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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큐터] 전쟁론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소련군 방어 전술-2

작성자이제큐터|작성시간12.03.03|조회수1,017 목록 댓글 2

 

1943년 여름에 소련군의 전술적 방어는 개별적이고 접점이 없는 환경에서 밀도 있고 여러 곂의 깊은 참호선들로 발전하여 보병들에게 더 좋은 방호를 제공했고 더 확실한 기동과 화력 지원을 전선과 방어 중심에 제공했다. 너무 넓은 방어 정면은 축소되었고 방어 종심은 늘어났다. 1개 소총병 군단은 일반적으로 2개 소총병 사단을 전방에, 1개 소총병 사단을 후방에 두었다. 소총병 사단들은 연대를 1~2개 제대로 구성했고 연대들은 대대들을 2개 제대로 구성해 포병 집단, 대전차 화점과 진지 포병, 대전차포 예비대와 기동 차단대의 지원을 받게 했다. 소총병 사단의 제1 제대는 평균적으로 전선에서 8~15 Km를 정면으로 두고 5~6Km의 종심을 가졌다. 제2 제대는 20~25Km의 정면을 두었다.1

 

 

 

대전차 방어는 전 종심에 걸친 대전차 화점의 통합 지휘로 발전되었다. 소총병 사단에 소속된 독립 전차 여단, 전차 연대, 자주포 연대는 제1 제파의 소총병 연대에 증강되거나 역공에 동원되었다. 방어는 소총병과 지원 화력에 의해 더 튼튼하고 기동성을 갖췄다. 무엇보다도, 모든 종류의 병과의 협동은 전보다 더 철저해졌다. 대규모 부대는 야전군급, 전선군급의 역습을 방어 부대의 도움을 받으며 수행할 수 있었다.

 

1943년 여름, 소총병 군단들은 야전군급 방어의 중핵이 되었다. (해체되었던 소총병 군단들은 1942년에 그 지위를 회복했다.) 소총병 사단들이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작전에서 전술적 방어 단위였지만, 쿠르스크에서는 소총병 군단이 이 역할을 했다. 소총병 군단은 2개 제파로 배치되는 걸 원측으로 2개 소총병 사단을 제2 제대에, 나머지 1개 사단을 제2 제대에 세웠다. 이렇게 배치되어 군단 방어 종심은 15~20Km가 되어삳.(스탈린그라드의 사단 방어 종심의 2~4배다.) 군단 직할의 지원 부대로 1개 대전차 예비대, 전차 예비대, 기동 차단대가 있었다.

 

소총병 사단들은 휘하 연대들을 2개 제파로 나누고 대전차 예비를 두었다.2 여기에 사단들은 포병 집단과 2~3개 대대의 장사정포 집단, 1개 기동 차단대, 지뢰를 매설할 1개 공병 중대로 지원 세력을 가졋다. 몇개 사단들은 전차 예비도 가졌다. 대전차 방어를 위해서 사단은 5~8Km에 걸쳐서 9~2개의 대전차 화점과대전차 구역을 완전 배치했다. 사단 방어 구역은 6~9Km가 되었고 전술적 밀도는 Km당 7~7.5개 대대, 18~30문이 야포와 박격포, 2~4대의 전차가 되었다.3

 

쿠르스크에서의 소련군의 전수적 방어는 소총병 중대, 대대, 연대, 사단, 그리고 군단이 배치된 방어 거점과 방어선의 연속으로 공병 부대들에 의해 연결되었으며 대전차포, 방공포 화력이 밖혀 있고 전술적으로 배치된 기갑, 기계화 대대, 연대, 여단이 보병 지원을 받고 기갑 예비를 둔 것의 연속이었다.

 

공병 부대는 모든 방어 구조물들을 끈끈하게 만들라는 1943년 4월에 내려진 총참모부의 전훈 분석에 의한 명령을 수행했다.4 총참모부의 지침은 대대 방어 구여갸(유기적으로 연결된 참호 체계와 대전차 선이 기초가 되는)의 신설을 명령했다. 전술적 방어 구역은 2개의 방어선으로 구성된다.5 제1(주) 방어선은 3개의 방어 거점과, 공세 차단 거점, 군단의 제1 제대 사단 직할 포병대로 유지되었다. 대대 방어 구역(2Km 정면, 1.5~2Km 종심)은 3개의 방어 거점으로 구성되었다. 대대 구역은 중대, 소대 화점으로 세분되었다.

 

첫 번째 방어 지점은 적과 전선에서 접촉하고 적의 공세를 강력한 공병 준비를 수반하여 받아 내는 것으로 설계되엇다. 이것은 2~3개의 참호선과 통신 참호, 흩어져 있는 공병 장애물, 그리고 제1제대 연대의 제1제대인 2개 소총병 대대로 구성되었다.보병과 중화기는 제2, 3 참호선(각각 150~250m, 1~1.5Km 떨어져 있는에 배치되어 제1 참호선에 엄호 사격을 하고 대대 방어 구역에 종심을 형성했다.

