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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31. 대역전

작성자jager|작성시간09.04.04|조회수3,318 목록 댓글 31

 

 

 

 3월에 우리는 그로즈니를 얼마나 빨리 장악할 수 있는 지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 지를 보여주겠다.

 

- '지하드 작전'에 참가한 어느 체첸군 

 

 1996년 8월 6일, 옐친의 두번째 임기를 위한 크렘린의 연임식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체첸의 러시아군 주력 부대는 남부 산악지대에서 '도적떼'를 밀어 붙이고 있었고, 그로즈니 시내에는 6천의 러시아 내무군과 도쿠 자브가예프의 친러시아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시 외곽의 부대까지 합쳐서 1만 5천에서 2만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로즈니 시내의 러시아군

 

  새벽 5시 50분, 막 동이 떠오르고 하루가 시작되려는 시간이었다. 그로즈니에 주둔한 러시아군은 후방에 배치되었다는 생각에 간밤에 편히 잠들었는 지 모르겠지만, 깨어날 때는 그것이 큰 오산이었음을 느꼈을 것이다. 체첸군 주력부대가 함성과 함께 3방향에서 그로즈니 시내로 돌입한 것이다. 러시아군이 미처 대비 태세를 갖추기 전에 완벽한 기습에 성공한 체첸군은 그로즈니 일대의 러시아군 검문소를 무력화하고 시내의 주요 거점을 함락, 또는 봉쇄하였다.


  체첸군 참모총장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이미 6개월 전부터 이 놀라운 작전을 준비하였다. 러시아와의 협상이 단순히 선거 제스쳐임을 간파한 마스하도프는 자신들이 러시아와 대등하게 협상하기 위해서는 수도를 장악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회담 기간 중 그로즈니를 방문하면서 러시아군의 검문소와 막사, 배치 병력, 순찰로와 교대 시간까지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작전을 구상하였다.

 

 

 

 

지도를 보는 체첸군

 

   또한 루슬란 겔라예프를 주축으로 한 부대로 지난 3월에 그로즈니 시내를 공격하게 하여, 러시아의 반응 속도와 대응 병력에 대한 자료까지 파악하였다. 거기에 종종 라디오를 통해 "우리가 그로즈니를 공격할 것이다." "이번에는 꼭 성공할 것이다!" 는 식의 정보를 고의로 퍼트려서 러시아군이 이를 '허풍'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늑대와 양치기' 를 역으로 이용하여 정말 늑대가 그로즈니를 공격할 때 러시아군이 방심하게 만든 것이었다.

 

 

 

 

시내에서 전투하는 체첸군

 

   옐친의 두번째 임기가 시작되기 직전, 마스하도프는 다듬고 또 다듬은 작전 계획에 따라 각 지역 사령관에게 그로즈니 시내로 진입할 것을 명령한다.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200명까지의 병력이 8월 6일 새벽에 그로즈니 외곽 지역으로 잠입하였다. 총 병력은 850명으로, 체첸군의 핵심 베테랑들이 총 집결하였다.  "만약 그들이 전멸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라고 나중에 마스하도프는 회고하였다.

 

  체첸군의 역량의 모든 것을 한판 승부를 위해 쏟아놓은 이 작전을 마스하도프는 '제로 옵션 (Zero option)' 이라고 불렀다. 냉전시대 나토와 소련 사이의 쌍방 일제 핵폐기를 지칭하는 말로 체첸군 주력부대 전멸과 전쟁 승리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잘 나타내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알려진 작전명은 샤밀 바사예프가 붙인 '지하드 작전 (Operation jihad) 였다.

 

 

 

 

샤밀 바사예프

 

  단 850명으로 1만 5천에서 2만이 집결해 있는 도시를 공격한다는 것은 누가봐도 몽상이었다. 그러나 시가지에 돌입한 체첸군은 어느새 1천 500에서 2천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로즈니 시내에 있던 체첸인 중에 이 공세에 호응한 사람들이 합류한 것이었다. 돌입한 부대와 합류한 부대는 크게 3방향에서 그로즈니 시내로 들어섰다. 남동 전선 사령관 훈자르 파샤 이스라일로프가 동쪽에서, 중부 전선 사령관 샤밀 바사예프가 남쪽에서, 남서 전선 사령관 아흐마드 자카예프가 서쪽에서 공격해 들어섰다. 서쪽에서는 자카예프 외에도 루슬란 겔라예프의 정예 병력도 공격의 주축이 되었다.

