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책 게시판

[후기]난중일기 유적편 (이순신 저, 노승석 옮김, 2019)

작성자Red eye|작성시간23.01.21|조회수144 목록 댓글 4

 

 

 

1. 조선의 관직 및 군사 시스템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고 생각보다 촘촘했으며 근대적이었다. 또한 장군께서 일기를 쓰시면서 그날의 날씨와 기후를 거의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여 당시 기후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는 말을 들었다. 

 

2. 이  일기를 통해 당시 이순신의 조선 수군만큼은 보급, 전선, 훈련, 화포제작 등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고 전투력은 왜인들에 비해 훨씬 월등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592년~1593년까지 이순신 장군은 안정된 모습과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실질적으로 조선의 남해안 지역을 군사적으로나 지방행정관으로서 관리함으로서 조정에 보내야 할 보고서 작성도 산더미였고 피난 온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보급과 둔전관리도 하면서 각종 전쟁까지 수행하고 있어서 몸이 많이 지쳐 보였다. 밤에 주로 식은땀을 흘렸고, 두통, 소화기 문제는 늘 달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천해전에서의 1차 총상과 남부지역의 습도와 더위, 겨울바다와 해풍은 그를 신체적으로 많이 괴롭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 이순신 장군 외 여러 군관들, 관리들, 가족들, 친척들, 관련인들의 이름을 볼 수 있었고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 외 여러 명나라 군관들의 이름들도 볼 수 있었다.

 

4. 1597년 일기는 정말 보기 힘들었다. 한양압송, 한양 상경 중 배안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변씨, 셋째 아들 이면의 죽음, 2차 백의종군 등  몸과 정신이 많이 무너져 보였다. 특히 정유년의 일기는 2권으로 기록하셨고 '명량해전' 전후 기록들이 매우 세세하다. 선조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자 즉각 배설 장군이 남긴 12척을 인수받고 남부를 순시하며 군사와 보급품을 다시 모으는 과정은 따로 영화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5. 군법은 지엄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아랫사람이 친하든 아니든 간에 잘못을 하거나 약속한 날에 들어오지 않거나 보급이 지체되면 여지없이 곤장을 친다. 단위도 2자리수 일 때가 보통이었다. 군무이탈과 공적 물건을 훔치면 처형이었다. 무섭다. (1597년 명량해전에서 배가 12척이고무척  곤궁한 상황이었기에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함은 목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전쟁 와중에 군관들의 휴가를 보낼지 말지 관리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6.조선 유교 시스템이 낳은 최고의 사람이었고 원칙주의자였다. 매월 망궐례 (한양을 향해 임금에게 절을 올리는 것)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조선 임금들이나 왕비들의 제사와 집안 사람들의 제사가 있으면 그 날은 공무를 보지 않는 날이다. 먼저 돌아가신 부모와 2명의 형들, 죽은 아들(이면)을 생각하는 글을 보면 가족을 사랑하는 진심이 엿보인다.  또한 그는 먼저 세상을 뜬 형들의 자식들을 모른체 하지 않고 숙부로서 그들을 보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유년인 1597년 한양에 압송되어 의금부에 풀려 난 4월 이후 망궐례를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7.전라도에서 경상남도까지, 남해안은 이순신 장군이 거의 거쳐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남해안의 유적지들과 전장터를 가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8. 일기를 읽으면서 임진년과 정유년의 전쟁에 대한 지식이 참 많이 부족했구나 다시한번 느꼈고 그분의 성품과 마음속 생각을 훔쳐보는 재미가 있었다. 

 

9.일기 중간에 상황을 모르는 전개나 단어, 인물, 사건, 이름, 지명 등이 나오면 옮긴 이가 주석을 달아 설명을 해주거나 답사한 전장터의 위치나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도의 표시 부족과 사진이 좀 작은 것은 아쉽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느낀 것은 이순신 이라는 사람은 공적인 마인드가 매우 출중하고 원칙주의자였으며 숫자와 정보에 민감하며 지형을 꽤 뚫고 바다 위에서 병법을 펼친 탁월한 군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칙주의자이긴 했으나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을 대우하고 관리? 하는 것을 보며 다른 방법을 구하는 유연성도 보여주었습니다. 밀당을 하는 것이 한 국가의 작은 실리적인 외교를 구사하는 것 같았어요. 또한 일하는 날과 쉬는 날이 구분되고 일기를 쓰고 시간과 날씨를 기록하며 군사, 훈련, 제조, 둔전, 세금, 부하관리 등을 보며 매우 근대적인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1598년 무술년,  그 분의 마지막 일기입니다. 

 

 

 

1598년 11월 17일 (음력)

 

어제 복병장 발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선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 올 때 한산도 앞 바다까지 쫒아갔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60149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211454359 

http://m.yes24.com/Goods/Detail/80119720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Red ey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1.21 마지막 일기가 1598년 11월 17일(음력)이고 이후 18일 밤부터 19일 새벽까지 '노량해전'이 전개됩니다. 고니시의 구원요청으로 달려온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남해의 소 요시토시, 부산의 다치바나 등과 조명수군연합군이 궁극의 추격전을 벌이게 되고 여기서 이순신, 이영남, 이언량, 등자룡 등이 전사하게 됩니다. 그렇게 7년전쟁이 막을 내리네요.
  • 작성자多爾袞 | 작성시간 23.01.21 저런 작은 성곽과 문루? 가지고싶네요.
  • 답댓글 작성자Red ey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1.21 낙안읍성 입니다. 고려말의 혼란을 틈타 낙안으로 와쿠들이 들락날락거려서 조선초부터 쌓은 성인데 지금은 복원시켜놓은 것이라고 알고 있어요.
  • 답댓글 작성자多爾袞 | 작성시간 23.01.21 Red eye 예전에 수원화성을 작게 지어서 안에 경복궁 작게 지어 살고싶다고 드립친ㅋㅋ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