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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2: Forum

모리가문기-10장 서부의 무적자

작성자제국의명장|작성시간12.02.02|조회수225 목록 댓글 1

 

 

 

 

 

 

 

 

 

 

1564년 초여름, 구치바 우지무네가 지휘하는 모리군 400여명은

 

나가토국 거성 하기성을 포위하다가 하기성의 잇키(반란군)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잇키의 수는 1300여명에 달했고 구치바 우지무네가 기다리는 다카가게님의 군대는

 

하기성에서 3일 떨어진 지점에 있었습니다.

 

구치바 우지무네는 전투 전에 휘하 지휘장들을 물어 전투계획에 대해 의논하니

 

부하들이 말하기를

 

"잇키는 우리의 3배가 넘고

 

아군의 지원군은 우리를 도울 수 없으니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당당하게 적과 맞서싸우다가

 

패하기라도 한다면 모리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될 것이요,

 

또한 훗날의 모리가문의 간성이 될 병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적에 비해 열세이니

 

설사 우리가 포위를 풀고 적을 피해 물러나더라도 비겁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적보다 열세한 전력을 온전히 보존했다고 하여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우지무네가 대답하기를

"적이 성을 나와서 우리를 대적한다는 것은 대개 2가지 경우에 발생하는 일이니

 

하나는 적의 형편이 대단히 곤궁하여 성벽에 의지하여 버티는 것이

 

차라리 나와서 싸우니만 못할 때이고

 

또 하나는 적의 형세가 대단히 무성하여 성벽을 의지하지 않고 나가 싸워도

 

이길만 하다고 여길 때이다.

 

지금 적에게 두가지 상황이 모두 적용되니

 

성을 나와 우리와 싸움으로서 곤궁함을 극복하고자 하고

 

우리보다 우세한 군세를 동원함으로서 싸워 이길만하다는 생각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퇴각하게 된다면

 

적은 두가지 상황을 모두 극복하게 되어 사기충천할 것이고

 

또한 우리가 적에게 타격을 주지 않고 물러난다면

 

다카가게님의 나가토국 공략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어쩌면 적은 다카가게님의 군대도 요격하여 모리군을 각개격파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기서 싸우다 지는 것보다 더욱 더 큰 치욕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전투에서 패하여 전몰할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감수하자.

 

우리가 여기서 패하더라도 여기서 한명의 잇키를 더 죽인다면

 

우리는 압도적인 적과 싸우다 진 것이기에 비난도 적을 것이요,

 

모리 가문에 미치는 피해도 우리의 적은 수만큼 적을 것이다.

 

그리고 다카가게님의 군대가 우리의 복수를 해줄 것이다."

 

라고 하고 맞서싸우기로 하였습니다.

 

 

우지무네는 자신의 병력을 3개부대로 나누어 전,중,후군으로 나누고

 

전군에 카타나(칼)로 무장한 아시가루들을 배치하고

 

중군에 승병들을 배치하고

 

후군에 우지무네가 직접 지휘하는 하타모토들과 본진을 설치하였습니다.

 

한편 잇키 수괴 사카키바라 스케노리는 우세한 잇키들을 데리고 쳐들어왔는데

 

모리군이 퇴각하지 않고 맞서싸우려고하자

 

부대를 좌,중,우 3군으로 나누어 모리군을 향해 나아가게 하니

 

중군이 모리군을 대적하는 동안 좌군과 우군이 양익에서 모리군을 협격하여

 

전멸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모리군은 고지에서 잇키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다가

 

잇키의 중군이 고지 밑으로 쇄도하자 전군과 중군을 돌격케하여 밀어붙였습니다.

 

그동안 잇키의 좌군과 우군이 모리군의 양익을 감싸기 시작했지만

 

모리군은 흔들리지 않고 잇키의 중군을 잘 상대했습니다.

 

그동안 모리군을 후방지휘하던 우지무네와 그의 하타모토들이

 

전장의 측면으로 달려나갔습니다.