 

 

 

 

그로즈니 전투 당시의 루슬란 겔라예프. 가운데 인물

 

  체첸군은 시내에 들어선 뒤에 러시아군을 조각조각 고립시킨 뒤에 연결을 차단하였다. 만약 격멸하려고 한다면 자신들의 병력도 소모될 것이며, 그러면 수적으로 열세인 체첸군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천의 러시아군 병력을 시내 곳곳에 고립시킨 뒤에 도심지에 위치한 관공서 건물과 MVD 사령부, 러시아군 사령부 건물을 함락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격전이 벌어졌지만 시내 중심가의 주요 건물을 체첸군이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대신에 사령부도 교전지역으로 만들어서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없게 만들어서 시내의 러시아군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공세 당시의 체첸군

 

  시내에 고립된 러시아군은 공황에 빠진 채 서로 고립된 상태로 버텨야 했다. 어떤 부대는 주변에 있는 병원 건물을 점거하여 체첸군의 진입을 막는 인질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무니치팔 9번 병원에서 러시아군이 500명의 인질을 잡고 대치하기도 하였다. 사태는 부데노프스키를 그대로 재현하여, 일주일 뒤에 러시아군은 100명을 인간 방패로 동행하고 자기 군부대까지 빠져나갈 수 있었다.

 

 

 

 

남서 전선 사령관 아흐마드 자카예프

 

   세 방향에서 진입한 체첸군은 러시아군이 2달이나 걸려 점령한 도시를 불과 이틀만에 함락시켰다. 특히 서쪽에서 진입한 아흐마드 자카예프는 그로즈니 철도역을 공격하여 RPO 화염방사기가 가득 실은 군용 열차를 노획하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300명이 넘었다. 서쪽을 담당한 또 다른 지휘관은 루슬란 겔라예프는 도쿠 우마로프와 함께 그로즈니 시청을 공격하였다. 당시 러시아군은 처음에는 버텨보려고 했지만 체첸군의 사면 약속을 믿고 시청을 빠져나오다가 겔라예프에 의해 사살되었다.

 

 

 

 

도쿠 우마로프. 그로즈니 전투에 서부군으로 참전했으며 2009년 현재 체첸 반군의 수장

 

  러시아 정부는 체첸군의 기습에 놀라울 정도로 안이하게 대처하였다. 최초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러시아 내무부 수석 대표 파벨 골루베츠는 '도적들의 약탈 원정'에 불과하며, 시가지는 곧 다시 러시아의 손에 넘어올 것이라고 하였다. 시내에 고립된 러시아군을 구출하기 위한 최초의 병력이 움직인 것은 공세 후 36시간이 경과한 8월 7일 오후였다. 그 사이에 체첸군은 체첸의 제 2, 제 3의 도시인 구데르메스와 아르군도 수중에 넣었고, 그로즈니 북부의 러시아군 기지로 사용되는 '세이크 만수르 공항' 까지 교전이 확대되었다. 또한 체첸군이 점점 증원되고 있었다.

 

 

 

 

세이크 만수르 공항의 러시아군

 

 1996년 8월 7일,  한칼라 공항과 세이크 만수르 공항에서 '체첸군이 물러나기를' 기대하던 러시아군이 마침내 상황을 깨닫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공항에 있는 군기지에 배치되어 있던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그로즈니 시내에 돌입하였다. 체첸군은 19개월 전의 전투로 인한 충분한 노하우에다가 노획한 대전차 무기를 충분히 장비한 상태였다. 지난 '신년공세'의 양상이 재현되었다. 러시아군의 공세는 실패로 끝나고 기갑차량을 파괴되었다.  다음날인 8월 8일, 러시아군이 재차 공세를 펼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이미 수천이나 되는 체첸군 병력은 그로즈니 시내를 빠져나간 친러시아 정부에 더 이상 기대고 싶지 않는 자브가예프의 친러시아 병력까지 흡수하여 확대되고 있었다.

