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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마피아]미국 마피아 - 64. 클리블랜드 마피아와 아일랜드 갱의 전쟁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4.07.02|조회수1,408 목록 댓글 1

클리블랜드 항구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온타리오 호수와 대서양을 잇는 세인트 로렌스 수로(Saint Lawrence Seaway)1959년이 되어서야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인트 로렌스 수로로 인하여 오하이오, 미네소타, 위스콘신, 미시간, 일리노이, 인디애나, 펜실바니아, 뉴욕 등 미국 5대호 주변의 주들과 토론토 등 캐나다의 몇 내륙 도시들은 드디어 직접 대서양 항로를 통하여 무역을 할 수 있게 된다.

세인트 로렌스 수로. 오대호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수로이다.

 

 

클리블랜드 시는 새로 시작될 대서양 무역 시대를 준비하는 데에 무려 1천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클리블랜드 항구는 겨울이 되면 얼어붙어 여전히 1년에 4개월 정도는 배들이 드나들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항구에서 하역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수도 엄청나게 늘기 시작하였다. 월터 위버(Walter Weaver)에 뒤이어 이 항만 노동자들의 노조, ILA의 지역번호 1317번 지부를 1961년부터 이끌게 된 사람이 바로 대니 그린이었다.

미 해병대에서의 군복무시 사격교관을 지내기도 했던 대니 그린은 1952년에 제대하자 뉴욕으로 갔다가, 곧 클리블랜드에 돌아와 철도 노동자로 몇 년간 일한 다음 1961년 초부터는 클리블랜드 항구의 하역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하였는데, 놀랍게도 일시작한 그 해에 항만노조의 보스로 선출된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을 잡아끄는 마력과 같은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한다. 대니 그린은 얼마 후 ILA5대호 지역연합의 부회장으로도 선출된다. 사실 미국내 모든 항구의 항만노조는 뉴욕만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아일랜드 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니 그린은 클리블랜드 마피아의 사업 파트너인 프랭크 브랑카토, 지역번호 27번인 IATSE의 지부 회장 애드리안 쇼트(Adrian Short, 닉네임은 주니어’), 팀스터의 지부인 지역번호 436번 노조의 회장 루이스 트리스카로(Louis Triscaro, 닉네임은 풋내기’) 같은 사람들과 친하게 되며, 함께 사업을 벌이게도 된다. 이때는 아팔라친 마피아 미팅이 경찰의 기습에 의하여 드러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라 마피아들은 다시 시끄러운 일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던 때였고, 대니 그린은 이 기회에 보다 용이하게 그의 세력을 넓힐 수가 있었다.

프랭크 브랑카토

 

 

대니 그린은 거액을 들여 노조의 본부 건물을 새로 단장하고, 그 내부를 자신의 이름을 따라 초록색으로 장식을 하였다. 심지어 그는 계약서 등에 사인을 할 때에도 초록색의 잉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린은 마피아들이 노동자들로부터 이익을 갈취하는 것과 똑같은 전형적인 방법으로 부두의 하역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사욕을 채웠는데, 이러한 노조 착취로 인하여 그린은 1966년에 5년 징역형 등의 유죄 판결을 받게 되지만 그 집행은 유예된다. 1970년에 이르러서 대니 그린은 거액의 횡령 혐의 등으로 드디어 중형을 선고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나, 다시 재판부와 합의를 보아 겨우 1만 달러의 벌금을 지불하면서 향후 5년간 노조활동으로부터 손을 떼도록 하는 판결만을 받는다. 대신에 그린은 자신에게 걸린 횡령 혐의를 기각하도록 하는 데에 합의를 본 것이다. 그런데 그린은 이 1만 달러의 벌금조차도 전액 다 납부하지는 않았다.