 

모리군의 우익에서 우지무네의 하타모토들을 발견한 잇키들은

 

창진으로 기병돌격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창진이 진로를 가로막기전에 하타모토들은 우익을 통과하고 잇키 중군의 배후로 기동하여

 

후방에서 지원사격하고 있던 잇키 궁수부대를 습격하였습니다.

 

 

후방돌격에 잇키 궁수들은 큰 피해를 입어 화살과 활을 버리고 흩어져 달아나자

 

하타모토들은 즉시 대형을 재정비하고 잇키 중군의 배후를 쳤습니다.

 

그리고 잇키 중군과 좌,우익의 압박을 견뎌내던 모리군의 승병들이 괴성을 지르며

 

나기나타를 휘둘러대자 잇키들은 혼란과 두려움에 사로잡여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스케노리는 중군을 직접 지휘하며 모리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중군의 배후가 무너지고 후방에서 돌격을 받아서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겁을 먹고 달아나기 시작하자

 

직접 도망병을 참수하며 모리군과 맞서싸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지무네의 하타모토가 칼로 스케노리를 베어버리니

 

이에 창으로 무장한 잇키들이 주위에서 몰려들어 스케노리를 보호하고

 

그를 성으로 옮겼으나 지휘자를 잃은 잇키 중군이 무너지고

 

그와 동시에 좌,우익의 잇키들도 성으로 달아나니

 

우지무네의 군대는 힘이 다할때까지 잇키들을 쫓아

 

성문 근처까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수급 1000여급을 얻었습니다.

 

반면 우지무네군의 사상자는 100여명에 불과 했습니다.

 

 

우지무네는 전투에서 얻은 잇키들의 수급을 모두 소금에 절여서 보관했다가

 

며칠 후 다카가게님의 군대가 하기성에 이르자 전령을 보내 보고하고 수급들을 바치니

 

이에 다카가게님은 우지무네를 칭찬하고

 

수급들의 귀들을 따로 잘라서 보고서와 함께 모토나리님께 보냈습니다.

 

 

그 후 다카가게님은 하기성을 포위하고 공성하려고 하였는데

 

공성군의 지휘를 우지무네에게 맡기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우지무네가 과분한 일이라며 사양하였으나

 

이에 다카가게님이 말씀하시길

 

"자네는 3배나 되는 적을 상대하여 10배의 타격을 가했으니

 

자네의 배짱과 지혜라면 능히 공성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도 승리한다면 그대는 하기성의 성주가 될지도 모르니

 

그대의 공명이 달린 일이다.

 

아무쪼록 잘 생각하길 바란다."

 

라고 하자 우지무네는 감사를 표하며 공성군을 지휘하여 성을 공격하니

 

부상당한 스케노리가 얼마안되는 병사들을 데리고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고

 

잇키들은 전멸당했습니다.

 

나가토국의 전투와 점령을 보고 받은 모토나리님은

 

다카가게님의 예상대로 우지무네를 하기성의 성주로 삼았습니다.

 

 

모리 가문의 나가토국 공략이 진행되는 동안,

 

큐슈의 전쟁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큐슈를 통일하여 한때 큐슈를 거의 지배했던 이토 가문은

 

1563년 겨울부터 시작된 큐슈 남부의 잇키로 인해 2국을 상실하고

 

휴우가국만 이토 가문의 지배력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토가문의 주력군 4500여명은 건재하였고

 

명장 츠게모리와 이토 가문 당주 이토 스케타카님은

 

500여명의 병력을 휴유가국에 배치하고

 

나머지 주력군을 큐슈 남부로 이동시켜 잇키를 진압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모토나리님은 이토 가문을 멸문시킬 적기라고 판단하고

 

모든 정보원과 대대적인 자금을 투입하여 휴우가국에 공작을 벌였고

 

승려 유키아리가 이토 가문의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는 무사들과

 

불만을 품은 불교도들에게 봉기를 부추겼습니다.

 

여기에 모리가문은 큐슈 남부 잇키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보증하는 서신을 보내고

 

직접적으로 자금을 대주자 1564년 초여름, 휴우가국에서도 잇키가 발생했습니다.

