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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40. 해자를 메우다

작성자jager|작성시간09.12.09|조회수2,400 목록 댓글 24

 

 

 

 

    - 1차 체첸전에서의 러시아군 패배의 두번째 원인은 그로즈니 봉쇄 실패였다.. 우선 '신속하고 확실한 승리'를 주문하는 파벨 그라쵸프를 비롯한 러시아 군부 수뇌부와 정치가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러시아군은 쾌속의 진격을 해야 했고, 그로즈니 외곽에 도달하자마자 시내로 바로 투입되어야 했다. 남쪽을 봉쇄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하였고, 러시아 군의 병력 상으로도 충분한 여유가 없었다.  결국  체첸군은 남쪽 통로를 통해 식량과 물자를 공급받으며 러시아군에게 최대한의 피를 강요하고, 전투 후 남쪽 통로를 따라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숙달된 병사들을 안전하게 후퇴시킬 수 있었다. -

 


    1999년 10월 15일, 러시아군은 테레크 강을 도하하여 서쪽과 동쪽에서 각각 남하하였다. 테레크강 북쪽을 확보하여 체첸 영내에 병력 보충과 물자 보급을 위한 진지 구축을 성공한 러시아군의 체첸 침공 작전의 두번째 국면에 들어선 것이다. 불가코프 중장의 북부군이 체첸 수도 그로즈니의 북쪽 영역을 점령하고 야포 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사마노프 중장의 서부군과 트로체프 중장의 동부군이 그로즈니의 서쪽과 동쪽을 우회하여 포위망을 구성하는 것이 이번 국면의 주요 목표였다.

 

 

 

 

 

 

테레크 강을 건너는 러시아군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라는 요새를 공격하기에 앞서 주변 해자를 먼저 메우기로 결정하였다.  지난 전쟁 당시 체첸군의 능력을 간과하고 수도 남쪽의 보급로를 열어둔 채 정면 공격을 가했다가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체첸의 수도를 함락시키기에 앞서 주변 거점을 파괴하여 포위망을 형성하고, 체첸군의 추가 병력과 보급 물자가 도시에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공중 폭격과 야포 포격으로 체첸군의 주요 거점을 최대한 파괴한다는 계획이었다. 최대한 러시아군의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원거리 투사 무기에 최대한 의존하고, 지상군의 진입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억제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북부군의 공세. 톨스토이 유르트와 페르보마이스카야를 점령하고 북쪽의 능선을 야포 진지로 구축한다.

 

 


     북부군은 테레크 강 남하 하루 뒤인 10월 16일에 그로즈니 북쪽 15킬로 떨어진 톨스토이 유르트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불과 3일 만에 수도 북쪽 산맥에 위치한 체첸군의 방어 전선을 돌파하였고, 수도 서북쪽에 위치한 페르보마이스코예에 도달하였다. 체첸군은 북부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10월 19일에 페르보마이스코예로 반격을 가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북부군은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약한 북부 지대라는 이점과 수도와 거리가 근접하다는 지리상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1999년 10월 20일에는 그로즈니 북쪽 10킬로 선에 도달하여 야포 지대를 구축하고 포격을 시작하였다.

 

 

 

 

러시아군의 포격. 북부군의 진지 구축 이후 그로즈니 함락되는 그날까지 포격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서부군과 동부군의 임무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수도 봉쇄를 위해서는 체첸 중부지대의 체첸군 주요 거점을 하나하나 함락시켜야 했다. 또한 남쪽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체첸 강경파의 입김이 강한 곳이었고, 그들은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공세 첫단계에서 러시아군이 돌파해야될 목표는 서부의 바무트와 동부의 구데르메스였다.


   러시아 서부군의 첫번째 강적인 바무트 마을은 지난 전쟁 당시 체첸군의 정신적 지주였다.  충분한 화력을 보유한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공세 속에 이 작은 마을은 무려 18개월을 버텨냈다. 이번 전쟁에서도 전쟁 시작 순간부터 바무트에 대해 러시아군의 폭격이 시작됬지만, 서부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한 10월 20일 무렵에도 바무트의 체첸군은 방어선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체첸군

 

   서부군 사령관 사마노프는 이에 대해 잉구세티야 국경지대 도로 봉쇄 조치를 하달한다.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서 서쪽으로 가는 주요 도로를 차단하여 체첸군에 유입되는 보급 물자와 병력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바무트 마을이 지난 전쟁 당시 장기간 버틸 수 있었던 주요 이점이 서부 잉구세티야 쪽 체첸인들의 증원이었던 점을 상기하면 적절한 조치였다. 체첸군의 봉쇄를 거의 완성한 러시아군은 공군과 야포의 화력에 최대한 의존하며 체첸군을 공격하였다.


