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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46. 탈출

작성자jager|작성시간10.03.07|조회수3,574 목록 댓글 22

 

 

 

 

"러시아군은 2번이나 우리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하나는 그로즈니, 또 하나는 우르스 케르트였다."

 

                                                                                                               - 어느 체첸군의 회고

 

 

 

  체첸군 최후 거점인 샤토이 마을이 함락된 것은 2000년 2월 27일이었다. 그로즈니를 탈출하고 산악지대에서 러시아군과 교전한지 약 20일 만이었다. 체첸군의 깃발이 자유롭게 휘날릴 수 있었던 마지막 마을이 사라졌다.

 

  더 이상 거점을 차지할 수 없었던 체첸군 주력부대는 이제 전멸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러시아군은 이미 그루지아 국경 근처 산악지대에 남부군을 헬기로 공수 투입하였다. 퇴로를 막아버린 상태로 동부군과 서부군이 각각 남부 산악지대로 체첸군을 섬멸하기 위해 차근차근 밀고 내려왔다. 한겨울에 내린 눈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을 수 있는 퇴로도 좁게 만들었고, 거기에 가지만 앙상한 겨울 산은 체첸군이 매복할 수 없게 만들어서 러시아군의 헬기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러시아군

 

  샤토이를 빠져나온 체첸군은 두 갈래로 나눠졌다. 하나가 앞서 언급한 콤소몰스코에였다. 아르비 바라예프의 속임수에 넘어간 함자트 겔라예프는 북동쪽 콤소몰스코예로 향했다가 러시아군의 매복 속에 참혹한 일을 겪는다. 마을에 들어선 1000명의 체첸군 중에 살아서 빠져나온 사람은 150명에 불과하다.

 

  겔라예프를 제외한 나머지 체첸군 주력부대는 샤밀 바사예프와 하타브가 지휘하였다. 이들은 동쪽으로 빠져나가 바사예프의 고향인 베데노 쪽으로 이동하려고 하였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가장 끈질기게 항거했던 남동부 산악지대로 이동하여 재정비를 할 생각이었다. 샤토이가 함락된 이후로 그들도 겔라에프 못지않게 혹독한 상황이었지만 러시아군의 포위 속에 전멸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1500명으로 추정되는 체첸군 주력부대가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체첸군


   러시아군은 이미 샤토이를 공격할 때부터 이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아르군 계곡 일대와 베데노로 향한 산악지대의 주요 도로에 러시아군 부대를 광범위하게 배치하였다. 압도적인 제공권과 막강한 기갑전력과 포병대를 투입하여 이미 1,500명에 불과한 체첸군을 포위하여 궤멸시킬 생각이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체첸군이 계속 저항할 수 있는 등뼈가 박살나는 셈이었다. 지금까지 전개된 주요 전투에서 단련된 역전의 지휘관과 베테랑들이 이 1,500명 속에 포함되어 있어, 그들을 모두 죽인다면 체첸군은 계속 버티기 힘들었다.


   우르스 케르트. '늑대들의 문' 아르군 계곡의 입구인 두바 유르트의 남동쪽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도 러시아군이 포진한 주요 거점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 배치된 러시아군은 동부군 소속 76 친위 공수 사단 휘하 104 친위 공수 연대였다. 주둔지인 러시아 북서부 프스코프 (Pskov) 마을의 이름을 따서 흔히 프스코프 공수부대라고 불렀다.  104 공수연대는 3개 공수대대와 2문의 120미리 자주포를 장비한 포병대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각 공수대대는 3개 중대와 GRU 스페츠나츠 분대와 FSB 소속 스페츠나츠인 빔펠, 특수 수색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부대 할 것없이 러시아군의 최정예 부대였다.