 

 

한편 스케타카님과 츠게모리의 이토군은 큐슈 남부로 가는 길에

 

이토군에 고할 것이 있다고 말하는 어느 상인을 만나 서신을 받으니

 

그 서신 내용에는 모리 가문이 휴우가국의 반란을 지원하고 있다는 고발과

 

모리 가문이 잇키들에게 준 서신이 있었습니다.

 

이에 츠게모리가 말하길

 

"그동안 우리 이토 가문은 모리가문의 간사한 큐슈 진출에도 참아왔지만

 

이제 저들이 이렇게 본색을 들어내어 싸울 명분이 생겼으니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큐슈 남부의 잇키들은 서로의 지배지역만을 지키며 진출하지 않으니

 

일단 저들을 내버려두시고 휴우가국으로 돌아가셔서 군대를 모아

 

모리에게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으셔야 합니다."

 

라고 하니 이에 스케타카님도 동의하여 병력을 되돌려 휴우가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중도에 휴우가국에서 전령이 와서 보고하기를

 

"도노! 지금 휴우가국에서 봉기한 잇키 2000여명과 잇키와 손잡은 모리군 3000여명이

 

연합하여 휴우가국을 공격하여 아군이 궤멸되고 거성은 함락직전 이옵니다!"

 

라고 하니 이에 츠게모리가 말하길

 

"도노, 지금 우리의 군세라면 적과 결전을 치뤄볼만 하옵니다.

 

이곳은 이토 가문의 본거지오니 가문에 충성하는 자들또한 많사옵니다.

 

그리고 도노께서 지휘하시는 군대는 전국 어느 가문의 군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강군이오니 계속 진공하시어 전투에 지쳐 있는 적을 친다면

 

결코 불리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라고 하였으나 스케타카님이 말씀하시길

 

"전령이 올때 성이 함락직전 이었다면

 

우리가 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성이 이미 함락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열세인 우리가 공성하고 우세인 적이 수성을 하니 불리하다.

 

더군다나 싸웠다가 패배라도 당한다면 우리는 재기하지 못한다.

 

차라리 저들보다 수도 적고 오합지졸인 큐슈 남부의 잇키들을 섬멸하고

 

그곳을 기점으로 권토중래(힘을 길러 다시 쳐들어감)하는 것이 옳으리라."

 

라고 하고 만류하는 츠게모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병력을 다시 되돌려

 

큐슈 남부로 신속히 이동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휴우가국 남부 국경지대에 이르러

 

일단의 피난민들이 이토군에게 말하길

 

"지금 큐슈 남부에서 이토군과 맞서 싸우겠다고 2국의 군대가 휴우가국에 와서

 

휴우가국의 잇키들과 연합하여 이토군을 몰살시킨대요.

 

잇키들이 지나다니며 카톨릭을 믿는자들은 족족 잡아 죽이니

 

우리는 그게 싫어서 잇키들이 모이기 전에 큐슈 북부로 달아나려고 합니다."

 

라고 하자 이에 스케타카님이 말하길

 

"2국의 군대가 한꺼번에 휴우가국으로 온다고 하니

 

우리가 휴유가국 남부의 산림지대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그놈들을 쳐서 다죽이고

 

그 다음에 합류하려는 휴우가국 잇키들도 섬멸한다면 각개격파가 아니겠는가?"

 

라고 하고 츠게모리와 군대를 나누어 산림지역에 매복하였습니다.

 

 

하지만 큐슈 남부의 잇키들은 휴우가국으로 오지 않았고

 

휴우가국에서도 잇키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계속되는 강행군과 보급 단절로 굶주린 군대에는 탈영병이 속출했고

 

사무라이들도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이토 가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동안 휴우가국이 잇키들에게 장악되자

 

휴우가국에서 이토군에게 진짜 정보와 역정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이토군을 무력화시킨

 

모리 가문의 닌자 모로카네는 서신을 써서 붕괴직전의 이토군에 보냈습니다.

 

"이토 가문의 병사들은 들으라.

