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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41. 거미줄

작성자jager|작성시간09.12.24|조회수2,474 목록 댓글 18

 

 

 


"러시아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막중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클린턴은 러시아가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다"

                                                                                                                                          

                                   - 1999년 12월 8일, 체첸 전쟁에 대한 클린턴 미 대통령의 비난과

                                                                      이에 대한 엘친 러시아 대통령의 답변

 


 - ...러시아군의 1차 체첸전 패배의 세번째 원인은 병과 협력 부족이었다. 전장에 존재하는 다양한 병과와 부대간의 유기적인 협력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1992년 이후로 어떠한 연대급 이상의 훈련이 없었던 러시아군은 각기 다른 병과와의 협동 작전의 경험을 쌓을 수 없었다. 특히 국방군과 내무군 사이의 협력 부족이 심각하였다. 지상군과 공군 사이의 협력도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오폭도 잦았다.

 

    병과 간의 협력 부족은 유기적인 소규모 분대로 이뤄진 체첸군을 상대할 때 치명적인 단점이 됬으며, 효율적인 작전을 방해할 뿐 아니라 숱한 오인사격과 오폭의 원인이 되었고 러시아군 사상자를 급격히 끌어올렸다. 또한 화력을 보유한 기갑병력과 이를 보호할 보병 부대의 유기적인 협조 부족은 선두에 돌입된 기갑 병력의 고립과 전멸을 불러왔고, 후속된 보병들은 충분한 화력이 부족한 상태로 시가전에 노련한 체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


   
   1999년 12월 15일, 그로즈니 포위를 완성한 러시아군은 마침내 수도를 향해 첫발을 디뎠다. 체첸인의 수도 그로즈니는 이미 3번의 시가전을 경험하였다. 비슬란 관타미로프가 지휘하는 친러시아 체첸군이 두다에프 정부 전복을 시도한 것이 첫번째, 옐친이 명령한 첫번째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수도 중심지로 돌입했던 전투가 두번째,  점령된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체첸군이 기습을 가했던 전투가 세번째였다. 모두 러시아군에게는 치욕스런 경험이었으며, 말 그대로 '공포 (그로즈니)'의 경험이었다. 다시 그로즈니에 돌입하게 된 러시아군은 과거의 경험을 상기하고 거기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로즈니 시내의 러시아군. 지난 전쟁 때보다 여러모로 개선된 상태였다.

 

 


   우선 보병이 진입하기에 앞서 충분한 공중 폭격과 포격을 병행하였다. 모스크바 폭탄 테러가 벌어진 1999년 9월 이래로 러시아 공군의 그로즈니 폭격이 시작되었고, 북부군이 수도 북쪽의 능선을 점령한 10월 20일부터 야포 포격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러시아군 병사가 그로즈니에 첫발을 디디기에 앞서 러시아 공군은 3달 동안, 포병대는 2달 동안 밤낮없이 포탄을 퍼부은 상태였다. 자연히 민간인 피해가 엄청났었고, 본격적인 진격에 앞서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거주 민간인이 빠져나갈 안전 통로를 제공하여 시가지에서 주민들이 철수하도록 유도하였다. 시내의 주민들을 전투에 휘말리지 않게하려는 인도주의적인 측면과 함께, 충분한 화력을 사용하기 위한 사전 준비의 성격이 강했고, 시가전에 앞서 체첸군의 마음을 교란시키고 철수를 유도하며 시가전 상황에서 체첸군이 주민 속에 은신할 가능성을 줄이며 포착을 용이하게 한다는 고도의 전략적 사고가 깔려있었다.

 

   지난 전쟁의 패배의 주 원인으로 지목된 병과 협력 부족에 대해 러시아군은 복합적인 공격 제대를 편성한다. 우선 진입하는 부대로 보병 중대와 장갑차 중대를 편성한다. 여기에 화력 지원 부대로 전차 중대와 휴대용 화염투사기, RPG, 박격포 부대, 화학전 부대를 배치한다. 예비대로 보병 중대와 전차 중대를 두며, 체첸군이 매설한 지뢰 지대 개척과 잔해 제거를 위해 공병대도 같이 편성하였다. 여러면에서 체첸군이 지난 전쟁에서 사용한 유기적인 매복 전술을 본받은 것으로, 러시아군도 개별적인 병과별로 움직이다가 각개격파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소규모 분대씩 혼합하여 편성하여 필요시 각각의 분대가 적재적소에 사용되도록 하였다.

 

 

 

 

러시아군의 공격 제대 (Assault Team), 시가전에 적합토록 각종 병과가 결합된 소규모 부대로 운영되었다.


