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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25. 전쟁을 멈춰라

작성자jager|작성시간09.02.21|조회수3,337 목록 댓글 22

 

 

 

 

우리는 체첸 땅에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다.
                                          - 샤밀 바사예프

 


   전쟁이 시작되고 반년이 넘었고, 모든 일은 잘되가는 것처럼 보였다. 체첸의 반란군들은 남동쪽의 조각땅으로 몰려있었으며 주민들도 러시아의 공세에 겁을 먹었다. 모든 주요도시와 간선도로, 교차점은 러시아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반군들은 후퇴하기만 하였다. 아직 주민들과 게릴라들 사이의 지원체계도 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코카서스 산맥에서 오래 버틸 수도 없었다.

 

   옐친은 체첸 문제가 거의 종료되었다고 믿고 기분 좋게 캐나다 핼리팩스에서 열리는 G7 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국내에는 빅토르 체르노미딘 총리가 영국의 국빈인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맞을 준비에 분주하고 있었다. 지난 겨울의 체첸 전투가 종료되고 언론에서도 점점 관심이 멀어졌으며, 이제 러시아에서 체첸의 반군과 두다예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1995년 6월 14일, 러시아 국민들은 자신들이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했다. 약 한달 전에 베데노 함락 이후에 사라졌던 샤밀 바사예프가 142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베데노에서 240킬로 북쪽에 있는 러시아 부데노프스키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인구 6만의 작은 소도시는 삽시간에 전장이 되었다.


   바사예프는 3대의 러시아 카마즈 트럭에 부하들을 태우고 위장된 러시아 경찰차를 앞세우고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부하들은 러시아군으로 위장을 하였고, '체첸군에게 전사한 러시아군을 고향으로 보내기 위해' 국경을 넘는 것으로 둘러대려고 하였다. 바사예프는 중간에 만나는 검문소마다 약간의 돈을 얹어줘서 눈을 감도록 하였다. 이 작전을 위해 바사예프는 8천달러가 넘는 돈을 뇌물로 준비하였다.

 

 

 

 

샤밀 바사예프

 

   러시아 남부 스타브로폴의 부데노프스키. 지역 경찰관이 이 행렬을 정지하고 검문하였다. 바사예프는 앞서 한 것처럼 둘러대고 통과하려고 했지만, 해당 경찰관은 상부에 이 수상한 트럭을 보고하고 경찰서로 동행을 요구하였다. 체첸군의 수중에는 더 이상 매수할 돈도 없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그들은 일제히 트럭에서 내려서 주변의 모든 러시아 경찰을 사살하고 경찰서로 난입하였다.

 

  현장에 있던 러시아 경찰을 제압한 체첸군은 부데노프스키 시청으로 진입하였고, 행정관리들을 제압한 뒤에 체첸국기를 지붕에 계양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알고 증원 온 러시아 경찰과 군부대로 인해 바사예프의 부하들은 수세에 몰렸다. 애초에 140명 남짓의 병력으로 러시아 남부 국경지대 마을을 장악하는 것은 무리였다.


   샤밀 바사예프는 주변에 있는 러시아 주민들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서 부데노프스키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을 장악한 바사예프는 끌고 온 러시아 주민들과 병원 환자들을 인질로 잡고 러시아 군과 대치하였다. 이 교전으로 러시아 군과 경찰은 4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41명의 주민 희생자를 냈다. 체첸군도 8명의 전사자와 12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일단 병원을 장악하자 바사예프는 진입 가능한 모든 통로에 지뢰와 폭발물을 설치하도록 지시하였다. 러시아군은 병원 주변을 포위한 채 이 엄청난 상황에 넋이 나가있었다. 무려 1500명이 넘는 러시아 주민들이 바사예프의 손아귀에 있었다. 근현대사에 있어서 최대 규모의 인질극이었다. 조용했던 소도시는 죽은 주민들과 인질들의 가족들로 인해 완전한 공황상태에 빠졌다.

 

 

 

 

중간에 석방된 어느 러시아 가족

 


  다음날인 6월 15일, 바사예프는 러시아 기자들의 취재를 요구하였다. 대규모 인질극에서 체첸반군의 목소리가 여과없이 방영되는 것을 꺼리는 러시아 정부가 이에 대해 머뭇거리자, 바사예프는 인질들 중에 6명을 죽였다. 그 중 3명의 러시아군 헬기 조종사였다. 6월 3일에 러시아 공군의 폭격으로 11명의 친척이 한번에 죽은 바사예프로서는 별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일이었다. 인질들의 죽음에 러시아 정부는 기자들이 체첸인들을 만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  기자들과 회견하는 바사예프. 오른쪽이 아슬란벡 이스마일로프. '꼬마 아슬란벡'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지휘관으로 부데노프스키 사건의 핵심 책임자 중 한명  -

 

 


  바사예프의 주장은 짧고 간단하였다.  


    "전쟁을 멈추고, 평화 협상을 시작하라."

 
  러시아군으로서는 다 이겨가는 전쟁을 이 사건 한번으로 멈출 수가 없었다. 인질극이 벌어진 지 4일 뒤인 6월 17일, 동이 뜰 무렵에 러시아군은 러시아의 대테러 정예부대인 알파부대가 전차와 장갑차의 지원 사격 속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천 오백명이 넘는 인질이 있는 병원에 무차별로 난사하는 가운데, 알파부대는 1층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30명이 넘는 인질들이 이 희생되었다. 체첸인들은 러시아군의 사격 속에서 인질들에게 흰 천을 들고 창가로 가라고 소리쳤다. 인질들은 흰기를 내걸고 쏘지말라고 소리쳤고 러시아군은 추가로 진입하지 못했다.

