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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47. 자키스트카

작성자jager|작성시간10.05.02|조회수3,665 목록 댓글 17

 

 

 

자치스트카(зачистке). 러시아어로 청소를 의미한다 

 


  2000년 3월,  체첸의 모든 마을에 러시아군의 깃발이 휘날렸다. 한때 다게스탄까지 침공했던 기세등등한 체첸 강경파의 군세는 이제 베데노 계곡과 아르군 계곡 속으로 숨어들었다. 강경 와하비들과의 내란에서 패배하고, 이후 러시아군의 침공 속에서도 거듭 평화 협상을 제안했던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은 이제 테러리스트들의 두목이 되었고, 2000년 3월 17일부터 러시아 내무부 FSB의 체포 목록에 올랐다. 러시아는 마스하도프는 물론, 그의 이름 아래 존재했던 이치케리아 체첸 공화국의 모든 지휘관들의 항복을 요구하였다. 러시아는 체첸을 다루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아갔다. 굴복시키거나 죽이는 것이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 러시아 정부는 2000년 3월부터 그를 테러리스트로 지목했다.

 


  러시아 군은 장악한 체첸 영역 전체에 걸쳐 일제 소탕 작전을 벌였다. 주로 내무군에 의해 수행된 이 작전을 '자키스티카'라고 불렀다. 집집마다 수색하여 16세 가량부터 60세까지의 모든 남자들의 신분증을 검사하고, 신체를 검사하여 어깨에 총을 맨 자국이나 장시간 무기를 사용한 흔적이 팔, 손바닥, 목덜미 쪽에 남아있을 경우에는 반국으로 지목되어 끌려갔다. 끌려간 남자들은 러시아군 군부대에서 처리되거나, 그보다 더 완강한 경우에는 체르느코즈브, 한칼라, 톨스토이 유르트 등에 설치된 '정화캠프'로 끌려갔다. 콤소몰스코예 전투의 포로들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정화 캠프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개 생사를 알 수 없이 행방불명되었다.

 

 

 

 

러시아군의 '자키스트카'


  수도 없이 많은 체첸인들이 '자키스티카'로 인해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처형되었다. 그들 중에는 체첸군의 주요 지휘관들도 포함되었다. 그로즈니가 함락된 뒤에 러시아 군이 최초로 잡은 대어는 '살만 라두예프'였다.

 

 

 

 

살만 라두예프

    
  1차 체첸전 이후에 체첸 최대의 사병인 '두다예프 군'을 거느리고 체첸 동부를 휘저었던 살만 라두예프는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최대 정적이었지만 결코 바사예프나 하타브에 비견될 전략가가 아니었다. 2차 체첸전의 개전 초인 1999년 말의 구데르메스 전투를 치르면서 그는 대부분의 병력을 소모하였다. 이제 누구의 눈에도 대세가 기울었음이 명확한 상태에서 자기를 지킬 병력이 없다는 것은 체첸 땅에서는 죽음을 의미하였다.

 

   2000년 3월, 러시아 내무군 스페츠나츠인 빔펠 부대는 살만 라두예프의 고향 노보그로젠스키에서 '외로운 늑대'를 생포하였다. 러시아 스페츠나츠의 작전은 너무나 완벽해서 살만 라두예프가 그의 경호원과 회계 책임자와 함께 끌려갈 동안에 인근에 있던 100명이 넘는 라두예프 사병들은 눈치채지 못하였다. 살만 라두예프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저항은 커녕 몇시간 동안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체포된 살만 라두예프


  생포된 살만 라두예프는 테러, 납치,  범죄 단체 구성 등 18개의 혐의로 재판을 받기 전에 FSB가 관리하는 악명높은 모스크바 레포르토프 감옥에 18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감옥에 수감되면서 1차 체첸전에서 러시아를 수차례 조롱했던, 그리고 내란기에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에 수도 없이 도전했던 외로운 늑대는 러시아 정부에 매우 협조적인 자세로 재판에 임했다. 그는 체첸이 러시아와 협정을 맺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까지 발언하였다. 하지만 그런 발언들로 그의 형량을 줄이기에는 그는 너무나 거물이었다.