 

 

 

 

 

러시아군


   2000년 2월 28일, 샤토이가 함락된 다음날 러시아군 사령부는 주력부대가 동쪽으로 행군할 경우를 우려하였다. 러시아 동부군 사령관 제나디 트로체프는 76 공수 사단에 두바 유르트와 우르스 케르트, 마케티 마을로 연결되는 지역을 경계할 것을 지시하였고, 76 사단 지휘부는 104 공수연대에 우르스 케르트 마을 남동쪽 4킬로 지점 산악지대에 저지선을 구축할 것을 명령하였다. 104연대의 목표는 두바 유르트 와 우르스 케르트, 셀멘하우젠을 연결하는 방향을 차단하여 체첸군이 베데노로 후퇴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워낙에 산악지대가 복잡했기 때문에 병력을 여기저기 분산해서 배치하였다.

 

   우르스 케르트 마을 주변에는 아바조굴 강과 샤로 아르군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있었고, 이 두개의 강 사이로 여러개의 고지가 솟아 있었다. 104연대 담당 구역 중 가장 남쪽에 솟은 고지가 1410고지였다. 여기에 3대대 소속 4중대와 45 빔펠 스페츠나츠, 특수 수색대 2개 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마을 남동쪽 3.5킬로 떨어진 지점에는 776 고지가 솟아있었고, 그보다 남쪽 1킬로에는 787고지가 솟아 있었다. 이 두 고지 사이에는 우르스 케르트에서 동쪽 마케티 마을로 향하는 길이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방어선을 구축하여 체첸군의 행군을 차단해야 했다. 이 고지 사이의 지형을 러시아군은 '안장'이라고 불렀다. 이곳에 2대대가 배치되었다. 1대대는 아직 동쪽 아바조굴을 건너지 않은 상태로 마케티 마을 서쪽에 주둔하였다.

 

  

 

 

 

 우르스 케르트 주변 고지의 러시아군 배치 상황. 동쪽에 보이는 것이 마케티 마을

 

 

  2대대 사령부가 위치한 곳은 776고지였다. 가장 우르스 케르트 마을에 가까이 위치했으며 가장 체첸군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은 대대였다. 자연스럽게 신경이 곤두선 2대대장 마크 니콜라에프 에브튜힌 중령은 776고지에 배치된 6중대에 세르게이 몰로도프 소령에게 4.5킬로 서쪽에 위치한 705.6 고지로 정찰대를 파견할 것을 지시하였다.'안장'을 통과하는 이슈티-코르도 도로를 봉쇄하는 데는 추가로 고지를 더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엿다. 몰로도프 소령은 12명의 정찰대를 이 고지로 향해 투입하였다.


   정찰대가 체첸군과 조우한 것은 2000년 2월 29일 12;30이었다. 교전하면서 정찰대 지휘관 알렉세이 보로보프는 즉각 20명의 체첸군과 조우했음을 보고한다. 러시아군은 즉시 비상에 걸려다. 마침내 또 하나의 대어가 나타난 것이다. 펼친 그물을 다시 감아 올리기만 하면 끝이었다. 2대대는 현위치인 '안장'을 봉쇄할 것을 명령받았고, 아바조굴 강 동쪽에 있던 1대대는 서쪽으로, 남쪽 1410 고지에 있던 3대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현 교전 지역으로 집결할 것을 명령받았다.

 

 

 

 

러시아군


    776 고지 위에 있던 2대대 소속 6중대는 전날 구축한 진지 속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체첸군의 예상 진격지점인 서쪽을 향해 참호를 파고 지뢰를 매설하였다. 정찰대가 체첸군과 조우했으니 이제 곧 본대가 등장할 것이다. 여러 정황상 그들이 그 본대의 첫 목표가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주변에 다른 러시아군이 집결하고 있었으니 잠깐의 시간만 벌 수 있다면 곧 러시아군이 에워쌓고 헬기와 야포 사격으로 전멸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시간은 점점 초조하게 흘러갔고, 정찰대와 교전을 벌인지 어느덧 4시간이 지났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러시아군에게 갑작스런 사격이 쏟아졌다. 놀랍게도 남쪽에서였다. 체첸군은 러시아군이 지뢰를 매설한 서쪽을 우회하여 남쪽에서 올라와서 6중대를 공격하였다. 체첸군의 사격 속에 러시아군은 후퇴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전방에 촘촘하게 매설된 지뢰지대는 통행로가 없었다. 갖고 있던 모든 화기를 동원하여 등뒤에 나타난 체첸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때가 오후 4시였다.

