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서양사

[종교논쟁에 대해]

작성자[총통]kweassa|작성시간09.08.15|조회수7,651 목록 댓글 84

미디어포커스 낚시 사건에 휘말려 격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또 다시 회원들 사이의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문제가 더 격해지기 전에 조치를 취할 필요성이 있기에 소위 종교문제에 대한 몇 가지 경고를 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경고하고 싶은 것은;

 

  • [현세적 집단으로서 지상에서 활동을 하는 종교인/종교단체가 보이는 현세적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
  • [종교를 믿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 비판]

 

이 두 가지 비판의 지점은 같은 선상에 있지 아니하며, 동일한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

 

전자는 '믿음'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사람들과 그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충돌의 과정에서 주로 발생하며, 현대사회의 공평성의 원칙에 있어 어느 특정한 종교를 우대하거나 하는 법 없이 서로 다른 것을 믿는 많은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윤리적 목표에 따라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지키고자 개인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도의적 의무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믿음이 개인의 차원에서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내재적 법칙으로 작용하는 한계를 벗어나, 공공의 영역에서 표현되는 행동방식으로서 그에 근거하여 (그 믿음을 공유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타인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침해하거나, 차별의 근거로서 작용할 때 그 종교인의 행동은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된다. 또, 현세적 집단으로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종교적 단체가 같은 신앙인들 사이의 정신적 유대와 화목함을 증진하는 것 이상으로 사회 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영향력이 정치적, 경제적 분야에 있어서 불공정한 편향성을 옹호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종교집단의 행동 또한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와 후자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현대사회의 자유와 평등은 강요와 압제에 의한 인신과 정신의 구속을 반대한다. 그것은 권위에 의해 오로지 하나의 종교를 믿어야만 했던 강제성의 시대로부터의 탈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종교의 자유는 보편적으로 오늘날 인정받는 당연한 권리 중의 하나이다. 믿음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것이며, 한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비판의 자유는 보다 상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유효하다.

 

풀어서 설명을 한다면, 이와 같은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의 이유로 인종들 사이를 차별하는 이념을 믿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자.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근거로 유색인종의 존재 그 자체를 비판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그의 인종차별적 비판을 '비판의 자유'로써 인정해야 하는가?

 

결과적으로, 그러한 종류의 비판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개인의 마음 속에서 어떠한 믿음을 갖고 있는가는 (아무리 그릇된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어느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반면, 현대사회의 평등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위배하는 비판적 발언은, 비판의 자유를 보장하기 이전에 타인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영역까지 침범했기에 허용할 수 없다.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은 종교인들에게도 물론 적용된다. 특정한 종교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는 그 사실 자체는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며, 하나의 신념체계로써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는 중요한 정신적 기재로써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상관할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적 믿음이 실질적으로 평등의 정신을 침해하는, 종교와 믿음에 근거한 타인에 대한 차별 및 악의의 발언으로 이어졌을 때 비로서 그것은 저지의 대상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저지가 아니라, 그 믿음에 근거한 행위를 저지하는 것에 속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 기본원칙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어떠한 믿음에 근거한 행동이 실질적으로 현대사회의 중요한원칙을 위협하고 있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 그것을 비판할 자유는 있어도, 그러한 행위의 책임을 그 종교 자체에 전가하여 특정 종교 및 그 종교를 믿는 행위, 그리고 그 믿음을 유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할 자유는 없다. 왜냐하면, 같은 종류의 믿음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행위를 보이지 않는 사람들 역시 명명백백히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논증을 통해 '믿음' 그 자체가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 째로 경고하고 싶은 것은, 이성중심주의(logocentricism)에 대한 것이다.

 

이성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다.

 

어느 시대의 어느 지역의 어느 문화권이던간에, 살아가는 인간의 가치체계 및 판단능력을 좌우하는 '이성'이라는 기준은 상대적으로 변화해간다. 이성은 개념적 사유의 능력이며, 사유의 기준이 되는 개념은 시대에 거쳐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절대적 가치기준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미신'에 상반되는 쯤의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애초에 '미신'이니 '종교'니 하는 종류의 것들이 세상의 근본원칙으로써 인간존재를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시대에는 그 자체가 이미 '이성'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이치에 맞다'라는 '합리 合理' 는, 애초에 그 '이치'가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흔히, '종교'에 대비되는 '이성적 사고방식'을 언급할 때 몇몇 사람들은 '비이성적인 종교적 사고방식'이 부른 재난이나 해악을 거론한다. 그러나, '이성'이 저지른 대표적인 끔찍한 죄악에 "마지막 해결책 Die Endlösung " 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이게 뭔 소린지 모르겠다면 아무 검색포털에나 가서 '아우슈비츠'와 '이성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 를 검색해서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이성중심주의를 신봉했던 많은 철학자들을 오래도록 고뇌에 빠뜨린 유대인 대학살의 고뇌로 부터 절대적 모더니즘이 일으킨 비극을 반성하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아가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니까.