 

제1 제대 소총병 연대의 제2 제대 소총병 연대는 제2 방어 구역(1~2개 참호선으로 구성되고 최전선에서 2~3Km 떨어져 있는)에 배치되었다. 중대 특화점이나 대대 방어 구역에 전개된 제2 방어선의 병력들은 제1 방어 지점을 포병과 전차를 수반해 지원하고 국지적인 역습을 시도한느 근간이 되었다. 제1제대 소총병 사단의 제2 제대 소총병 연대는 전선에서 4~6Km 떨어져 있는 참호선 1~2개 참호선을 지키게 되어 있었다. 사단 예비는 제3 방어 지점이나 그 근처에 배치되었다. 제3 방어 지점은 제1, 2 방어 지점보다 요새화가 덜 됐지만 적이 돌파에 성공했을 때 새로운 방어선 구축의 근간이 되었고 추가적인 화력 지원을 받으며 역슴을 개시할 지역이었다. 차단 지점들은 1~2개 참호와, 내부 방어선이나 전선 후방에 재배치 노선으로 구성되었다. 차단 지점은 돌파해 오는 적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제2 방어선은 제1 방어선보다는 공병 준비가 적고 제1선에서 10~15Km 후방에 있었다. 군단의 제2제대 소총병 사단들은 제2 방어선에 배치되어 제1 방어선을 돌파하여 아군의 작전술적 후방으로 돌입하려는 작을 막게 되 있었다. 추가로 제2 방어선은 후방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걸 막고 역습을 할 또다른 지점이 되었다. 제2 방어선의 종심은 제1 방어선을 뚫은 적이 피해를 재정비하는 걸 막고 제2선으로 후퇴하는 아군에게 날아올 적의 포격을 흐트러트릴 것이었다.

 

유기적인 참호 체계는 소총병 군단의 방호력 증가, 방어 강도 향상, 전투 중의 자유로운 기동을 제공했다. 전장에서의 공병 준비는 적의 이동을 제한했고, 특히 기갑, 기계화 병력을 막앗다. 대전차 장애물은 존재하는 자연적인 장애물을 더 강하게 만들고 지뢰의 자유로운 사용은 적 차량화 보병을 위협했다. 1943년 7월 스타브카는 지뢰 매설 지점과 방어 종심의 통합된 화력 투사법을 하달했다.6 특별히 스타브카 명령은 지뢰를 100개 넘게 6~10Km에 걸쳐 불규칙하게 매설하라고 지시했다.지뢰 매설반은 5~10m의 간격을 두고 지뢰를 매설했지만 평행하게 매설하지 않았다. 더 언급하면, 쿠르스크에서의 재뢰 매설은 전선에서 Km당 17,00개의 대인지뢰와 1,500개의 대전차 지뢰를 매설했다. 이는 모스크바 전투의 4배,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5배다. 높은 지뢰 매설 비중은 제1 방어지점과 제2 방어 지점 사이에 집중되었다 이로 인하여 제25 근위 소총병 군단(제7 근위군 소속)은 1.6Km 정면을 철조망으로 덮고 Km당 1,000개의 지뢰를 방어 정면에 매설했다. 제13군의 제81 소총병 사단은 정면에 1,000개의 대전차 지뢰를 매설해 이후 지뢰만으로 적 전차 40대를 파괴하게 된다.7

 

모든 종류, 구경의 포격은 방어에 화력을 제공하고 적 공세를 삐걱거리게 만들엇다. 쿠르스크 전투 전에는 대규모 포격이 없었고 독일군이 소련군 방어선을 휘젓고 다닐 때 소련군은 독일군의 효과적인 포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1943년 7월 이래 새로운 교범은 전훈 분석을 통해 나온 것이었고 소련군이 더 효과적인 포병 운용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간접 포격, (각 부대 지휘관들의 통제 하에 있는)은 보병과 기갑과의 조율 하에 작전을 수행했다.  소총병 군단 지휘관들은 포격 목표와 군단과 사단 대전차 방어 구역을 지정했다. 소총병 사단장들은 사단 화력으로 방어 정면, 방어 종심, 측면, 사단 전투 지경선으로 즉각적인 화력 투사를 할 수 있도록 화망을 조직했다. 연대장들은 연대 화력 지원집단과 대대 직사 화력으로 연대 방어망의 틈을 메꾸었다. 대대장들은 조직적인화력 투사를 조직하고 소총병 중대를 지원하게 했다. 추가로 사단급 포병은 야전군 사령부의 지휘 아래 대규모 준비 포격을 수행했다.8

 

효과적인 대전차 화력은 전격전을 막는데 필수적이었다. 1943년 7우러 이전에 소련군의 대전차 화력은 적 전차를 파괴할 수는 있었지만 대규모로 몰려드는 적 기갑 부대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소련군은 그간의 많은 실패들을 연구하여 쿠르스크와 그 이후를 위한 대전차 방어를 개발했다. 대전차 방어는 깊게 배치된 대전차 부대가 여러 부대에 통합된 것이 기본이었다. 대전차 부대는 대전차 화력을 대전차 구역과 대전차 화점을 형성하고 적 전차의 접근을 막았다. 다른 더 큰 대전차 부대는 기동 차단 무대에 배속되어 대전차 예비대로서 모든 제대에 지원되었다.9

 

대체적으로 대전차 예비대는 이렇게 구성되었다.