  러시아 동부군이 맞닥뜨린 첫번째 관문은 체첸 제 2의 도시 구데르메스였다. 이곳의 사정은 좀 복잡하게 돌아갔다. 해당 지역에 포진한 체첸군 지휘관은 살만 라두예프와 아르비 바라예프였다. 라두예프는 고향 노보그로젠스키가 구데르메스 인근에 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포진해 있었고, 아르비 바라예프도 자신이 지휘하는 400명의 부대를 이끌고 구데르메스 동부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들은 10월 17일부터 구데르메스 외곽에 도달한 트로체프의 러시아 동부군을 상대로 방어전을 준비한다.

 

 

 

 

체첸군. 이번 전쟁에 있어서도 군사적으로 유능했지만, 내부 분열이 심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구데르메스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야마다예프 다섯 형제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난 1998년- 99년의 내란기 당시 아르비 바라예프의 부대와 격전을 치뤘던  야마다예프들은 와하비 세력들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고, 결코 와하비들이 저지른 전쟁으로 피를 흘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가오는 러시아군과 자신의 세력권인 구데르메스에 주둔한 와하비 군의 사이에 낀 야마다예프 형제들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1999년 10월 말,  야마다예프 형제들은 러시아 동부군 사령관 제나디 트로체프에게 협상을 제안하고, 자신들의 협력할 의사를 전달한다. 살람 라두예프의 '두다예프 군'과 아르비 바라예프의 부대는 러시아 동부군의 공세 속에서 약 1달 동안 구데르메스 외곽 지역에서 방어전을 했지만, 야마다예프 형제들이 러시아군에 협력하자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99년 11월 12일, 러시아 동부군은 구데르메스 시내로 거의 무혈 입성하였다. 와하비 강경 세력과 체첸 토착 씨족과의 반감으로 인한, 러시아 군의 기대 이상의 행운이었다.

 

 

 

 

 

1차 체첸전 당시의 술림 야마다예프.

강력한 두다예프 지지자였으나 과격 와하비 세력과의 내전으로 인해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군의 편에 섰다.

 


    동부군의 쾌거에 이어 서부군도 바무트 공격의 박차를 가했다. 역시 체첸군의 정신적 지주는 그 이름에 걸맞는 강적이었고, 개전 직후부터 시작된 포격과 본격적인 러시아 지상군의 공격 속에서도 아직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잉구세티야 국경지대 차단 조치가 서서히 힘을 발휘하였고, 마을에 주둔한 체첸군의 보급 능력도 점점 한계에 달했다. 거기에 주민들의 호응도 지난 전쟁만 못했다. 러시아군이 체첸 영내의 모든 가스와 전기를 차단한 채 지상군의 진입이 성공한 곳에만 점차로 공급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주민들로서는 크게 동요할 만한 일이었다.

 

 

 

 

 러시아군의 10월 31일 상황도

 


    그리하여 구데르메스가 함락된 1주일 뒤인 1999년 11월 19일, 러시아 서부군은 체첸의 '요새' 바무트를 함락하는 데 성공하였다. 물론 대가없는 성공은 아니었으며 러시아군 전사자는 공식발표만 23명에 달했다. 마침내 서부군과 동부군이 첫번째 관문을 각각 통과하였다. 테레크 강을 건넌지 한달이 지난 뒤였다. 1차 체첸전과 비교하면 무척 늦은 속도였지만 러시아군 수뇌부는 개의치않았다. 작전 시간표에 따라 무리하게 진격하다 막대한 피해를 본 지난 실수를 거울 삼아 이번에는 사상자를 줄이는 것을 작전의 최우선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느리면서도 확실한 진격으로 전술 목표를 향해 한발한발 다가갔다.

 

 


   서부군과 동부군의 다음 목표는 우르스 마탄, 아르군, 살리였다.  그로즈니 외곽의 체첸군의 주요 거점들이었으며, 특히 남서쪽 20킬로 떨어진 우르스 마탄은 과거 체첸 강경파들의 주요 거점이자 산악지대와 수도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그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람잔 아흐마도프와 샤밀 바사예프가 지휘하는 체첸군 3,500명이 각종 중화기를 비축한 채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남부 산악지대 도로는 이븐 하타브가 지휘하는 무자헤딘 500명이 보급로 확보를 위해 배치되었다. 사실상 러시아군의 그로즈니 봉쇄 작전의 열쇠는 우르스 마탄이었다. 이 거점을 장악하지 않는한 그로즈니의 보급로는 차단될 수 없었다.