 

따라서,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하고 그 한계를 숙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성'을 절대적 우위를 지닌 가치로써 '믿음'의 우위에 두는 사고방식은, 역설적으로 그 '이성'의 신봉자가 스스로 비판을 하고자 한다는 절대주의적 종교적 사고방식이자 '맹신적 믿음'의 일종이다.

 

오늘날, '이성적 사고방식'이 '종교적 사고방식'의 우위에 있다는 우리들의 이 '믿음'은, 우리가 신봉하는 이성의 결과로 탄생한 근대-현대 사회의 자유주의, 평등주의, 그리고 인간중심주의가 구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단일종교에 의한) 정신적 압제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그것은 어떠한 무형적 제도나 가치체계가 실질적으로 인신과 정신을 구속하고 억누르는 것을 반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러한 억압을 물리치고 만인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사람들이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오늘날 세상의 새로운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성 또한 근본적으로는 믿음의 체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 도그마에 도취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겸허한 마음으로 이성의 한계를 항상 예의주시하지 않는 한 '이성' 또한 허울 좋은 도그마의 일종으로 전락할 뿐이다.  

 

 

 ...

 

따라서, 위의 두 가지 경고를 기초로 한 결론을 내리며 이 글을 마무리 짓겠다. 앞으로, 앞서 언급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글들은 허용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고 생각되는 글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 이 결정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으며, 엄격하게 집핼할 것이다.

 

  • 특정종교에 그 자체의 존재 자체를 공격하는 비판은 허용하지 않는다.
  • 종교과 종교단체행동의 결과, 믿음과 불신의 경계선상과는 무관한 지점에서 벌어진 사회적인 문제로써 바라볼 수 있는 영역에 대한 비판은 허용한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특정종교 옹호니 뭐니라고 생각을 한다면, 억울하면 짱 먹어라.

 

 

(ps)

 

나도 개인적으로는 개신교에 유감이 많은 사람이며 무신론자이다.

 

그러나, 내 무신론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믿음이 종교적 질서보다 우위에 있다는 내 개인의 믿음의 결과이며, 내가 신봉하는 자유는 '믿음의 자유' 또한 인정하고 있음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동조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지닌 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직접적으로 내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은 나도 그의 존재를 용납하고 인정할 것이다. 또, 가끔 그러한 침해행위가 있을지라도(선교나 포교가 들어온다던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함에 있어서, 어찌되었던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는 그들의 열의와 성의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최소한 웃으면서 완곡하게 거절하는 정도의 성의를 보일만한 아량 또한 지니고 있다. 이런 것은 종교를 믿냐 안믿냐의 차원을 떠나, 사람사는 세상에서 예의라는 아주 기초적인 덕목에 속하니까.

 

그러나 또한, 나는 불가지론자이기도 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물리적 세상의 영역에서 종교적 신념이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완고하게 믿으면서도, 동시에 인지의 한계를 넘어선 차원에서 무엇인가 보다 커다란 존재가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판단을 유보한다. 따라서, 내 무신론은 내가 지금 살아 숨쉬는 물리적 영역을 한계로 두고 있을 뿐이다. 나는 자연현상에 신이 개입해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며, 과학적 법칙에 신이 개입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며, 인간사에 신이 개입한다는 생각 또한 거부한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죽음의 너머에 내 인격이 그대로 유지된 상태로 어떤 불사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부터 이 물리적 세상과 우주에 어떠한 다른 힘이 작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남겨두고 있다.

 

우주가 빅뱅으로부터 창조되었음을 안다고 해서, 그것에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또, 나는 비이성적인 믿음에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이성만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처럼 허황된 말은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특히 죽음이라는 공포에 직면하여 그것이 끝이 아님을 소박하게 믿음으로써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희망과 위안을 제공한다. 맑스 선생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으나, 현대 의학에서 근본적으로 마약으로 정의할 수 있는 약물들을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충분히 많다.

 

그러한 소박한 필요조차 부정하는 것은 '이성'을 논하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배려' 자체가 부족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사견에 불과하지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라미드우프닉스 | 작성시간 11.11.07 개념글 잘 읽고 갑니다. ^^
  • 작성자롤코타지존 | 작성시간 11.12.10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작성자춘자 | 작성시간 12.01.27 과거에 DC화 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댓글이 여기저기 보이는구낭...
  • 작성자퇴계지부 | 작성시간 12.06.29 총통각하만이 토탈워카페의 절대정신입니다.
  • 작성자빈대75 | 작성시간 15.10.19 또 예수쟁이들이 떨들고 갔나??
    지옥간다고?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