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거군요. 제대로된 지도자의 유무 문제, 이미 정착한 제국민들에 대한 처리문제 모두 정답이 나와있는건 아니죠...
  • 답댓글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8.12.10 항상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그 지배한 국가의 남겨둔뒷문제를 뒷처리해야 한다는 귀찮은 점이 있습니다.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09.09.03 두다예프는 참으로 뛰어난 군사적 지도자인데... 정치, 경제적인 분야는 너무 등한시 했군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러시아인 추방이 체첸을 경제마비 상태로 만들어버렸군요... 근데, 북부의 잠정평의회는 체첸의 독립에 찬물을 끼얹게 되는군요... 옐친의 다음 네번째 굴욕을 기대하면서~~~~~~~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1.30 드디어 러시아 체첸 전쟁의 서막이 올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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