 

 

 

 

 

체첸군의 공격로. 남쪽으로 우회하여 러시아군 진지를 타격했다.

 

 


  1500명의 체첸군 본대를 지휘하는 샤밀 바사예프와 하타브는 러시아군의 포위망을 맞닥뜨리고 격론을 벌였다. 하타브는 776고지의 6중대를 무시하고 '안장'을 통과해 돌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언덕 위에 배치된 러시아 정예 공수중대와 교전하는 것을 꺼린 것이다. 하지만 지뢰로 한쪽 다리를 잃고 들것 위에 누워있던 샤밀 바사예프의 생각은 달랐다. 1,500명의 체첸군이 통과하기에는 '안장'이 너무 좁았다. 양쪽 언덕 위에 러시아군이 배치된 상황에서 그 사이로 행군한다면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고, 언덕 위에 있는 박격포는 그들의 후위대를 궤멸시킬 수도 있었다.


   의견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자, 마침내 샤밀 바사예프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다가 올 심판의 날에 알라의 앞에서 너가 수장의 명령에 불복했음을 증언하겠다."

 

 

 

 

 

들것 위의 샤밀 바사예프. 아직도 그는 최고 사령관이었다.


   스스로 한치의 오점이 없는 무자헤딘이라고 생각한 이븐 알 하타브에게는 최후통첩같은 말이었다. 즉시 바사예프에게 사죄를 구한 하타브는 70명의 지원자를 선정하여 그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776 고지의 6중대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공격하는 동안 나머지 체첸군 본대는 '안장'을 통해 통과할 것을 지시하였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6중대의 병력은 90명 정도였다. 하타브가 지휘한 첫공격에 6중대는 31명의 전사자가 발생한다. 그 중에는 6중대장 세르게이 몰로도프 소령도 있었다. 지휘관을 잃은 6중대의 지휘권은 2대대장인 마크 에브튜힌 중령이 인수하였다. 전 병력의 3분의 1에 달하는 전사자를 낸 6중대는 간신히 체첸군 공격 제 1파를 막아낸다. 극도로 지친 체첸군은 일단 물러서야 했다.


  잠시 한숨 돌린 에브튜힌 중령은 104연대 지휘부에 긴급하게 증원군을 요청하였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훨씬 심각한 상황을 맞닥뜨린 104연대는 즉시 1대대와 3대대에 좀더 빠른 속도로 긴급하게 지원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공격을 지휘한 샤밀 바사에프와 하타브는 수도없는 사선을 헤쳐나간 역전의 베테랑들이었다. 러시아군이 증원올 것을 예상했음은 물론, 그 방향까지도 알고 있었다.

 

 

 

 

 

전투 중의 체첸군

 

  1410고지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던 3대대 소속 중대와 빔펠 스페츠나츠는 70도가 넘는 가파른 경사길에서 체첸군 분대의 매복에 걸려든다. 그냥도 행군하기 힘든 산길에서 매복까지 걸려들자 러시아군은 쉽게 돌파할 수 없었다. 3대대 소속 부대들은 776고지에 고립된 전우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우회로를 찾았고, 그 중 일부 분대는 1킬로 남쪽의 787고지 근처까지 도달했지만, 역시 체첸군 분대의 매복에 의해 진격은 커녕 그 자리에서 참호를 파서 대치해야 했다.


  아바조굴 동쪽에 있던 1대대 소속 1중대 역시 급속으로 강을 도하하여 서쪽으로 진격하려 했지만, 강 건너편에서 60명 가량의 체첸군이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하할 기회를 놓친 1중대는 강 건너편에서 참호를 파고 대치하였다. 각지에 파견된 매복조의 활약으로 체첸군은 6중대를 공격할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거기에 낮게 깔린 짙은 안개와 구름은 러시아군의 공중 지원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날이 저물었다.