 

 

 

 

노획한 장갑차 위의 체첸군

 

  사태의 심각성을 겨우 깨달은 러시아군은 닷새가 지난 8월 10일, 276 기계화 연대를 주축으로 한 병력으로 그로즈니 남동부 지역에서 도심지로 진격하였다. 이 공세는 이틀에 걸쳐 지속되었고 간신히 주요 건물이 위치한 체첸 도심지로 들어서서 포위된 내무군 병력에게 약간의 보급과 부상자 후송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으며 지난 5일 동안의 전투로 18대의 전차, 69대의 장갑차, 23대의 트럭과 3대의 헬기가 격파되었다. (3대의 헬기 중 2대는 샤밀 바사예프가 직접 격추했다고 한다.) 공격의 선봉이었던 276 기계화 연대는 900명의 병력 중 15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5일 동안이 러시아군 전체 사상자는 공식발표만 1천명이 넘었다.

 

 

 

 

고립지역에서 전투하는 러시아군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걸고 한판의 승부를 노렸던 체첸군은 기대했던 최대의 전과를 얻었다. 불과 850명으로 시작된 공세로 1만 5천이 넘는 러시아군과 친러시아 부대가 장악한 도시를 공격하여 단 이틀 만에 시내 대부분의 거점을 장악하거나 통제하였다. 공세 후에 합류한 체첸인과 투항한 자브가예프의 병력까지 포함해서 체첸군 병력은 6천에서 7천에 달했으며, 시내에는 2천의 러시아군이 고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탄약 보급과 식량 보급도 받지 못한 채 절망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일명 '체첸의 괴벨스'라 불리는 뛰어난 선전술을 자랑하는 모브라디 우두고프는 러시아 방송에 전화를 걸어 '체첸의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도시를 접수했다고 하였다. 1차 체첸전 당시에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러시아 헌법의 수호'를 외치며 체첸전에 뛰어든 것을 조롱한 것이었다. 공격 중에 다리에 총상을 입은 샤밀 바사예프는 그로즈니의 외신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죽은 러시아군의 살을 먹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버틸 것이다." 

 

 

 

 

8월 16일의 그로즈니 상황도. 녹색이 체첸군 영역, 짙은 파란색이 러시아군 영역. 노란색은 경합 지역

 

  1996년 8월 11일, 올레그 로보브를 대신하여 러시아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체첸의 전권을 위임받은 안전 보장 이사회의 알렉산더 레베드는 러시아의 무력으로 이 사태의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슬란 마스하도프에게 협상 의사를 타진하여 러시아 군 사령관인 콘스탄틴 풀리코브스키와 마스하도프의 대면을 주선한다. 마스하도프는 낡아 떨어진 지프를 타고, 풀리코브스키는 군용 헬기를 타고 약속된 장소에서 만났다. 그들은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했지만 어쨌든 8월 17일, 체첸 영내의 모든 군사 행동 중지를 합의하였다.

 

 

 

 

노획한 전차 위의 체첸군

 

   레베드의 협상은 군사적으로 피치못할 선택이었다. 8월 14일 경에 체첸군은 그로즈니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중심가의 관공서 건물도 대부분 점령하거나 봉쇄하고 있었으며, 한칼라 공항과 세이크 만수르 공항 (러시아는 북부 공항이라고 불렀다.) 의 러시아군 주둔지까지 공격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구데르메스와 아르군 마을을 장악한 데 이어서 베데노와 우르스 마탄 까지 체첸군이 집결하는 상황이었다.