존 나르디(John Nardi)와 대니 그린이 서로 협조하기 시작한 것은 1974년경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존 스칼리지의 30년 통치기간 동안에 클리블랜드의 암흑가는 그다지 시끄러워 보이지는 않았으나 다른 도시의 다른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이권을 두고 사소한 싸움은 꽤 일어나고 있었으며,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것이 잦아지면서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존 나르디

 

 

클리블랜드 마피아는 같은 클리블랜드 출신인 재키 프레서와 그의 아버지인 빌 프레서를 통한 팀스터 노조와의 연결 때문에 팀스터 연금 기금에 대하여 일종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존 스칼리지가 죽고 클리블랜드 마피아의 상층부에 권력의 공백이 생겨나자 이 팀스터 연금 기금에 대하여 군침을 흘리는 그룹들이 노골적으로 탐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그 중 존 나르디와 대니 그린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존 나르디는 토니 밀라노에 의하여 픽업되어 패밀리의 일원이 된 사람으로 현재는 지역번호 410번 팀스터 지부의 재무를 맡고 있는 노조 간부였다.

1976, 패밀리의 보스가 바뀐 뒤 존 나르디는 패밀리의 새 언더보스인 레오 모체리와 사업상 갈등을 빚게 되자 대담하게도 레오 모체리를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된다. 나르디는 자신과 사업상 가까운 관계에 있던 아일랜드 갱, 대니 그린을 사주하여 레오 모체리를 처치하였는데 사실 이것은 너무나도 대담한 짓이었다. 왜냐하면 일찍이 솔다티 정도가 아닌 조직의 언더보스가 마피아가 아닌 다른 그룹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일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의 히트는 클리블랜드 마피아의 체면이 경각에 달리게 된 실로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다.

레오 모체리

 

 

전통적으로 클리블랜드 마피아는 뉴욕의 제노베제 패밀리의 지침을 따르고 있었다. 이것은 과거 모리스 달릿츠와 프랭크 밀라노의 연합이 뉴욕의 찰스 루치아노와 마이어 랜스키의 연합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데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존 나르디는 제노베제 패밀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뉴욕의 갬비노 패밀리와 동맹을 맺기로 마음을 먹고, 카를로 갬비노 사후 새로 갬비노 패밀리의 보스가 된 폴 카스텔라노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한편 제임스 리카볼리는 1977년 초에 안젤로 로나르도와 함께 뉴욕을 방문하여, 건강이 좋지 않은 프랭크 티에리(Frank Tieri)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제노베제 패밀리의 액팅보스를 맡아보고 있던 안토니 살레르노를 만나 존 나르디에 대한 문제를 상의하게 된다. 그리하여 클리블랜드 문제를 상의하기 위한 뉴욕 5대가문 보스들의 회합이 열렸고, 여기에서 도저히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져, 존 나르디와 대니 그린에 대한 사형 선고의 판결이 내려진다.

프랭크 티에리

 

 

안토니 살레르노

 

 

우선 존 나르디가 곧 뉴욕을 방문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조치는 나르디가 폴 카스텔라노를 만나러 뉴욕에 올 때에 취하기로 하였고, 그 실무는 갬비노 패밀리의 새미 그라바노가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나르디도 나름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었으므로 그 계획은 나르디의 귀에 흘러 들어갔고, 나르디는 그의 뉴욕 방문 계획을 취소하고 말아 첫 번째의 작전은 그만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제임스 리카볼리는 히트를 성공시키기 위하여 먼저 조직의 전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껴, 제노베제 패밀리의 허락을 얻어서 새로 10명의 신참 솔다티를 만들었다. 신입 솔다티라고는 해도 모두들 지하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다들 한가닥 하는 범죄자들이었다. 신입 솔다티의 나이는 대개 30대 후반이며 심지어는 40세가 넘은 사람도 있는 것이 보통이다. 클리블랜드 마피아는 또한 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클리블랜드 출신으로 캘리포니아에서 활약하고 있는 히트맨 지미 프라티아노를 초빙했고, 다시 프라티아노의 조언으로 실력이 있다고 하는 펜실바니아 출신의 레이몬드 페리토(Raymond Ferritto)를 불러왔다.

