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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야로슬라블의 바이노프 - 2

작성자[♥]CARDCAPTOR SAKURA|작성시간15.04.27|조회수428 목록 댓글 2



그렇다면 가장 위대하신 동지는 왜 이런 지역주의 파벌들의 작태를 묵인했던 것일까요? 31년의 저 말을 한 지 5년이 지난 뒤에조차도 말입니다. 심지어 저 말을 조직국에서 한 그 주에조차도,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당서기인 이반 카바코프가 자기 지역당의 패거리들을 승진시켜달라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리스트를 갖고 온 것도 그냥 승인해줬습니다. 정치국에서 적당히 슥슥 넘겨서 보냈고, 스몰렌스크의 당서기 루먄체프가 스몰렌스크 관료들 중에 말 안 듣는 것들이 있다고 불평불만 책동을 하니 스탈린 동지께서 말씀하시길


"누구든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치워버리시오."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일이 어쩔 수 없이 지연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스탈린 동지는 최적의 타이밍에 최적의 수를 두는 분이시지 하고 싶다고 막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일을 벌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첫째는 숙련된 행정관료들이 필요했었습니다. 어느 정도 노회하고 유능한 행정관료들의 수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렇기에 한 관료가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근무지를 바꾸는 경우가 굉장히 잦았습니다. 행정공백이 심하게 발생하는 데가 너무 많아서 그걸 메꾸러 가야 했거든요. 혼자 덜렁 가면 업무 제약이 크기도 해서, 행정효율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어느 정도 측근들을 데려가는 것을 용인해준 측면이 있습니다. 이 시기가 소련의 행정력을 미친듯이 투자하던 거대한 국가개발사업의 한 가운데였다는 것을 또한 고려해야합니다.


둘째로는 지역의 당서기를 공격하는 것은 체제 자체의 정당성을 흔드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지역의 "작은 스탈린"들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내부로 똘똘 뭉칠 것이었고 단기간에 이를 흔드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이 지연될 경우, 지역의 당조직도 중앙의 당조직과 공유하는 이익, 사상, 리더십이 있기 때문에 지방 잡으려다 중앙까지 태워먹는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높았다는 것을 스탈린이 신중하게 평가했을 것으로 봐야합니다. 스탈린은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신사적이고 동지애를 강조하며 비판을 합니다. 물론 속에서는.. ㅎㅎㅎ


바이노프는 네페도프를 포섭하고 이바노보 파벌을 전부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주(오블라스찌)의 하위 행정 구역인 군(郡, 라이온)으로 보냈습니다. 또 전국에서 그의 지인과 친구들을 끌어모아 야로슬라블에 자그마한 소왕국을 구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준은 행정능력과 조직능력이 아닌, 바이노프의 친분과 인연이었고요. 이들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행동하고 내부적으로 어떠한 비판도 하지 않았습니다. 파벌 외부에 있게 된 사람들, 그리고 파벌에 소속될만큼 직위가 높지 않았던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야로슬라블에서 바이노프의 힘은 너무나 강했고, 모스크바의 정치적 신호를 무시해도 별 상관없다는 투의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습니다. 



슬슬 모스크바의 소련 공산당 중앙위에서는 야로슬라블에서의 이런 움직임을 거북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이건 꽤나 전국적 현상이었습니다. 스탈린은 37년, 대숙청이 악명을 떨치던 그 해에 본격적으로 이들을 박살내버리기로 결심합니다. 1937년 1월의 끝자락에, 모스크바는 몇몇 신호를 보냅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더욱 경계해라,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확대하라, 당내 모임에서 정치화할 문제를 늘려라 등등. 그러나 야로슬라블 주 당의 첫번째 회기는 이를 별 거 아닌 것으로 취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냥 평소에 하던 데로 스타하노프 운동을 따르기, 주 공산당의 리더십을 드높이기 등등의 상투적인 소리나 하고 있었고 정작 제일 중요한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확대하고 당내 토론을 늘리라는 요청은 가볍게 무시합니다. 


1937년 1월에는 주 공산당의 대표를 뽑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이노프는 이 절차를 폭풍처럼 진행합니다. 당연히 자신의 그룹을 통해서 추천 받은 바이노프는 선거 회의 및 실무를 진행하는 데 그 모습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다음 안건"


"반대 있습니까? 질문이나 코멘트는? 없군요. 표결합시다. 누구든 있으면, 동지들. 카드를 들어주시면 됩니다."