 

소총병 연대 수준

- 대전차포 2~3문, 1개 대전차총 소대, 기관총 소대

 

소총병 사단 수준

- 포대나 대대급 대전차포 부대

 

소총병 군단 수준

-1개 대전차 연대

 

기동 차단 부대는 이렇게 구성되었다.

 

소총병 연대 수준

-1개 전투 공병 분대

 

소총병 사단 수준

-2개 전투 공병 소대

 

소총병 군단 수준

-1개 공병 중대

 

 

대전차 화점과 대전차 구역은 대전차 화력이 통합된 형태로 보병과 포병의 화력이 공병의 방어를 엄호했다. 대전차 화점은 중대급 방어 구역에 배치되었고 소총병 중대의 중화기와 대전차 소총과 조합해 운용되었다. 대전차 화점은 일반적으로 4~6개 대전차포, 6~9개 대전차총, 2~3개 중기관총, 2~4개 경기관총으로 구성되엇다. 자동화기 병력들과 대전차 지뢰를 갖춘 공병들은 대전차포를 지원햇다. 제1 제대 소총병 연대들은 적의 주공 축선에서 3~4개 대전차 화점을 가졌고 사단으로 올라가면 9~12개 화점을 두었다. 명백한 취약 지점이나 지형적으로 취약한 곳에서 소련 지휘관들은 2~3개 대전차 화점을 배치하거나 더 강력한 대전차 구역을 설정했다. 방어 종심에서 소총병 사단과 군단은 독립 대전차 구역을 만들어 포병 대대 주변에 배치했다.10 전 포병에 걸쳐서 곡사포, 평사포, 방사포나 방공포는 대전차 방어의 보호를 받았다. 추가로 전차와 자주포가 전차호에 배치되어 대전차 방어게 가담했다. 전차와 자주포는 제1 제대 대대나 연대에 배치되어 중대~대대급 화력을 보병에게 지원했다. 추가로 독립 전차 여단과 전차 연대, 자주포 연대가 제2파 소총병 사단이나 더 큰 기갑, 기계화 부대의 역습을 지원했다.

 

쿠르스크에서의 효과적인 대규모 부대의 지휘 통제력의 향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휘관들은 지상전에서 하위 지휘관들하고도 신중하게 방어 계획에 대해 토론했다. 소총병 부대의 사령부와 지원 포병 부대는 효과적인 지휘와 화력 통제를 할 수 있는 곳에 배치되었다. 각가의 군단과 사단은 주 사령부와 예비 사령부를 두고 2개의 관측점을 두었으며 연대는 1개의 지휘소와 관측소를 두었다.11

 

2년간의 방어전 경험은 독일 국방군을 정면으로 상대해야 했던 소련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경험을 소련군의 재조직과 전술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었다.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소련군이 방어전의 전문가가 되었음을 뼈저리게 확인했으며 동부 전선에서 더 이상 독일군은 공세를 할 수 없게 되었고 독일군의 모든 행운은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1. 스트로코프, <군사술의 역사> 429쪽, 사자노프, <대조국 전쟁에서의 전술적 방어 개발> 21~23쪽

2. A. Bazhenov, "Razvitiye taktiki oboronitel'nogo boya po opytu kurskoi bitvy" (The development of the tactics of defensive battle from the experience of the Kursk battle) VIZh, June 1983, 34.
3. Ibid., 36.

4.Sazanov, 22.

5. Bazhanov, 36-38; A. I. Radzievsky, ed., Taktika v boevykh primerakh (diviziya) (Tactics by combat example (division)(Moskva: Voenizdat, 1976), 184-185.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6. Sazanov, 23-24.

7. Ibid., 24.

8. >Bazhenov, 40; 더 자세히 보고 싶으면 K. S. Kolganov, Razvitiye taktiki sovetskoi armii v gody Velikoi Otechestvennoi Voiny (1941-19T5 gg). (The development of Soviet Army tactics in the years of the Great Patriotic War (1941-1945)) (Moskva: Voenizdat, 1958), 352-57. 를 보라. 콜가노프는 전투 사례마다 통계 수치를 제시해 놓고 있다.

9.
L. Kozlov, 38-40

10 Ibid.

11. Bazhenov,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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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Che_GueVaRa | 작성시간 12.03.04 잘 읽었습니다. 앞의 글에 비교해보자면
    유기적인 참호체계, 그리고 보병,기갑병과와 미리 조율한 간접포격, 그리고 엄청난 지뢰 매설량(물론 독일군이 시간을 끌었으니 가능했겠지만)이 가장 눈에 띄는군요.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12.03.04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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