   보병의 공격을 지원하는 포병과 공군의 전략도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기존의 소련군의 전투 교리에 따르면 포병과 공군의 화력은 대규모로 배치되어 집중적으로 사용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 전투 방식은 역시 대규모로 운영되는 정규군과의 전투에서는 적절할지 몰라도 소규모 분대 단위로 움직이는 체첸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적절하였다. 체첸군이 소규모로 러시아군과 접촉하고 러시아군이 화력 지원할 때는 이미 해당 지역을 빠져나간 뒤이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번 전쟁에서는 러시아군의 공군과 포병은 최대한 분산되어 배치되었고, 1개 보병 중대에 1개 포대 (야포 5-8문)가 화력 지원을 담당하여 보병 지휘관이 필요할 경우에 자유롭게 포대에 요청하여 해당 지역을 신속히 포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러시아군 야포. 분산 배치되어 신속 지원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인 내무군과 국방군의 협력 체계를 만들기 위해, 러시아는 1차 체첸전 이후의 3년의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체첸 인근의 북코카서스 지역에서 내무군과 국방군, 국경수비대에 공군, 포병대까지 포함하여 종합적인 전술 훈련을 여러차례 반복하였다. 특히 1998년 7월에 북코카서스 전역에서 이뤄진 통합 훈련에서는 1만 5천의 내무군과 국방군이 참여하였다.

 

   훈련이 거듭될수록 점차 내무군과 국방군의 협력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구축되었고, 지휘 통제 문제도 점점 개선되었다. 대부분 내무군의 지휘권을 더 존중하였는데, 어디까지나 북코카서스는 러시아 연방의 영역으로 내무부가 관할할 문제라는 인식이 담겨있었다. 1999년 10월에 2차 침공이 시작되기 한참 전에 러시아군은 같은 상황에 대한 병과 훈련을 거듭하고 지휘 통제 경험을 쌓은 상태였다.

 

    수도를 봉쇄한 러시아군은 1차 체첸전 때와는 달리 다양한 방향에서 체첸군을 압박할 수 있었다. 무려 5개의 주요 축선에서 공격을 감행하였다. 순자강 방향의 북동쪽, 한칼라 공항 쪽인 동쪽, 우루스 마탄 방향에서 올라오는 남쪽, 알칸 칼라 쪽에서 올라오는 남서쪽, 그리고 잉구세티야 말고벡 쪽에서 내려오는 북서쪽 이었다. 특히 남쪽 방향에서의 공격에 힘을 기울였는 데, 체첸군이 산악지대로 후퇴할 경우의 최단거리 탈출로였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그로즈니 진격로.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1차 체첸전과 비교해 다양한 공격이 가능한 것은 확실했다.

 

 

   러시아군의 시가전 전술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러시아군 사령부는 그로즈니를 15개 구역으로 나눴다. 각각의 영역에 담당 부대를 지정하고, 해당 지역에 개별적인 정찰을 실시한다. 체첸군의 규모와 배치 정도가 파악되면 역시 담당부대마다 지정된 공군과 포병대로 체첸군의 주둔지를 타격한다. 그 다음 저격수가 경계를 서는 가운데 공병대가 체첸군이 설치한 지뢰지대를 개척하고, 러시아군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와 비슬란 관타미로프의 친러시아 체첸군이 투입된다. 이들이 해당 작전 지역의 주요 목표를 기습하여 점거하면, 위에 서술한 복합적인 공격제대가 투입되어 선발대가 점령한 거점과 거점 사이의 체첸군을 소탕한다.

 

 

 

 

 

건물에 진입하는 러시아군

 

   러시아군의 최정예인 스페츠나츠와 지리에 익숙한 친러시아 체첸군이 적군의 영역 한가운데에 거점을 만들고, 이 거점과 거점 사이를 후속 공격제대가 연결하는 방식으로 러시아군은 이를 '거미줄'이라고 표현했다. '거미줄'은 도시에 배치된 체첸군의 기동을 극도로 제한할 것이며, 각지에 고립된 채 섬멸될 것이라 예상하였다.


   1999년 12월 15일, 러시아군의 공세는 주로 동쪽과 남쪽 축선에 집중되었다. 주 목적지는 동쪽의 한칼라 공항과 남쪽의 미누카 광장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방식대로 사전 정찰로 파악된 위치에 막대한 포격을 가한 다음에 특수부대를 칼끝으로 한 다음 복합 공격제대가 후속하였다. 진격은 순조로운 편이었고 지난 전쟁 당시 러시아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던 한칼라 공항은 손쉽게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왔다. 역시 새로운 공격 전술에 따라 수월하게 작전이 성공할 것인가?

