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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29. 외전 3 = 체첸의 사자

작성자jager|작성시간09.03.21|조회수2,819 목록 댓글 25

 

 

 

 

 


  '만약 내가 아프간에 있을 떄 언젠가 내가 러시아 영역에 들어가서 러시아와 싸운다고 했으면, 나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타브는 1969년 4월, 사우디 아라비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유복한 베두윈 집안에서 태어났다. 1987년에 미국으로 유학가서  고등학교를 다녔는 데, 정상적으로 과정을 마쳤으면 국영 석유 기업에 취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의 절정기였으며,  당시 압둘라 아잠이라는 이슬람 신학자의 지하드 선포에 따라 중동의 젊은이들이 대거 아프간에 무자헤딘으로 지원하였는 데, 하타브도 이 대열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그는 1987년 말에 아프간으로 건너가서 잘랄라바드의 훈련 기지에서 전투 기술을 전수받았다. 당시 참전했던 어느 무자헤딘은 그의 훈련소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 훈련소는 분주하게 운영됬으며 교육을 마치고 전장에 가는 사람과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한번은 신병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는 데 16살, 17살 남짓의 어린애가 한명 눈에 띄었다. 긴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 데, 갑자기 강의하는 조교의 앞에 가더니 자기를 지금 당장 전선에 보내달라고 하였다. 조교는 훈련 없이는 불가하다며 거절하였고, 나는 그 친구 앞에 가서 이름을 물어봤다. 그는 '이븐 알 하타브'라고 대답하였다."

 

 

 

 

 

 

아프간에 있을 당시의 하타브

 


 하타브는 훈련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전장에 갔다. 그는 잘랄라바드, 코스트와 카불 지역의 전투에 참가하며 소련군이 1989년 철수 할 때까지 싸웠다. 당시 아프간 전쟁 당시 하타브에 대한 다음의 일화가 있다. 소련군 12.7미리 중 기관총에 복부를 맞았을 때의 일이다.


  " ... 어느 전투에선가, 우리는 후방의 가옥의 방에 앉아 있었다. 저녁 때였고 전방은 굉장히 치열했다. 몇분 뒤, 하타브가 방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그는 방에 들어와서 아주 천천히 걸어가서 우리 맞은 편에 앉았다. 그가 너무 조용하게 앉아있어서 우리는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디 다쳤어?' 라고 물어봤는 데 아까 전방에서 좀 스쳤다고 대답했다. 우리 중 한명이 가서 상처를 보여달라고 하자, 하타브는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였다. 억지로 복부를 가리고 있던 그의 손을 들어내니 옷은 피로 질퍽한 상태였다.  우리는 즉각 차량을 보내달라고 무전하고 그를 가까운 야전 병원으로 보내기 위해 서둘렀다. 그는 억지로 실려가는 동안에도 계속 자기 부상은 경미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불평하였다."


  하타브는 여러번의 부상을 입었고 그 중 한번은 수류탄이 오른손에서 터져서 4개 손가락을 잃었다. 동료들이 그를 페사와르로 보내 치료를 받도록 했지만 그는 거절한 채 손에 붕대를 감고 계속 싸웠다. 그 뒤로 그는 뭉개진 오른손에 장갑을 낀 채 싸웠다.

 

 

 

 

 

소련 침공 당시의 아프간 무자헤딘

 


  소련군이 물러난 뒤, 아프가니스탄은 1993년 수도 카불에 무자헤딘이 입성하여 나지불라 공산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전쟁이 계속되었다. 하타브는 이 전쟁을 마저 수행하면서 우수한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1992년 경에 다른 전장을 향해 떠났다.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아와 이슬람교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분쟁지인 나고르노 - 카라바흐 였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 당시 병사들

 

 

   아제르바이잔은 지역 분쟁에 있어 소련과의 전쟁에 숙달된 무자헤딘의 도움을 간절히 원했고, 내무부 장관인 로산 지바도프가 비밀리에 아프가니스탄 헤크마티르와 만나 우수한 요원들을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노력이 결실을 보아 1993년에 1500명의 무자헤딘이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장에 투입됬으며, 수세에 몰리던 아제르바이잔 군은 이들을 주력으로 역습을 가했다.