 

너희는 용맹한 무사이기 이전에 큐슈에 식솔과 재산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허나 이제 이토 가문의 영지는 모두 더 이상 이토 가문의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이토 가문의 소속된 무사라는 이유로

 

기약없는 미래에 굶주림과 추위와 불안을 참아가며 버티고 있다.

 

이토 가문의 졸개라는 이유로 식솔과 재산,심지어 그대들의 목숨까지도 잃게 생겼다.

 

그대들은 지금 이토 가문이 남기고간 이토의 식솔들이 어찌 되었는지 아는가?

 

자식들은 모두 참수되어 조리 돌려졌고

 

여식들과 아내들은 자진하거나 유곽의 창기로 팔렸다!

 

이토 가문의 막대한 재산은 잇키에 의해 영민들에게 분배되어 더 이상 걱정없이 살고 있다.

 

그대들은 언제까지 운이 다된 가문을 위해 충성할 것인가?

 

그대들의 식솔이 죽거나 흩어지고 재산을 도둑질 당하는 것을 언제까지 감수할 것인가?

 

그대들의 운수와 공명은 그대들이 스스로 도모해야 할 것이다!"

 

이에 얼마안되는 이토군은 완전히 분해되었고

 

스케타카님은 울분이 심해져 광인이 되었다가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화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때 큐슈 제일의 명장이라 불렸던 츠게모리는 행방을 감추고 사라졌습니다.

 

 

1564년 늦가을, 큐슈의 이토 가문은 멸문 되었습니다.

 

 

큐슈의 이토 가문이 멸문됨으로서

 

이제 큐슈에는 더이상 모리 가문을 긴장시킬만한 세력이 없었습니다.

 

비록 큐슈 남부 3국은 잇키들이 장악했지만 잇키들은 느슨한 연합군으로서

 

각국의 수령들이 통치하며 어설프게 다이묘 흉내를 내고 있었으며

 

모리 가문과 밀약을 맺어 큐슈에서 공생하고 있었습니다.

 

혼슈에는 오우치 가문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모리 가문의 동맹인데다가

 

영지도 1국에 불과하여 모리 가문의 걱정이 되진 못했습니다.

 

통일된 시코쿠는 쵸소카베 가문이 5국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내치를 닦고 있었고 모리 가문과 사돈 관계 였습니다.

 

 

 

그래서 1564년 이후부터 일본사람들은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모토나리님을 일본 서부의 무적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무적자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는 움직임이 없지 않았으니

 

모리가문이 큐슈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모토나리님은 불교를 이용하여 이토 가문을 밀어냈지만

 

이토 가문이 사라진 이후에는 큐슈에서 핍박받게 된 카톨릭 세력이

 

모리 가문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1565년 봄, 분고국의 카톨릭 신자들이 모리 가문의 불교정책에 저항하여

 

잇키를 일으켰습니다.

 

 

분고국에서 일어난 카톨릭 세력은 기존의 잇키들과 달리

 

옛 오토모나 이토 가문 출신의 무사출신 카톨릭 교도들이 숨겨둔 무기와

 

십시일반으로 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거병하여 병력의 질과 무장이 비교적 훌륭하였습니다.

 

 

하지만 분고국에는 3000여명에 달하는 모리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그들을 당주 모토나리님과 가독 다카모토님,

 

그리고 가로중 하나인 후쿠바라 다메미츠가 지휘하였습니다.

 

 

모리군은 분고국 거성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에서 잇키들을 기다렸고

 

잇키들은 신앙을 바탕으로 망설임없이 모리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모리군은 강을 낀 도로의 고지들을 장악하여

 

잇키들의 진격로를 봉쇄하고 잇키들의 공격을 기다렸습니다.

 

이에 잇키들은 기도문을 외우며 전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정거리 안에 이르자 모리군 궁수들이 화살로서 맞이 하였습니다.

 

 

그동안 모리군 우익으로 반란군 기병들이 돌격하여

 

모리군 본진을 우회공격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공격은 양익에 배치된 모리군 창병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기병들은 접전끝에 패퇴당했습니다.