 

 

 

 

 

러시아군의 기갑 부대 행렬

 

   그로즈니 중심 시가지에서 3킬로 떨어진 남쪽의 미누카 광장에서는 일이 좀 다르게 돌아갔다. 우르스 마탄 쪽에서 치고 올라온 러시아군은 7대의 전차와 8대의 장갑차의 지원을 받으며 광장 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발대와 경계조의 감시를 우회하는 데 성공한 체첸군이 뒤쪽에 배치된 기갑 제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후방에 교전이 벌어지자 전진하던 부대도 정지하고 지원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역시 매복한 체첸군에 의해 전방의 선발대도 타격을 입었다. 삽시간에 공황상태에 빠진 러시아군은 필사적으로 시가지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 전투로 러시아군은 미누카 광장 주변에서 서방측 언론의 추정에 의하면 115명 이상 전사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이 전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지만, 이는 다가오는 12월 19일의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는 것을 막기위한 측면이 강했다.

 

 

 

 

 

그로즈니 전투의 체첸군 야전 사령관 아슬란벡 이스마일로프


  러시아군이 전쟁에 대비하는 동안 체첸군도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이번 그로즈니 전투의 총 지휘관은 아슬란벡 이스마일로프였다. 과거 샤밀 바사예프의 부데노프스키 인질극에 참여했던 주요 간부 중 한명인 그는 여러 군벌에 소속된 체첸군을 유기적으로 배치하여 수도를 요새화 하였다. 이 시점에 그로즈니 주둔 체첸군은 3천에서 6천으로 추정되는 데, 그 중 절반에 해당되는 체첸군이 샤밀 바사예프 소속이었다. 이들은 오크타야스키 지역에 배치되었다.

 

   훈자르 파샤 이스라필로프가 지휘하는 800명은 자보드스키 지역에 배치되었다. 아슬란벡이 직접 지휘하는 300명은 레닌스키 지역에 배치되었고, 함자트 겔라예프가 지휘하는 600명은 스타로프로미슬로브스키에 배치되었다.  러시아군이 시가지를 15개 영역으로 나눠서 공격준비를 했듯이, 아슬란벡도 시내 중심가를 몇개 구역으로 나눠 체첸군 지휘관들에게 할당하였다.

 

 

 

 

 

 

체첸군의 그로즈니 배치도. 함자트 겔라예프의 경우 후일 남서쪽 체르노르체에로 이동한다.

 

 

 

     또한 교전 직후 1달 만에 시가전을 치뤄야 했던 지난 전쟁과 비교하면, 이번 전쟁에서 체첸군은 그로즈니에 진지를 구축할 시간이 충분하였다. 러시아 공군의 폭격에 대비하여 시내 주요 시설 지하에 콘크리트로 건설된 방공호가 구축되었고, 포병대의 포격에도 쉽게 붕괴되지 않는 지휘소가 건설되었다. 러시아군의 화력에 노출되지 않고 체첸군이 이동할 수 있는 교통호와 매복할 참호가 집과 집 사이에 설치되었고, 러시아군의 예상되는 진격로를 바라보는 저격 지점도 미리 선정되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난 전쟁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러시아군 보병을 상대하기 위해 대공포도 은신시키고, 필요하면 시내 주변의 정유소를 파괴하여 유독가스와 연기로 러시아군의 시야를 흐리고 진격을 방해했다.

 

 

 

 

 

그로즈니 시내에 진지를 구축하는 체첸군


   무엇보다도 체첸군이 지난 전쟁에 비해 개선된 점은 통신 체계였다. 체첸군은 지휘 통제 시스템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으며, 러시아군을 정찰하여 적재적소에 이동 상황과 병력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토로라, 켄우드, ICOM 등에서 제작된 무전기와 아마추어 무선 장비, 휴대용 단파 라디오, 휴대전화까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부대와 부대 사이에 정보를 교환하고 지휘관에게 보고하였다. 휴대용 무전기를 가능한 1인 1대를 보유하도록 노력하였고, 각 지역 지휘관 급은 국제 통신이 가능한 위성전화기(INMARSAT) 까지 사용하였다. 1차 전쟁과 비교하여 체첸군의 지휘 통신 시스템은 월등히 향상되었다.