 

 

 

 

러시아군 공격 중의 부데노프스키 병원

 

  오후 2시, 공격이 다시 재개되었다. 이 역시 1층까지 진입하였지만 인질들이 필사적으로 소리쳐서 러시아군이 더 들어갈 수가 없었다. 2차례의 공격 속에서 100명 가까운 인질들이 죽고 러시아군과 체첸군 양쪽에 40명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다. 러시아로서는 군사력으로 어찌해볼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희생될 인질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인질들이 내걸은 흰 천

 

   러시아 정부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하였다. 이 사태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으며, 외국으로 도피할 수 있는 러시아 항공사의 티켓과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이 바사예프에게 전달됬지만, 그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그의 형인 쉬바니 바사예프를 수소문해서 협상하도록 했지만, 바사예프는 자기 형이 눈에 띄는 즉시 사살하겠다고 하였다. 체첸군 참모총장인 마스하도프의 명령서를 휴대한 쉬바니 바사예프가 간신히 샤밀 바사예프를 면담했지만 역시 통하지 않았다. 이슬람 신학자들의 호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다음날인 1995년 6월 18일, 체르노미딘 총리는 바사예프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는 바사예프가 요구한 조건들을 거의 모두 수용하였다. 내외신 기자들에게도 백일하에 공개된 합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부데노프스키의 인질 석방을 위해, 러시아 정부는

 

 1. 1995년 6월 19일 05시부터 체첸 영역 내의 군사작전과 폭격을 중단한다. 이와 병행하여 인질로 잡혔던 노약자와 환자들과 부상자들도 석방한다.

 

 2. 체첸 전쟁의 평화 협상을 위해 대표를 각각 선임하며, V.A 미하일로프를 수석대표, A.I 볼스키를 보좌관으로 한다. 협상은 1995년 6월 18일, 대표들이 그로즈니에 도착하는 대로 시작한다. 군 병력 철수를 포함한 다른 문제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평화롭게 해결한다.

 

 3. 모든 인질들이 석방된 뒤, 샤밀 바사예프와 그의 부하들에게는 체첸 영내까지 교통 수단과 안전 통로를 제공한다.

 

 4. 러시아 연방의 전권 대표인 A.V 코로베이니코프와 V.K 메데디코프는 이 사항을 샤밀 바사예프에게 전달한다.

 

  러시아 연방 총리

   V.S 체르노미딘

 

 

 
   합의 사항은 성실하게 이행되었고, 샤밀 바사예프는 6월 19일 늦은 오후에 러시아 정부가 제공한 3대의 버스와 전사한 16명의 체첸군을 실고 갈 냉장차를 제공받았다. 버스에는 남아있는 체첸군과 이들의 안전을 위해 자원한 139명의 인질들 (9명의 러시아 하원 의원, 16명의 기자들이 포함된) 이 탔다. 샤밀 바사예프는 러시아 Mi-24 헬기가 공중을 선회하는 가운데 체첸을 향해 떠났다.

 

 

 

 

러시아가 제공한 버스

 

  러시아 정부는 이들의 행렬을 여러차례 방향을 틀었으며, 러시아 스타브로폴을 지나 다게스탄의 하사 유르트까지 갔다가 다게스탄에서 체첸 동쪽의 국경을 넘었다. 다게스탄에서 체첸 국경을 넘은 바사예프는 존다크라는 마을에서 동행한 인질들을 모두 석방하고 다르고로 향했다.  러시아 주간지인 Argumenty i Fakty는 이 모든 상황을  "모스크바가 샤밀 바사예프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하였다. 더 없이 정확한 설명이었다.

 

 

 

 

 

 

부데노프스키 이후 샤밀 바사예프의 귀환로


   샤밀 바사예프는 현대사 최대의 인질극을 통해 불가능한 일을 실현시켰다. 승기를 탄 러시아의 공세를 멈추게 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체첸군은 절실하게 필요했던 재정비의 시간을 벌었고, 전쟁을 지속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바사예프는 체첸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부데노프스키에서 살아 돌아온 바사예프

 


    러시아 정부는 이때 받았던 수모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때 참여했던 142명의 체첸군은 대다수가 계속된 격전으로 전사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추적은 집요하였고, 심지어 8년이 지난 2003년에도 이세 마푸사예프가 '부데노프스키 테러'의 죄명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First_Chechen_War
           http://en.wikipedia.org/wiki/Shamil_Basayev
           http://en.wikipedia.org/wiki/Budyonnovsk_hospital_hostage_crisis
           Ser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
           Paul Murphy의 The Wolves of Isl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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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3.06 이 양자보다 더 지독하게 싸우기도 힘들겁니다
  • 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 작성시간 09.03.04 정말 러시아와 체첸, 둘의 관계는 막장이군요 ㄷㄷ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3.06 벌써 수백년에 걸친 관계죠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09.10.27 러시아군으로 위장하고 뇌물까지 준비했다니 참으로 주도면밀하면서도 용맹한 지휘관이었군요... 인질극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래도 체첸군이 재정비를 할 수 있었다니... 바샤예프는 그야말로 최고의 영웅이었겠군요... 러시아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일격이었습니다...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04 암튼 바사예프 대단합니다..전쟁의 흐름을 바꾸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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