 

 

 

 

 

하타브와 샤밀 바사예프. 우르스 마탄 사수에 전력을 기울였다.

  


   체첸 영내로 깊숙히 들어섬에 따라 러시아군은 지역 지리에 익숙한 추가 증원 병력이 필요하였다. 1999년 11월 23일,  러시아 정부는 횡령죄로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전직 체첸 그로즈니 시장 비슬란 관타미로프를 석방시켰다. 과거 체첸 독립 선언 직후 그로즈니 시장으로 임명됬던 관타미로프는 두다예프 정부와의 불화로 러시아를 지지하는 잠정평의회에 가입하여 1994년 11월의 두다예프를 전복시키기 위한 반란군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비록 친러시아 도쿠 자카예프 정권 하에서 공금 오용으로 인해 러시아 감옥에 수감 중이었지만, 체첸 내의 지리에 익숙하면서 풍부한 교전 경험을 가진 몇안되는 친러시아 체첸 지휘관이었다. 그는 석방과 동시에 친러시아 체첸인 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우르스 마탄의 전장에 투입된다.

 

 

 

 

 

비슬란 관타미로프. 소련 군복무 경험도 있었던 친러시아 체첸인 중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서부군 사마노프 중장이 이 거점을 공격하는 동안, 동부군 트로체프는 그로즈니 동쪽 10킬로에 위치한 아르군을 공격하였다. 아르군은 그로즈니, 구데르메스에 이은 체첸 제 3의 도시였다. 트로체프는 아르군을 북쪽, 동쪽, 남쪽 3 방향에서 포위하고 서쪽을 열어두었다. 그로즈니로 연결되는 통로를 개방하여 체첸군이 철수하도록 유도하고, 수도로 몰아붙여 최종적으로 몰살시킬 작전이었다. 사마노프 역시 우르스 마탄을 서쪽과 남쪽에서 공격하여 그로즈니로 연결되는 통로를 열어두었다. 체첸군이 준비된 진지에서 이동하여 그로즈니와 우르스 마탄 사이의 20킬로의 도로 상에서 러시아 공군에 쉽게 포착되어 파괴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었다. 독의 한쪽을 열어두어 쥐가 도망가도록 한 뒤에 때려 잡을 생각이었다.

 

 

 

 

 

11월 1일 경의 샤밀 바사예프


   하지만 체첸군은 쉽사리 러시아군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우르스 마탄의 체첸군은 결코 그로즈니로 이동할 기미가 없었고, 아르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11월 26일 경에 구데르메스 외곽 노보그로젠스키로 반격을 가하여 러시아군 60여명을 사살하고 마을을 점령하였다. 살만 라두예프의 '두다예프 군'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동부군의 반격으로 오래 버틸 수는 없었고 후퇴해야 했다. 또한 러시아가 장악한 테레크 강 북쪽의 '안전지대 -  나드테레츠나, 셀코브스키, 나우르스카야'에서도 체첸군 저격수가 야간에 러시아군 진지 주변에 매복한 채 저격하였다. 그리하여 해당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의 야간 활동이 사실상 중지되었다.

 

 

 

 

진지에서 야간 사격을 하는 러시아군. 체첸군은 지속적으로 러시아 막사와 전초선을 야습하였다.

 


    1999년 11월 29일,  러시아 서부군은 우르스 마탄으로 최초로 지상군을 투입하였다. 서쪽과 남쪽에서 이뤄진 양면 공격은 체첸군의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한다. 동부군은 아르군 외곽 지역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남쪽으로 크게 선회하여 첸토리와 베데노 지역의 체첸군과 교전하였다. 지상군의 작전에 병행하여 러시아 공정대도 남부 산악지대와 평야지대를 연결하는 경계 지역에 헬기를 통해 투입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체첸군이 산악지대로 후퇴하는 것을 막고, 지상군이 격멸할 수 있는 '받침대' 역활을 하는 것이었다.