 

 

 

 

체첸군. 그들도 3년의 휴전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체첸군 주요 지휘관들은 러시아군의 진격 상황에 대한 정찰을 실시하였고, 병력이동에 따라 소규모 병력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군의 진격로는 순조롭게 시내 중심가로 들어서지 못하고 체첸군의 방어 병력과 격전을 치뤄야 했다. 북서쪽은 36번가, 북동쪽은 스타라야 순자, 동쪽은 키로프와 미추리아, 남쪽은 56번가의 슈라 코르타, 남서쪽은 체르노에츠에 거리에서 진격이 저지되고 매복 병력과 시가전에 들어섰다.

 

 

 

 

 

그로즈니 남동부 지역. 원 표시된 곳이 격전지

 

   특히 격전이 벌어진 곳은 동쪽의 키로프와 남쪽의 슈라 코르타였다. 키로프와 인근의 미추리아는 동쪽 한칼라 공항과 연결되는 도로 상의 지역으로 제나디 트로체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동부군이 시내로 진입하기 위해 넘어야 될 첫번째 관문이었다. 56번 도로가 지나는 슈라 코르타는 1차 체첸전 당시 그로즈니를 철수하던 체첸군이 마지막으로 방어 전투를 치뤘던 곳이며, 남부 산악지대로 빠져나가기 위한 주요 이동로였다. 지난 전쟁에서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곳이 이번에는 러시아군의 진격을 가장 먼저 상대하는 곳이 되었다. 러시아군의 전략이 얼마나 개선됬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체첸군. 사실상 퇴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교전을 시작했다.

 

   체첸군은 지난 전쟁보다 훨씬 공군과 포병 화력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부족한 숫자로 방어전을 수행해야 했다. 러시아군은 선발 보병대가 체첸군과 접촉하면 신속히 후퇴한 다음 포병과 전투기로 해당 지점을 공격한 다음에 다시 진격하는 전술을 썼다. 이 전술에 의해 체첸군은 러시아군과 직접 접촉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렇다고 원거리에서 공격할 만한 중화기나 포대도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화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배후로 우회하여 기습을 가하거나 방심한 러시아군 행렬을 매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열흘이 지나면서 체첸군의 방어 전열도 점차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1999월 12월 29일에 북서쪽 스타로프로미슬로브스키 지역의 36번 거리에서 체첸군이 뒤로 후퇴하였다. 거리 초입에서 러시아군과 교전하던 체첸군은 이제 시내 중심가에서 6킬로 떨어진 타스칼라 지역에서 방어전을 수행해야 했다. 그로즈니 서쪽 경계인 카르핀스키 언덕에서 러시아군과 격전을 치루던 훈자르 파샤 이스라필로프도 12월 30일에는 병력을 후퇴시켜야 했다.

 

 


 

 

그로즈니 북부 지역. 역시 원 표시가 격전지

 

 

  하지만 남쪽 56번 도로의 슈라 코르타는 쉽게 돌파되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해군육전대까지 투입해서 이 지역을 확보하려 했지만 56번가의 TV 송전탑 근처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체첸군 중에서도 정예로 손꼽히는 샤밀 바사예프가 사수했기 때문이다. 세심한 사전 준비와 막대한 지원 화력 속에 조심스럽게 러시아군이 진입을 했지만 역시 체첸 수도는 만만치 않은 강적이었다. 스타라야 순자 쪽과 체르노에츠에 거리에서도 러시아군의 진격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한집 한집 단위로 전진과 후퇴가 거듭되었다.

 

 

 

 

 

 

그로즈니 전투 당시의 샤밀 바사예프


   수도를 완전히 포위하고 주민 소개 명령을 내리면서 내심 체첸군도 동요되어 철수하기를 바랬던 러시아군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상황과 맞닥뜨렸다. 체첸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면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물론 지난 전쟁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교전하기 때문에 '신년 공세'처럼 엄청난 참사는 입지 않지만 역으로 획기적인 전과를 얻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저 한집 단위로 점령하면서 시내 중심가로 차츰차츰 진격하는 수 밖에 없었다. 길고 지루한 시가전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체첸군은 러시아군이 한발한발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2000년 새해를 맞아, 체첸군은 또 한번의 '신년공세'를 준비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Second_Chechen_War

              http://en.wikipedia.org/wiki/Gennady_Shpigun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war/chechnya2-5.htm

             http://www.historyguy.com/chechen_war_two.html

             http://www.pbase.com/igor01/chechnya&page=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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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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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웨버 | 작성시간 09.12.25 숫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반격을 준비하다니 역시 불굴의 저항 정신이군요.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2.26 밀릴 때 역습을 가하는 것이 그 기세를 죽이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12.28 드디어 연재 되었군요..ㅋㅋㅋ..잘 보고 갑니다~~~~~*.*
  • 작성자유리사이 | 작성시간 10.01.02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
  •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 작성시간 10.02.14 신년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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