 

 

그동안 중앙에서는 고지를 빼앗으려는 잇키들과

 

그들을 막는 모리군의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잇키들은 모리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병들이 투입된 우익에

 

보병 전력을 추가로 투입하였지만

 

기병이 패퇴당하거나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투입된 보병들은

 

모리군 창진과 화살세례에 격파당했습니다.

 

 

우익의 공세를 모조리 격퇴한 모리군은 양익에 배치된 병력들을

 

반란군의 양익으로 이동시켰고

 

포위되는 것을 감지한 반란군은 퇴각하였습니다.

 

이에 하타모토들과 기병들이 출격하여 배후와 측면에서 공격하고

 

보병들이 끝까지 추격하여

 

반란 수괴 가타쿠라 도마마사를 참살하고 수급 1700여급을 베고

 

카톨릭 잇키들을 섬멸하였습니다.

 

 

1565년 여름, 오우치의 빗츄국에 배치된 모리 가문의 정보원이

 

잇키국에 급하게 보고하기를

 

오우치 가문이 대부분의 병력을 배에 싣고 동쪽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빗츄국을 지키는 병력은 별로 없으며

 

백성들은 다이묘와 무사들이 없는 상태에서

 

가톨릭 정책과 징발을 일삼는 오우치 가문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모토나리님은 잇키국의 승려 요키나요를 파견하여 잇키 공작을 수행케하고

 

미마사카국에 주둔하고 있던 모토하루님에게 군대를 데리고 비젠국으로 이동케하여

 

빗츄국이 잇키들에게 장악되면 신속히 빗츄국을 평정하라고 하였습니다.

 

 

1565년 늦여름, 빗츄국에서 불교도들이 봉기하여 빗츄국 거성을 포위하였습니다.

 

 

1565년 가을, 빗츄국의 잇키들이 빗츄국의 오우치 수성군을 전멸시키고

 

거성을 장악했으며

 

오우치 가문의 식솔들을 조리돌린 후

 

남자들은 거세한 후에 참수시키거나 십자가형에 처했으며

 

미쳐 자진하지 못하고 살아남은 여자들은

 

유곽 창기로 팔아버리거나 윤간 후 수장시켰습니다.

 

 

한편 오우치 주력군은 함대를 타고 야마토국을 향해 항진하던중

 

빗츄국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에 얼마지나지 않아 보급이 끊어져 굶게 되자

 

오우치 가문에 비젼이 없다고 여긴 병사들은

 

마음대로 육지에 배를 정박하고 흩어져 달아났으며

 

일부 병력은 와코(왜구)가 되었습니다.

 

그 와코가 된 일부 병력 중에는 오우치 당주와 주요 지휘관들이

 

탑승한 기함의 병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아마노 요리아리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오우치 당주를 살해하여 시체를 바다에 수장시키고

 

주요 지휘관들을 협박하여 반항하는 자는 참살하고

 

따르는 자들은 노잡이로 삼아 부려먹었습니다.

 

 

이로써 모리 가문의 동맹이었던 오우치 가문이 멸문하니

 

이 소식을 들은 모토나리님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한때 쥬코쿠의 세력가이자 소교토(스오국의 야마구치 지역은

 

한때 교역과 문화가 번성하여 작은 교토로 불림)로 번성하던 오우치 가문이

 

그렇게 멸문하다니!

 

비록 그들이 아소교(가톨릭)에 빠지고 무리한 징수로 민심을 잃었다고 하나

 

저 유서깊은 가문이 저렇게 멸문되어야 했었단 말인가?"

 

천하의 공명도 위업도 결국은 저렇게 부질없이 되고 결국에는 사라지는 것인가?

 

지금 번영을 누리는 우리 가문도 언젠가 저렇게 될까 두렵구나."

 

라고 하자 다카모토님이 말하길

 

"아버님, 제 소견으로는 치세이든 난세이든간에

 

당대를 살아가는 자들은 그 시대를 책임져야한다고 보옵니다.