  2000년 2월 29일 밤, 776고지에서는 보기드문 혈전이 벌어졌다. 노련한 하타브는 한번 공격에 70명 이상을 투입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 러시아군 공수부대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었고, 그만큼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체첸군 본대의 병력은 줄어들게 된다. 대신에 하타브는 1개 제대가 끝나고 연이어 다른 제대가 공격하는 방식으로 방어하는 러시아군을 극도로 지치게 만들었다. 소위 '제파공격'이었다.

 

  

 

 

 

전투 시의 776 고지 주변 상황. 파란 깃발이 체첸군. 노란 낙하산이 러시아 공수부대

 


   오후 5시, 체첸군은 또 한번의 공격을 감행한다. 공격을 지휘한 사람은 이븐 알 하타브의 오른팔, '아부 알 왈리드'였다. 사우디 출신의 아부 왈리드는 아프간 전쟁, 보스니아 내전, 타지크 내전에 참가한 하타브 못지 않는 베테랑이었다. 그의 지휘 속에 러시아군은 다시 악몽같은 순간을 맞았지만 에브튜힌 중령은 또 한번의 공격을 간신히 버텨낸다. 그러나 6중대는 충분한 중화기가 없는 상황이었다. AGS-17 유탄 발사기, RPO-A 화염발사기, ZU-23-2 대공포 등의 지원 화기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날이 저물고 있었고 야간 전투는 러시아군이 극도로 꺼리는 전투였다.

 

 

 

 

아부 알 알리드. 사우디 출신의 하타브의 후계자였다.


   하지만 체첸군은 야간 전투를 선호하였다. 지리에 익숙한 그들로서는 러시아군에게 불리한 조건을 굳이 피할 생각이 없었다. 2월 29일 밤 11시 30분에 다시 지휘를 맡은 하타브가 재차 776 고지로 공격하였다. 이번에는 서남쪽과 북쪽에서 협공을 가했다. 체첸군이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만큼 공격할 수 있는 면적도 넓어진 것이다. 6중대는 이 공격을 버텨내면서 다시 21명의 전사자를 낸다. 벌써 3분의 2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공격하던 체첸군도 시간이 지체되는 만큼 사상자 수도 늘어갔다.

 

 

 

 

전투 중에 발생한 체첸군 사상자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한 체첸군은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776고지의 6중대에 무전을 하여 협상을 제안한다. 야간에 러시아군의 시야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통과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 대가는 러시아군의 목숨이었다.  "우리를 통과시켜주면 너희를  전멸시키지는 않겠다."  에브튜힌 중령은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설령 그들이 전멸한다 해도 체첸군을 살려서 동쪽으로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러시아군

 

  그들이 이 제안을 거절하는 동안에 남쪽에서 알렉산더 도스토발로프 소령이 3대대 소속 4중대를 이끌고 증원왔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776고지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 러시아군 증원대였다.  그들이 도착한 시간은 3월 1일 새벽 3시였다. 6중대의 탄약이 거의 고갈되던 순간에 도착한 4중대의 지원은 이 방어전을 좀 더 연장하게 하였다.


   3월 1일 새벽 5시, 체첸군은 전방향에서 고지를 향해 돌격하였다. 이미 기진맥진한 러시아 공수부대는 사방에서 진격하는 체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다. 복부에 총상을 입은 알렉산더 코르가틴 중위는 2개의 수류탄으로 항복을 요구하는 체첸군과 함께 자폭하였다. 남쪽의 드미트리 코즈젬킨 소위와 동쪽의 안드레이 파노프 중위도 남은 소대원으로 체첸군의 공격을 저지하다 전사한다. 전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우르스 케르트 전투 상황도. 붉은 색이 러시아 공정대. 푸른 색이 체첸군.