 

 

 

 

 

레포르토프 감옥의 살만 라두예프


  러시아 법정은 2001년 12월에 살만 라두예프에게 종신형을 선고한다. 사형제가 존재하지 않은 러시아 법정의 최고형이었다. 살만 라두에프는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라두예프는 다시 레포르토프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솔리캄스키 특별 감옥에 이송되었다. 2002년 12월, 살만 라두예프는 감옥에서 죽었다. 사인은 '내출혈'이었다. 러시아 공식 발표는 질병에 의한 사망이었지만 내출혈은 구타 등의 외부의 힘이 가해졌을 경우에 발생한다. 이로 인해 죽음에 이를 정도였다면 심한 고문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살만 라두예프의 가족들은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거절하였다. 테러리스트의 시신을 돌려줘서 장례를 치를 수 없도록 하는 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 사진을 보는 살만 라두예프

 

   러시아군의 그 다음 사냥꾼은 루슬란 알리하지에프였다. 과거 소련군 전차 장교로 복무했던 알리하지에프는 1차 체첸전에서 살리 지역의 방어를 담당했고, 그로즈니 함락 이후의 아기스티 전선을 담당하며 샤밀 바사에프, 함자트 겔라예프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지휘관이었다. 1996년 8월의 '지하드' 전투에서는 레닌스키 방면을 담당했으며, 준장의 계급까지 올라갔다.

 

 

 

 

루슬란 알리하지에프

 

   2차 체첸전이 발발할 당시 알리하지에프는 이치케리아 체첸 공화국의 국회 의장이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최측근이었던 알리하지에프는 러시아군이 진격하는 상황에서도 사령관으로 돌아가 전투에 임하는 대신에  러시아 측에 수차례 협상을 제안하였다. 그는 강경파로 인해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체첸 땅이 다시 황폐화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대답은 마스하도프와 똑같았다. 그도 FSB의 체포 명단에 올라간 테러리스트에 불과했다. 체첸 공화국 국회 의장이라는 직함은 러시아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다.


   2000년 5월 17일 밤, 루슬란 알리하지에프는 고향인 샬리에서 장갑차에 헬기까지 동원된 러시아군에 의해 생포되었다. 이미 군 사령관이 아닌 정치인이었던 알리하지에프는 저항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은 수갑을 채우고 눈을 가린 채 장갑차 속에 집어넣고 어딘가로 끌고 갔다. 알리하지에프의 그 뒤의 소식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체첸 측에서는 그가 레포르토프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당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8월경에는 "FSB의 특수 작전으로 알리하지에프를 생포했다"고 발표했다가, 9월 21일에 "신원을 알 수 없는 무장 단체'에 의해 알리하지에프가 끌려가서 사망했다고 말을 바꿨다. 살만 라두예프와 달리 그를 재판에 세울 명목이 없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생포하여 죽인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군의 "자키스티카"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2000년 6월 6일, 아직까지도 간간히 기습 작전이 진행되던 그로즈니 일대에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실시되었다. 수도 없이 많은 체첸군이 러시아군의 검문에 걸려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러시아군은 체첸 반군의 은신처와 가까운 남부 산악지대에 집중적인 색출 작업을 진행하였고, 필요하다면 몇날 며칠이고 마을 전체를 봉쇄하여 모든 집집 마다 계속해서 수색하는 일도 많았다. 필요하다면 이웃 코카서스 공화국까지 수색의 폭을 넓혔다.

 


  외국에서 생포된 체첸반군의 주요 지휘관이 바로 투르팔 알리 아타게리프였다. 전쟁 전에는 체첸 국립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던 인텔리였던 투르팔 아타게리프는 압하지아 전쟁부터 참전했던 전쟁의 달인이었다. 1차 체첸전에서 체첸 동부 구데르메스, 아르군, 알레로이 등에서 활약했던 아타게리프는 살만 라두에프, 훈자르 파샤 이스라필로프와 함께 1996년 1월의 키즐레이 인질극과 페르보마이스코예 전투에 참가하였다.

 

 

 

 

투르팔 알리 아타게리프

 


   1차 전쟁 종전 후에 아슬란 마스하도프 정부의 총리 자리까지 올랐던 아타게리프는 강경파의 도전을 심히 경계하엿고, 1999년 5월에 당시 FSB 책임자였던 푸틴에게 직접 전화하여 바사예프와 하타브의 다게스탄 침공이 임박했다는 경고까지 해줄 정도였다. 그는 아슬란 마스하도프와 마찬가지로 강경파로 인해 체첸이 파국을 맞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7월에는 직접 모스크바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러시아 내무부와 면담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해법을 찾으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눈에 그는 이치케리아 공화국의 총리가 아닌 페르보마이스코예 전투에 참가했던 테러리스트에 불과했다. 1999년 7월 16일, 아타게리프가 러시아 모스크바 브누코프 공항에 내리자 마자 러시아군은 아타게리프를 체포하였다. 그것이 러시아 내무부의 대답이었다. 다행히 체첸 공화국의 공식 항의에 따라 이틀 뒤에는 석방되었고 아타게리프는 러시아 정부측의 대답을 몸으로 확인한 뒤에 다시 체첸으로 떠나야 했다.