 

 

 

 

여성 체첸 지원군

 

 그러나 모스크바의 정치인과 군 장성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무부 장관 아나톨리 쿨리코프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레베드의 협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전쟁에서 패배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본래 군부의 강경파로 손꼽히던 풀리코브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레베드에 의해 체첸군과 합의서에 서명을 했지만 결국 이틀 뒤에는 그것을 번복하고 만다.

 

 

 

 

여자 체첸 지원군. 1차 체첸전 당시에 자원해서 참전한 여자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8월 19일, 폴리코브스키는 '최후 통첩'을 하였다. 48시간 내로 모든 체첸군이 그로즈니 시내를 떠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 시내에 폭격과 공습에 이어 전면 공세를 하겠다고 하였다. 폭격에는 그전까지 사용하지 않던 전략 폭격기까지 동원할 것이며, 모든 방향에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시가지를 파괴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시내에 남아있는 5만에서 7만의 시민들은 물론, 아직까지도 포위망 속에 있는 러시아군 2천명까지 체첸군과 함께 말살시키겠다는 말이었다. 곧 시내의 주민들 사이에 엄청난 공황이 발생하였다. 워낙 체첸군의 공격이 신속하여 아직까지 피난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예고했던 러시아군의 폭격은 채 시한이 되기 전인 8월 20일 아침에 시작되었다. 시내 곳곳의 주택가와 병원, 아파트를 가리지 않고 파괴되었으며 주민들과 러시아군 모두에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체첸군은 도시 곳곳에 흩어져서 참호를 팠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의 마지막이 될 전투를 준비하며 러시아의 공세를 기다렸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옐친의 전권 대표 알렉산더 레베드와 신임 국방부 장관 이고르 로디오노프가 개입하여 군부 강경파를 제압하고 그들의 지휘권을 박탈하였다. 레베드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한 군사 목표를 위해 러시아군이 피를 흘릴 수는 없었다. 거기다 이미 러시아 대선에 대한 뜻을 굳히고 있었던 이 거물급 정치인은 옐친을 위해 수만명의 인명이 희생될 일을 대신하여 그 오명을 뒤집어 쓰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상황 판단력과 정치적 야심에 힘입어 러시아군의 대공세는 중단될 수 있었다.

 

 

 

 

서명을 주고받는 레베드와 마스하도프

 

 8월 22일, 해임된 풀리코브스키 장군을 대신하여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는 알렉산더 레베드는 최후통첩은 '질낮은 농담'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교전을 중단하고 군부와 정계의 강경파들을 제압한 레베드는 8월 31일, 하사 유르트에서 마스하도프와 종전에 관한 회담을 갖게 된다. 모든 군사 작전 중단과 러시아군의 철수, 그리고 체첸 독립에 대한 논의를 향후 5년 뒤인 2001년으로 미룬 하사 유르트 협정이 마스하도프와 레베드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환호하는 주민들과 아슬란 마스하도프

 

 마침내 체첸군은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출처 : http://www2.reliefweb.int/rw/rwb.nsf/db900sid/ACOS-64BJ3M?OpenDocument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Grozny_(August_1996)#cite_note-8
         http://en.wikipedia.org/wiki/Akhmed_Zakayev
        http://en.wikipedia.org/wiki/First_Chechen_War
          http://chechnya.genstab.ru/art_tr_groz96.htm
          Ser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
          Paul Murphy의 The Wolves of Islam
          Olga Oliker의 Russia's Chechen wars 199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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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 작성시간 09.04.05 만세! 체천군만세! 체첸의독립을 위하여!
  • 작성자이동준 | 작성시간 09.04.06 이건 뭐...할말이 없네요. 러시아도 용케 저런 사람들을 지배할 생각을 했군요...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9.04.06 만세! 체첸만세!알라후 아크바르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09.10.27 체첸군이 마지막 도박을 건게 결국 눈부시게 성공하는군요... 6개월에 걸쳐 치밀한 작전을 세웠던 마스하도프가 이 승리의 최대 공헌을 했군요... 영화같은 극적인 결말이네요... 이때 체첸이 독립했어야 했는데 안타깝네요... 다시 내리막길이라니...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10 와우!!!..체첸군이 승리했군요..체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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