 

  1993년 10월, 300명의 무자헤딘은  제브라일 지역에 아르메니아군의 후방 지역에 있는 거점을 기습했다. 이 공격으로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수도 스테파나케의 남동쪽 마을 고라디즈가 함락되었다. 전장에서 그들은 엄정한 군기와 정교한 기술을 발휘하였고 아르메니아군은 이틀 동안 진격이 멈춘 채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그러나 곧 역습을 가해서 5일 뒤에는 다시 고라디즈가 아르메니아군의 손에 넘어갔다. 정규군이 배후로 빠지는 것을 붙잡을 아제르바이잔 군의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타브는 이 전장에서 샤밀 바사예프를 처음 만나게 되었으며, 그에게 자신이 얻은 오랜 전투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였고, 지하드 이념까지 전달하였다. 물론 샤밀 바사예프는 슈사 전투 이후로 곧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떠났지만, 하타브는 이곳에서 한동안 더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다음 전장을 향해 떠났는 데,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였다.

 

 

 

 

 

 

 

하타브가 보스니아에 갈 당시의 1993년도 세력도. 녹색이 이슬람 계열 보스니아 영역

 

 

  보스니아 내전은 유고 연방 붕괴 후에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땅에 거주하는 종교가 다른 3개 민족들의 주도권 다툼으로 시작됬으며,  1992년 3월, 가톨릭 크로아티아 계와 이슬람 알바니아 계의 독립 선언에 불만을 품은 그리스 정교 계 세르비아 인들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밀로세비치가 진두 지휘하는 신 유고연방군의 군사력의 도움 속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삽시간에 보스니아의 70프로를 장악하게 된다. 이에 대한 크로아티아 계와 알바니아 계도 반격 준비를 하였다.

 

  분쟁 지역 인구의 43퍼센트를 차지하는 이슬람 계 알바니아인들은 강력한 세르비아와 유고 연방군에 대항할 수 있는 숙련된 무자헤딘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였고,  아프간 전의 참전 경험이 있던 사람 중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았다. 전쟁이 본격화된 1992년 중반 무렵부터 이들은 발칸 반도로 향했고, 그 수는 3천에서 3천 5백으로 추정된다.

 

 

 

 

1998년 코소보 분쟁 당시의 아프간 무자헤딘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지에 있었던 하타브도 이 소식을 들었고, 그도 나중에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아마 1993년 말에 보스니아를 향해 떠난 걸로 추정되는 데, 현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당 지역 이슬람계를 대상으로 한 군사 캠프를 설치하여 자신의 전투 노하우를 전수시켰으며, 그의 교육을 받은 보스니아의 무자헤딘은 세르비아 군에게 그들의 잔혹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27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분쟁은 1994년에 나토군이 개입하면서 잦아들었고, 2월에 잠정 휴전이 성립되었다.

 

 

 

 

 

 

 

알미르 타히로빅 '눈' - 무자헤딘의 훈련 캠프를 이수한 보스니아인으로 나중에 체첸전에 참전


   1994년, 하타브는 또 다른 전장을 향해 떠났다. 이번에는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이었다. 구소련 시절의 집단 농업 정책에서 펴야 지방은 특혜를 받고 산악 지방은 소외를 받았던 점이 발단이 되었으며,  소련 붕괴 후의 힘의 공백기에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정부와 남부 쿨라브 산악지대의 이슬람 세력의 대립으로 1992년부터 내전이 발발하였다.

 

 

 

 

 

타지키스탄 지도


   이 내전에 대해 러시아를 필두로 한 독립국가연합은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결의하고, 8,500명의 러시아군이 파견되었다. 이에 맞서 쿨라브의 이슬람 세력도 각지의 무자헤딘, 특히 이웃의 아프가니스탄의 숙달된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응답한 사람 중 한명이 바로 하타브였다.

 

 

  하타브는 1994년부터 타지키스탄 내전에 참여했는 데, 그의 회고에 의하면 '강을 건너는 것과 산을 넘는 것 자체가 지하드'라고 할 정도로 타지키스탄은 험한 곳이었다. 차량을 이용할 수 없어 주로 걷거나 말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가 인솔한 무자헤딘은 불과 100명에서 150명 정도였고, 나중에 현지인의 훈련이 끝나고 공세에 나설 무렵에는 300명에서 40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이들의 주요한 후원자 중 한명이 전설적인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인 아흐마드 샤 마수드였다.