 


  2000년 10월 28일, 투르팔 알리 아타게리프는 다게스탄 마하칼라에서 러시아군에게 포착되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운이 좋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는 항의할 체첸 공화국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군인이 아닌 정치가엿던 아타게리프는 몇명의 경호원을 제외하고는 개인 사병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는 생포에 대항할 수 없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에게 전적으로 충성했던 거의 마지막 체첸 지휘관'은 그렇게 러시아군의 손에 체포되어 역시 레포르토프 감옥에 수감되었다.

 

 

 

 

러시아군

 

 

 키즐레이 인질극의 주범으로 15년의 형을 선고 받고 예카테린부르크 감옥으로 이송된 아타게리프는 2002년 8월 18일에 죽었다. 사인은 신장 질환으로 인한 '내출혈'이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아타게리프는 건강에 문제가 없었으며, 신장 쪽에 질환이 생긴 적도 없었다고 한다. 비록 러시아에 사형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체포된 체첸군 지휘관들은 러시아 감옥에서 살아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2000년 3월 26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52.9프로라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치케리아 체첸 공화국의 빈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체첸의 대표를 낙점해야 했다. 얼핏 러시아인으로 선출할 것을 예상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전쟁의 러시아군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 체첸 강경파에 대한 체첸인들의 반감이었다는 점도 감안하면 그것은 매우 경솔한 선택이었다. 러시아인 대표를 군림하게 하여 뿌리깊은 체첸인들의 대러시아 반감을 자극시키기 보다는 친러시아 체첸인을 지목하여 그를 내세우는 것이 적절하였다.

 

 

 

 

 

술림 야마다예프

 

   후보로 지목될 만한 사람들은 주로 '내란기'의 체첸 온건파였다. 체첸 전통 수피즘 세력들은 통제할 수 없는 강경 와하비 세력과 다가오는 러시아군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선택하였다. 대표적인 사람이 구데르메스 무혈 입성의 주인공 술림 야마다에프였다. 야마다예프 가문은 체첸 내에서도 만만치 않은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사병 집단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내란기에 구데르메스에서 아르비 바라예프와 압둘 말리크 메지도프의 와하비 군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였다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비슬란 관타미로프

 


   또 한명의 후보는 비슬란 관타미로프였다. 과거 두다예프 지지자였던 비슬란 관타미로프는 1993년경부터 친러시아 세력에 가담하였고, 도쿠 자브가에프 정권 하에도 요직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다예프나 자브가에프 정권 시절에 모두 그로즈니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소련군에 복무했고 내무부에서도 활동했던 관타미로프는 2차 체첸전에서 친러시아군 사령관이었다. 그로즈니 전투에 있어 그가 지휘하는 친러시아 체첸인 부대의 도움은 중요했으며, 군사적인 면에서는 가장 출중한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사이드 마고메드 카키에프


  위의 사람들은 모두 쟁쟁한 후보였지만, 각각 한번씩은 러시아에 대항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를 꺼림찍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후보도 존재했다. 사이드 마고메드 카키에프였다. 그는 조하르 두다에프가 최초로 독립의 깃발을 들었을 때부터 뿌리깊은 친러시아 세력이었다.

 

  카키에프는 직접 두다예프의 암살을 시도하다가 중상을 입은 적도 있었고, 1994년 11월의 비슬란 관타미로프의 1차 그로즈니 공세 당시 친러시아 체첸군 지휘관으로 참가하였다. 그 전투에서 카키에프는 방송국을 점령했는데, 당시 유일하게 주요 목표를 점령했던 친러시아 지휘관이었다. 그는 1996년 8월의 '지하드' 작전 당시 30명의 병력으로 그로즈니 시장 건물에서 교전하다가 함자트 겔라예프와 도쿠 우마로프가 지휘하는 체첸군에 포위된 채 교전하였고, 포위망을 돌파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무려 4번이나  "러시아의 영웅" 훈장을 수여받은 카키에프는 친러시아 체첸인으로 구성된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의 러시아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카키에프가 지휘하는 사병집단 '자파드'

 


   이들 모두가 만만치 않은 군사력과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결국 푸틴 대통령의 선택을 받지는 못하였다. 푸틴 대통령이 지목한 체첸의 대표는 1차 체첸전의 체첸 수피즘 무피 (최고 종교지도자)였던 아흐마드 카디로프였다.