 


  이 시점에 살아남은 러시아 공수부대는 불과 20명 남짓이었다. 이들은 고지 거의 중앙에 에브튜힌 중령을 중심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방어태세를 갖췄다. 이제 곧 날이 밝는다. 조금만 더 버티면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화력 속에 체첸군을 전멸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1시간이 흘렀다.


  3월 1일 아침 6시, 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때까지 전투를 수행하던 에브튜힌 중령은 전사하였다. 도스토발로프 소령도 체첸군의 공격에 복부에 총상을 맞고 쓰러졌다. 마지막 남은 장교는 포격 관측장교 빅토르 로마노프 대위였다. 그들은 재차 몰려오는 체첸군을 향해 러시아군 사단 포격대를 동원하여 쓸어버릴 것을 요청하였다. 동이 떠 오르기만을 기다리던 러시아군 포대는 기꺼이 로마노프가 불러준 좌표에 따라 포격을 가했다.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러시아군의 포격 속에 6중대의 마지막 살아남은 병력은 거의 전멸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6중대의 무선 교신은 3월 1일 아침 6시 10분에 종료되었다. 포격이 시작된 지 10분 뒤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만 치명적이었다. 애초에 러시아 공수부대 6중대가 배치된 진지가 776고지가 아니라 남남서로 350미터 떨어진 다른 고지였다. 그래서 776고지에 있다고 생각한 로마노프 대위가 불러준 좌표는 정확히 그들이 위치한 진지 위였던 것이다. 결국 러시아군의 포격은 마지막 남은 러시아 공수부대의 방어 태세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776고지를 점령한 체첸군. 주변에 러시아군 시신이 널려있다.

 


  체첸군은 전투가 시작된 지 18시간 만에 목표를 달성하였다. 체첸군 본대의 퇴로를 차단하던 중요한 거점 하나를 확보한 것이다. 물론 전투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체첸군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교전에 참가하지 않는 나머지 체첸군은 게속해서 '안장'을 넘어 동쪽으로 행군하였다. 러시아군 사령부의 추측에 따르면 최소한 1천명의 체첸군이 이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러시아 동부군 사령관 제나디 트로체프는 하루밤 사이에 대어가 그물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에 격분하였다. 그 일대에 배치된 지상군과 내무군, 그리고 교전에 참가한 공수부대 나머지 병력들은 체첸군의 퇴로로 추측되는 셀멘 하우젠 쪽으로 급히 이동하였다. 하지만 체첸군은 이미 사지를 빠져나간 뒤였다. 다만 셀멘 하우젠 마을에 남겨진 40명이 넘는 부상병들이 주민들의 신고에 의해 러시아군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나중에 도착한 러시아 증원군. 전투 때 사용된 탄알 벨트가 널부러져 있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우르스 케르트 전투다. 애초에 러시아군은 이 경악할 사실을 숨기려고 하였다.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통신 보안이 유지되었지만, 다른 전투에서 76 사단 공수부대가 추가로 30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하자 결국 전말을 밝혀야만 했다. 처음에 트로체프는 러시아 공수부대 31명이 전사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그러나 교전 다음날에 이미 6중대 90명 중에 84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이 러시아군 내에서는 정확하게 알려졌었다. 결국 러시아 정부는 프스코프 마을 주민들에게 그들의 아들들이 84명이나 죽었음을 알려야만 했다.


   6중대의 생존자는 불과 6명이었다. 그 중 4명이 부상당했고 가장 선임자가 안드레이 프로세프 하사였다. 13명의 6중대 장교는 전부 죽었다. 6중대 외의 다른 부대도 체첸군과 교전하였지만 이들의 사상자는 발표되지 않았다. 체첸군은 6중대를 포함해서 교전 전체에서 러시아군 200명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6중대의 생존자들


  체첸군의 사상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2001년 러시아의 국방일보에 해당되는 '카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은 이 전투에서 체첸군 400명을 죽였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그 뒤 눈덩이처럼 커져간다. 2008년 러시아 정부 사이트는 500명 전사라고 발표했고, 곧이어 친정부 사이트 중 하나가 700명이라고 또 수치를 높인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체첸군 전사자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발표하지 않았다. 체첸군은 70명이 전투에 참가하여 25명이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전투 후의 우르스 케르트. 당시 안개가 매우 짙게 낀 날씨였다.