 

 

 

 

 

타지키스탄의 러시아 공수부대

 

  타지키스탄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타브는 두각을 드러냈고, 그는 3개 무자헤딘 부대 중의 하나를 지휘하게 된다. 1994년 봄, 7명의 무자헤딘과 현지인 10여명을 포함한 소규모 분대를 이끌고 하타브는 아프간과 타지키스탄 국경지대의 판지 지역 12번 러시아군 검문소를 습격하였다. 해당 검문소는 순식간에 흽쓸렸고 생존한 러시아군은 없었다. 이 분쟁에서 러시아군이 하타브를 기억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1995년이 되자 타지크의 무장 세력은 정부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길을 모색하였다. 외부에서 유입된 무자헤딘은 이제 설자리가 없었고, 하타브는 전쟁이 끝나지 않고 떠나는 것을 반대했지만 대세에 따라 아프간으로 돌아왔다. 처음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떠난 뒤로,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며, 이미 4차례나 분쟁지를 경험하였다.

 

 

 

 

 

체첸의 하타브


  아프간에 돌아온 하타브는 어느날 티비를 통해 러시아 공화국 내에서 분쟁이 발생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전까지 체첸이라면 '이맘 샤밀'에 대해서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하타브는 그 분쟁이 러시아 내부의 민족 다툼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티비를 계속보던 하타브는

 

   ".. 화면에 나온 체첸인들은 머리에 '라 일라하 일랄라'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라고 쓰여진 녹색띠를 두르고 '알라 후 아크바르!'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비로소 체첸이라는 곳에서 성전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한번 가보기로 하였다."

 

   12명의 무자헤딘을 인솔하고 체첸으로 떠난 하타브는 그곳에 자신의 생각보다는 훨씬 이슬람에 대한 열의가 넘치는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기존의 분쟁지처럼 잠시 동안 훈련소를 설치하고 전투 경험을 전수해주고 떠날 생각이었던 하타브는 그곳에 오래 있기로 마음먹고 다른 아프간의 무자헤딘에게도 연락하여 추가로 체첸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하타브를 따라 중동 각지에서 몰려온 무자헤딘은 대략 80명 정도로 추정되며, 이들은 각지의 분쟁지를 누비고 온 베테랑들이었다. 1995년 2월 경의 일이었다.

 

 

 

 

 


   최초의 공격은 1995년 10월에 있었는 데 베데노 남쪽의 카라초이 마을 근처의 산악도로의 러시아군 행렬을 습격하였다. 러시아군은 5명의 장교를 포함한 47명이 전사하고 5대의 장갑차가 파괴되었다. 동시에 하타브의 부대는 한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를 시작으로 하타브는 적게는 40여명, 많게는 100여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각지의 매복과 기습 작전을 벌였으며, 그때마다 러시아군의 행렬에 타격을 입혔다. 이 작전 중에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전투가 바로 사토이 전투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하타브는 '체첸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는 과거 아제르바이잔에서 처음 만났던 샤밀 바사예프와 절친했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체첸 현지에 적응하면서 자신이 데리고 온 무자헤딘과 함께 체첸인들에게 전투 기술을 전수하였다. 각종 전쟁에 참여하며, 특히 러시아군과는 무수히 많이 싸워 본 그의 경험은 1차 체첸전 당시에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체첸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븐 알 하타브와 샤밀 바사예프

 

 

 

 

 

 출처 :  http://www.peppermintcandy.com/cgi-bin/read.cgi?board=maeil&y_number=4804
           http://www.bu.edu/iscip/vol11/Roshchin.html
           http://en.wikipedia.org/wiki/Ibn_al-Khattab#cite_note-4

          http://www.jamestown.org/programs/gta/single/?tx_ttnews%5Btt_news%5D=658&tx_ttnews%5BbackPid%5D=181&no_cache=1


           Yossef Bodansky의 'chechen jihad'
            Paul Murphy의 'The Wolves of Isl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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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09.03.22 정말 재밌게 잘 쓰시네요. 저 부리부리한 눈.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3.23 그냥 봐도 좀 포스가 강하죠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9.03.28 참으로 수염이 멋있어요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09.10.27 알 하타브 또한 대단한 인물이군요... 아프가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보스니아, 타지키스탄 그리고 체첸까지... 이슬람인들의 종교적 신념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군요... 이슬람인들이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전쟁터에 자원하는 걸 보면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06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늑대가 체첸에 들어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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