 

 

 

 

아흐마드 카디로프

 

   타슈켄트 이슬람 학회에서 이슬람 교육을 받은 아흐마드 카디로프는 1차 체첸전 당시 철저한 두다에프 지지자였다. 다가오는 러시아군을 향해 하자바트(성전)을 선언했던 사람이 다름아는 카디로프였다. 심지어 그는 '러시아의 인구는 체첸보다 150배가 많기 때문에, 모든 체첸인은 러시아인을 최소한 150명을 죽여야 한다'는 유명한 말까지 남겼다. 두다예프 사후 아슬란 마스하도프 정권 하에서도 역시 무피로서 활동하였고, 마스하도프의 최측근으로  활약했으며, 수피즘의 대표로서 가장 와하비 세력에 비판적인 사람이었다.

 

 

 

 

 

왼쪽이 아흐마드 카디로프. 조하르 두다예프의 확고한 지지자였다.

 

  2차 체첸전이 발발할 당시, 그는 최초부터 러시아군의 손을 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러시아와의 교전을 거부했기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고 불과 10일 뒤인 1999년 10월 10일,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카디로프를 무피의 자리에서 해임하고 그를 반역자로 기소하였다. 하지만 체첸 최대 씨족 베노이 출신이었던 아흐마드 카디로프는 자기를 보호할 충분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고, 이 사병집단은 훗날 '카디로비치'라는 이름으로 체첸 최대 군사 집단이 된다. 오히려 체첸 동부 지방에 상당한 입지를 갖고 있던 아흐마드 카디로프는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러시아군의 무혈입성을 유도하였고, 동부 지역 마을 중에는 손쉽게 러시아군에게 항복한 경우가 많았다.

 

 

 

 

카디로프 가문의 사병, 카디로비치


  체첸 전통 수피즘의 대표로서의 뚜렷한 이슬람 성향과 뿌리깊은 반 와하비 감정, 거기에 체첸 최대 씨족의 일원으로 보유한 막강한 군사력은 아흐마드 카디로프를 푸틴 대통령의 낙점을 받게 하였다. 푸틴은 체첸 대통령을 새로 선출할 정도로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대통령령으로 직접 체첸 정부 수반을 임명토록 하였고, 2000년 6월 17일에 체첸 정부 수반으로 아흐마드 카디로프를 임명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대통령이 정식으로 선출될 때까지 임시였지만 푸틴이 직접 선정한 사람이니 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을 거라 믿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친러시아 체첸 공화국의 최고 대표가 되었다.

 

 

 

 

 

아흐마드 카디로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전사와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체첸군 간부들은 하나둘 죽어갔으며, 그 빈자리를 러시아에 항복한 체첸인들이 메꾸고 있었다.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들은 테러리스트가 되어 러시아에게 쫓기고 있었고, 전체를 통솔할 수장이 없는 상태로 각개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체첸군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었다. 그토록 혹독한 전장을 살아남은 독종들은 끊임없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도전하였고, 그 주요 타겟은 국방군에 비해 비교적 훈련도가 약하면서도 '자키스티카'를 직접 수행하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내무군 특수부대, 즉 오몬이었다. 체첸군은 러시아군에게 그들이 당한 만큼 갚아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Said-Magomed_Kakiev
            http://en.wikipedia.org/wiki/Akhmad_Kadyrov
            http://en.wikipedia.org/wiki/Sulim_Yamadayev
            http://en.wikipedia.org/wiki/Turpal-Ali_Atgeriy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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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10.05.02 두다예프가 결국 구타로 죽었군요. 앞으로 체첸인들의 친러시아 경향이 강해질 듯 하네요.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5.08 인재들이 하나둘씩 죽어갔죠
  • 작성자코쟁이22 | 작성시간 10.05.04 천안함 사건 터질즈음 해서 모스크바 지하철에 체첸인들의 테러가 발생해서 100여명이 사상했다고 나오던 걸 기억하는데... 정말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깊을 만도 하네요.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5.08 오랜 악연이었죠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0.05.09 오랫만입니다.~~~ 너무나 기다렸어요. 거기다 두 편이나.. ㅋ 이거 로또 맞은 기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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