"없군요. 다음 안건."


누군가 바이노프 파벌 측 인사를 비판하는 말을 하면, 바이노프 본인이 주축이 되어 그룹끼리 집단으로 목소리 싸움으로 가는 것도 일쑤였습니다. 내부 비판 같은 건 허용할 수 없다는 의미였죠. 모스크바 중앙은 이걸 다 보게 되고 심기가 매우 불편해집니다.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 편집부는 보다 못해 대놓고 바이노프를 비판하면서 그가 내부비판을 가로막고 내부에서 아첨을 부추기며 자아비판이 매우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당의 기관지, 그리고 혁명과 함께한 프라브다는 단순한 당기관지가 아닙니다. 프라브다가 어떤 사설에 대해서 특정 당 세포에서 토론이 있어야한다고 하면 그거 해야합니다. 공개적으로요. 그리고 바이노프는 여기서 치명적 자충수를 두어버리는데, 자기를 까는 사설이라고 당내에서 이 사설을 토론하는 걸 스킵해버립니다. 당시로서 그들은 이것이 안 그래도 내부 압력으로 귀찮아 죽겠는데 거기에 기름을 붓는 꼴을 막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오게 되지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이러한 중앙-지방의 갈등은 처벌권, 경제정책의 성과, 예산 할당, 인사 문제, 중앙당의 통제, 반대파 처벌, 제도 배열 등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어느 지역에서나 만연했습니다. 태초부터 중앙집권 성애자였던 스탈린 동지가 보기에 흡족하지 않으셨죠. 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면서 스탈린은 계속 관료제적 시스템 속에서 지역당이 중앙당으로 수직적으로 엄격히 종속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당내의 규율과 위에서 내린 결정의 성취 및 수행을 강조했습니다. 30년대 초에 스탈린은 마침내 모든 처벌권을, 특히 사형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지방이 이 결정에 대해 매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냅니다.



스탈린은 또 지역지도자들의 전문분야에서 저지른 부정행위나 실수들을 파악하려고 중앙에서 감시단들을 많이 파견하곤 했는데, 지역 당 지도자들이 대개 대처한 방식은 성실히 조사에 협조하는 것이 아니라 술 먹이고, 식사 접대하고, 뇌물 먹이고, 안 되면 위협까지도 했습니다. 스탈린은 이러한 사실들을 인지하고 중앙기율검사위원회(Central Control Commission)을 당기율검사위원회(Party Control Commission)으로 1934년에 재편을 하고,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통제를 더욱 더 늘렸습니다. 그러나 지역 지도자들의 힘은 이것으로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감찰관들이 지역당 지도부와 붙어먹어서 중앙에 되려 감시를 줄이자고 압력을 넣고, 비정기적 감찰타임을 지역 당지도부에 누설하면서 몸 사리라고 충고 해주고, 하여간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지역 당지도부와 거기에 붙어먹은 당기율검사위원회의 몇몇은 "지역 당조직의 사업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 결정의 수행을 보장하도록 협력하는 것"을 기율검사위의 목적으로 규정한 새로운 헌장을 보면서 참으로 좋아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탈린은 호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1935년 당기율검사위원회의 위원장이 바뀝니다. 라자르 카가노비치에서 바로 이 사람으로요. 아실 분들은 아시겠죠. 니콜라이 예조프입니다. 집단화와 산업화가 시작될 때 중앙당이 보내오던 정중한 톤의 명령과 권고들은 갑자기 온데 간데 없어지고 스탈린의 노기 넘치는 명령서들이 중앙으로부터 쇄도합니다. 주요 내용은 역시 "계획 수행이 개판이네? 혁명하기 참 편하지?"였습니다. 이걸 보고 스탈린한테 데꿀멍 했으면 살았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역 당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방향으로 대응한 것은 결과론이긴 하지만 크나큰 패착이었습니다. 물론 모스크바 중앙에서 내려주는 목표치가 너무 비현실적일 때도 있었습니다만은... 어쨌든 이들은 모스크바로 가는 정보의 흐름을 틀어쥐면서, 생산량 장부를 조작하는 것으로 대응합니다.