 

 

 

 

우르스 마탄의 람잔 아흐마도프. 러시아군으로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체첸군은 러시아군의 포격 속에 최대한 버티면서 러시아 지상군의 진입을 기다렸다가 최대한의 피해를 안겼다. 일단 러시아군의 공세를 교착시킨 다음에는 후방 지역에 기습을 감행하여 적군의 진열을 교란시켰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공세를 정면으로 막아낼 중화기와 기갑전력이 거의 없었고, 러시아군의 전술도 한층 세련되어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서부군과 동부군은 그로즈니보다는 그 외곽의 도시를, 그 외곽의 도시보다는 그 주변의 마을들을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점차 체첸군을 한군데로 몰아붙였다. 최종적인 종착점은 수도 그로즈니였고, 그곳에 체첸군을 전부 몰아넣은 뒤에 포위망을 닫아버리고 말살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1999년 12월 6일, 러시아 동부군 사령관 제나디 트로체프는 아르군을 장악했음을 발표한다. 약 한달에 걸친 격전 끝에 마침내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동쪽의 핵심 거점을 손에 넣는다.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450명에 달했다. 3일 뒤인 12월 9일에는 서부군 사령관 사마노프 중장이 우르스 마탄의 '체첸 도적떼'들이 소탕됬음을 발표한다. 관타미로프의 체첸군을 선봉으로한 러시아군이 마침내 체첸 강경파의 핵심 거점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친러시아 체첸군. 2차 체첸전의 러시아군 공세의 선봉이었던 이들은 1만 5천에 달했다.

 


   이제 그로즈니의 봉쇄는 90퍼센트 이상 달성되었다. 마지막 남은 관문을 남동쪽 20킬로 떨어진 살리 마을이었다. 우르스 마탄에서 철수한 체첸군의 일부가 살리로 진입하였다. 러시아 공수부대가 살리 서쪽에 투입되어 그로즈니와 연결되는 순자강 다리 2개를 장악하였다. 샤밀 바사예프가 직접 살리의 전선을 지휘하며 러시아군의 공세에 버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각 마을 주민들이 과격파에 대한 반감과 러시아군 포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기 마을에서 나가달라고 체첸군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기도하는 체첸군. 러시아군의 공세는 천천히 확실히 진행되었고, 쉽게 대처하기 어려웠다.

 

   1999년 12월 14일, 러시아군은 체첸군이 철수한 살리 마을에 진입하고 연방기를 계양하였다. 테레크강을 건넌 지 두달 만이었다. 이것으로 체첸 수도 그로즈니 봉쇄는 완성되었다. 러시아군은 공군의 긴밀한 협조와 막강한 야포의 화력으로 체첸군의 진지를 제압하였고, 지상군의 접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현지 체첸인들을 회유하여 마침내는 그들 스스로 체첸군을 축출하도록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군이 입은 피해는 공식 발표에 의하면 1,500명 정도였다. 지난 전쟁 당시 그로즈니 공세 첫날에만 그 정도 피해를 입은 것을 감안하면 러시아군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작전을 수행했는 지 알 수 있다.

 

 

 

 

 

장갑차 위의 러시아군. 마침내 그로즈니 포위를 달성한다.

 

 

   두개의 관문을 넘은 러시아군은 이제 거대한 산을 넘어야 했다. 수천명이 넘는 체첸군이 집결한 수도 그로즈니였다. 진격을 위한 만반의 대비를 끝낸 러시아는 그로즈니 시내의 주민들을 향해 최후 통첩을 하였다.

 

     "... 12월 11일까지 그로즈니를 떠나라. 페브로마이스코예 (수도 북동쪽 마을)를 향한 통로를 열어두겠다. 이곳을 거쳐 빠져나간 사람은 살 수 있다. 만약 12월 11일 뒤에도 시내에 남아 있는 자들은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 추가 협상은 없으며, 남아 있는 자들은 모두 말살될 것이다..."

 


    1999년 12월 16일, 러시아 지상군은 마침내 그로즈니로 진입한다. 해자를 메운 요새 그로즈니를 향해 전투기와 야포로 무장한 막강한 러시아군의 화력을 등에 업고 그로즈니 시내로 진입하였다. 4차 그로즈니 전투가 시작되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Second_Chechen_War

           http://en.wikipedia.org/wiki/Gennady_Shpigun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war/chechnya2-5.htm

           http://www.historyguy.com/chechen_war_two.html

           http://www.pbase.com/igor01/chechnya&page=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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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2.17 러시아는 지난 전쟁에서 너무 큰 피해를 입은 뒤로, 친러시아 세력에 의한 대리전을 강하게 원했습니다. 내란기에 강경파의 전횡에 지친 전통 수피즘 세력들을 많이 포섭했죠
  • 작성자TheKing | 작성시간 09.12.25 바무트 전에 대한 기록은 없는건가요? 공식 전사자만 23만명이면 현대전으로서는 정말 어마어마한 수치인데 말입니다;; 한번 자료가 있다면 보고 싶어지는데요?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2.26 23명입니다. 교전 정보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는 힙듭니다.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09.12.26 헉 그로지야를 처음에 조지아 로 읽고 지도가 잘못된 줄 알았다능...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2.26 단어가 똑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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