  우르스 케르트 전투는 너무나 턱없이 다른 체첸군 전사자의 수치 만큼이나 전모를 파악하기 힘든 전투이다. 확실한 것은 러시아 공수부대 84명이 죽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에게 러시아 최고 훈장인 '연방의 영웅' 훈장을 무려 22명에게 수여한다. 10년 동안 1,4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아프간 전쟁에서도 불과 65명이 수여받은 훈장이었다. 그걸 죽은 장교 전원과 사병 9명에게 수여한 것이다. 그만큼 이 전투에 대해 러시아군이 자긍심을 느끼며, 전멸할 때까지 끝까지 싸운 공수부대라는 이미지를 소중하게 생각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트로체프를 비롯한 사령부가 이 전투를 2주 동안이나 은폐하고, 그것도 처음에는 불과 30명이 전사했다고 축소 발표했음을 볼 때, 정확한 전황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러시아 북서부 프스코프에 있는 6중대 기념비

 

 

  또한 전투 시간에 대해서도 명확하지가 않다. 자료에 따라서는 2월 29일부터 3월 3일까지 최대 4일 동안 교전했다고 하지만, 전쟁을 직접 지휘했던 러시아 동부군 트로체프 장군의 회고록은 2월 29일 낮 12시 반부터 3월 1일 아침 6시까지 교전했다고 한다. 최초 언론 보도에는 심야 6시간 동안에 벌어진 교전이라고 소개한다. 하루 이상 지체했다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체첸군의 회고로 미루어, 전투는 2월 29일 밤부터 3월 1일 아침까지 치열하게 치뤄졌다고 추측된다. 

 

 

 

 

 

치료를 받은 샤밀 바사예프와 하타브, 아부 알리드. 그들은 또 한번의 사지를 탈출했다.

 
   체첸군은 야간 전투를 통해 포위망의 일각을 돌파하고 동쪽으로 빠져나간다. 모든 거점을 상실했지만 숱한 전투로 단련된 베테랑들과 역전의 지휘관들은 다시 살아남았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출처 :  GM Troshev. "My War", "Airborne voyska.70 years"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for_Height_776
             http://www.profcartoon.com/pictures/icons/bobja01.pdf

             http://www.pbase.com/igor01/chechnya&page=all
             http://6-rota.livejournal.com/

             http://kavkazcenter.com/eng/content/2010/02/28/11521.shtml
             http://artofwar.ru/comment/f/farukshin_r_n/6rota?ORDER=reverse&PAGE=6
             http://ru.wikipedia.org/wiki/%D0%91%D0%BE%D0%B9_%D1%83_%D0%B2%D1%8B%D1%81%D0%BE%D1%82%D1%8B_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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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3.14 감사합니다
  • 작성자Che_GueVaRa | 작성시간 10.03.09 오래 기다렷습니다!!!

    스패츠너츠 소속의 빔펠정도면 저도 들어본 정예중의 정옌데, 그런 그들의 매복을 알고 뒤통수를 따버리다니.. ( o . O )a;;;
    전멸할 때까지 싸웠다!!!!! 공자나 방자나, 이 건 서로 프로들이니.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3.14 둘다 실전 경험이 어마어마했죠
  • 작성자헬레인저 | 작성시간 10.03.30 제거님의 글보고 싶어요 . 얼렁얼렁 연재해주세요
  • 작성자닭아멍멍해바 | 작성시간 10.04.21 아...밤새서 한번에 다 읽게 되네요 연재가 이걸로 끝은 아니겠죠? 기다리고있어요!! 그리고 글 너무 감사합니다(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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