주작이 아주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걸 스탈린이 모를 리가 없죠. 1934년의 17차 공산당 당대회에서 스탈린이 이들 지역 지도자들을 "당의 명령이 자기들 보라고 쓴 게 아니라 바보들을 보라고 쓴 것으로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수다쟁이 봉건군주들"이라고 일컬었던 것은 스탈린이 이를 거의 다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스탈린은 이어서 1935년엔 반부패 캠페인을 군 단위에서 대대적으로 실시하였고, 1936년에는 마침내 군 단위의 당서기들조차도 중앙위원회에서 임명시키는 개혁을 단행합니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의 당에서 낸 출판들은 전부 "후견주의" "파벌" 등을 비판하는 말로 가득차 있었고, 내부 비판 억압 및 자아비판 부족 현상을 비판하는 캠페인이 당차원에서 실시되고 있었습니다. 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보여준 오냐오냐해주는 스탈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던 것을 바이노프는 눈치 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재밌는 건, 30년대 초까지의 오냐오냐 해주던 모습조차도 스탈린의 계획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미 30년대 초에 물밑에서는 제도적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출판과 이념, 결정적으로 경찰조직과 사법조직에서 모스크바로의 중앙집중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적당히 지역 당 지도부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오냐오냐가 아니라 타이밍 러쉬를 노리는 매의 눈을 부릅 뜨고 있었던 것이었죠. 오게 두어라. 굴라그가 굶주렸다.


1936년 중반부터 슬슬 지방에 모스크바로부터 이전에 오곤 했던 성과에 대한 불평과는 다른 불평불만이 하달되기 시작했습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경계하는 태도가 너무 느슨해졌다는 불만이 바로 그것이었고, 시범 케이스로 몇몇 재판들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스탈린의 대숙청, 예조프쉬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36년의 마지막 날, 스탈린은 엄청난 속도로 진행한 "의자 바꾸기 놀이"를 통해 지역 당의 지도부를 완전히 교란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이런 식입니다. I. M. 바레이키스는 스탈린그라드에서 극동으로, B. A. 세묘노프는 크림에서 스탈린그라드로, 극동의 L. I. 카르트벨리쉬빌리는 바레이키스가 도착하자마자 세묘노프의 빈자리를 채우러 크림으로 근무지가 바뀌었습니다. N. F. 기칼로는 벨라루스에서 하리코프로 보내지고 S. A. 쿠드랴프체프는 하리코프에서 우크라이나로 보내졌습니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를테면 쿠이븨셰프에서 서시베리아로 보내진 V. P. 슈브리코프의 빈자리를 채우게 P. P. 포스틔셰프를 키예프에서 불러왔습니다. 스탈린이 특히 모범적인 사례로 언급한 것은 아조프의 B. P. 셰볼다예프의 똘마니였던 M. M. 말리노프가 우선 체포된 다음에 스탈린은 쿠르스크의 I. U. 이바노프로 하여금 그 자리를 채우게 시키고 B. P. 셰볼다예프는 쿠르스크로 보낸 인사이동이었죠.


이런 갑작스러운 대규모 인사이동에 지역 지도부는 엄청나게 당황하였고, 당연히 이전에 했던 방식대로 그들의 패거리들을 같이 우루루 끌고가는 것은 생각조차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스탈린이 그렇게 무른 사람이 아니죠. 그냥 금지시킵니다. 기습공격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지역에서 왕노릇하던 왕초들은 그들의 수족을 전부 잃게 됩니다.


야로슬라블은 이런 셔플링을 운 좋게 피해갔거나 하여튼 직접적 타격은 먹지 않은 모양입니다. 1937년 1월, 프라브다 사설을 지역당 내에서 공유하지 않은 바이노프의 행동은 이런 정치적 배경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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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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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사산 | 작성시간 15.04.27 되게 재밌게 봤어요 이제 싸그리 날라갈 차례군요 ㅎㄷㄷ
  •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5.04.27 적백내전 이후 중앙 공산당의 행정장악력은 의외로 공백이 많았군요.

    지방당이 행정과 군사 치안등에 구멍이 생길까봐 섣불리 건드리기 어려운 호족 같은 위치일 정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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