 

지금 같이 난세를 살고 있는 자들은 난세의 책임을 맡아 치세로 시대를 이끌어야 하고

 

치세에서 사는 자들은 치세의 책임을 맡아 그 시대를 이어나가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한 책임은 그 시대를 사는 자들의 몫이라고 보옵니다.

 

아버님께선 쥬코쿠와 큐슈를 평정하여 전쟁을 없애시고

 

산업을 진흥하고 문화를 부흥케 하셨습니다.

 

이는 난세를 치세로 이끈 위업이고 뒤를 이을자들에게 큰 흥복이옵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가신들은 모리 가문의 광영을 자손만대에 이어지게 하기 위해

 

책임을 다할 것이오니 아버님께선 염려하지 마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1565년 가을, 수확이 시작되고 각 영지의 진상품이 아키국으로 배달될 무렵에

 

옛 오우치군에서 와코(왜구)가 된 자들이

 

수십척의 배를 타고 도쿠야마항을 침략하여

 

뱃길을 끊고 약탈을 일삼으니 이로인해 무역수입이 급감하여

 

55만석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에 모토나리님은 구치바 모치자네에게 60여척의 전선을 이끌고

 

도쿠야마항을 공격한 와코들을 공격케 하였습니다.

 

이에 와코의 수괴 아마노 요리아리가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맞서싸웠습니다.

 

 

모치자네는 와코들이 등선육박전을 감행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유미 코바야로 불화살을 쏘아대고 호로쿠 코바야로 접근하는 적선에 화락과 폭약을 던지니

 

와코의 전위함대가 불에 휩싸여 와코의 앞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와코의 뒤에는 항구만 있었기에 퇴로가 없어서

 

와코들은 자살에 가까운 공격을 계속하였습니다.

 

이에 모리 수군은 세키부네들을 투입하여 맞서싸우니

 

와코는 큰 타격을 입고 항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모토나리님께 섬멸의 명을 받은 모치자네는

 

항복을 받지 않고 화락과 폭약을 계속 던지게하여

 

와코들을 완전히 소각시키니 수괴 요리아리는 타죽기 전에 할복하고

 

나머지 부하들도 타죽거나 아니면 바다에 빠져죽었습니다.

 

1565년 겨울, 조선 조정이 1510년 삼포왜란이후

 

50여년간 일본과의 사무역을 크게 제한하니

 

이에 불만을 품은 쓰시마의 일부 상인들과 조선 동래의 머물던 낭인들이 결탁하여

 

난리를 일으키니 이를 조선인들은 을축왜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와코의 해상전력도 이용하여 조선의 경상도 해안가에서 분탕질을 하다가

 

조선군에게 소탕당했고 조선 조정은 이에 대한 항의 사신을 쓰시마섬에 파견하니

 

모리 가문의 가신이었던 쓰시마 도주는 모리 가문에 조선 사신을 보내어

 

협상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모토나리님은 다카모토님으로 하여금 협상을 맡게 하였으니

 

이에 다카모토님은 조선조정에 왜변으로 인해 피해입힌 것에 사죄하고

 

왜구 단속과 배상금 지불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조선국의 무역 제한으로 말미암아

 

일본 상인들이 큰 피해를 입어 난이 일어나게 됐음을 밝히고

 

무역제한을 해제해줄 것을 요청하니

 

조선 사신측에서 조선 조정에서 논의할 문제라 하여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카모토님이 모토나리님께 말하길

 

"조선과의 무역을 재개하려면 아무래도 조선 조정에 사신을 파견해야 할 것이옵니다.

 

마침 배상금 문제와 사죄를 해야할 일이 있사오니 쓰시마 도주를 보내시어

 

사죄와 배상,무역 재개를 도모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라고 하여 돌아가는 조선 사신과 함께 사신단을 보내니

 

조선 조정은 모리 가문이 왜구를 단속해주는 조건으로

 

해마다 세견선 10여척에 일본인 300여명이 조선 동래에 거류할 수 있게하였고

 

사무역 제한을 완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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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월하백랑 | 작성시간 15.09.07 원작소설을 읽는 느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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