 

지미 프라티아노

 

 

레이몬드 페리토

 

 

그리하여 그전의 세 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후 드디어 1977517, 존 나르디는 자동차 폭발에 의해 그 야심을 접게 된다. 그리고 1977106일에는 마침내 클리블랜드 마피아에게 참기 힘든 모욕을 안겨주었던 대니 그린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하여 그들의 숙원을 이루게 된다. 이것 역시 자동차 폭발에 의한 히트였다. 존 나르디의 히트는 존 몬타나(John Montana), 헨리 그레코(Henry Greco) 등에 의한 것이었고 그린의 히트는 레이몬드 페리토, 지미 프라티아노 등에 의한 것이었다. 자동차 폭탄은 모두 파스칼레 치스테르니노(Pasquale Cisternino, 닉네임은 백정’)의 작품이었다.

존 나르디의 폭탄 암살에 대한 기사

 

 

파스칼레 치스테르니노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서 일일이 언급을 하지 않아 그렇지, 사실은 그간 클리블랜드 마피아와 나르디-그린, 이 두 그룹간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대니 그린이 죽기 전까지 1977년 한해에만도 37건의 폭발사건이 오하이오 주에서 발생했으며, 그중에서 자그마치 21건의 사건이 클리블랜드 시내에서 일어났다. 1977년 한해 동안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열흘에 한 번 꼴로 폭탄이 터졌던 것이다. 이 일련의 폭발 사건으로 인하여 클리블랜드 시는 언론으로부터 폭탄 도시라른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대니 그린은 자신의 목숨 하나에 마피아 전체의 체면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들의 의도대로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할 줄을 그린이 짐작하고 있었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린은 철저한 경호와 완벽하게 무질서한 스케줄에 따라 행동하여 마피아들의 암살 시도를 수 차례에 걸쳐 따돌리며 생명을 보존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었다.

1977104, 제임스 리카볼리, 안젤로 로나르도, 레이몬드 페리토 등은 대니 그린의 애인 집 전화에 장치한 도청 테이프를 수거하여 들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이틀 후에 그린의 치과 진료가 예약되어 있다는 대화가 들어 있었다. 그린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였다.

이틀 후인 106, 대니 그린이 약속 시간에 자신의 자동차를 몰고 와 린드허스트의 브레이나드 메디칼 빌딩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 잠시 후, 페리토는 폭탄 차량을 운전하여 나타나 그린의 차 바로 왼쪽에 차를 주차시켰다. 이 차는 우측을 향하여 터지도록 폭탄이 장치되어 있었고, 폭탄의 위력이 감소되지 않도록 조수석의 문짝을 아예 떼어놓은 상태였다. 폭탄에는 원격 무선 스위치가 장착되어 있었으며, 페리토는 동료와 함께 한 곳에서 리모콘 장치를 손에 들고 주차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발은 조용한 린드허스트의 교외를 뒤흔들었다. 폭탄은 대니 그린이 자신의 차 문을 터져 그린의 등을 때린 것 같았다. 폭발 후에 생기는 진공상태의 흡입력에 의한 것인 듯 그린의 몸은 폭탄 차량의 아래에 깔린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즉사한 것으로 보였다. 그린이 자랑스럽게 끼고 다니던 초록색 에메랄드가 5개 박힌 금반지는 손가락에 끼워진 채 30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폭파된 대니 그린의 차

 

 

차에 깔린 대니 그린의 시신

 

 

대니 그린 피살에 대한 기사

 

 

대니 그린과 마피아의 전쟁을 다룬 영화 '킬 더 아이리시맨'

 

 

마침내 대니 그린과 존 나르디의 제거에는 성공하였지만 그 사이 일어났던 일련의 폭발 사건들은 관계 사법기관들을 너무나 자극시켰고, 결국 사건과 연관된 많은 클리블랜드 마피아의 인물들이 기소되는 등 조직은 적지않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은 역시 하나도 좋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기소된 인물에는 제임스 리카볼리, 안젤로 로나르도, 지미 프라티아노의 고위 멤버를 비롯하여 레이몬드 페리토, 파스칼레 치스테르니노 외 여러 솔다티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중 프라티아노와 레이몬드 페리토는 후에 일당을 배신하여 검찰측 증인으로 돌아서게 된다. 대니 그린 피살사건과 관련해서는 오직 파스칼레 치스테르니노와 다른 한 명만이 유죄로 판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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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기목 | 작성시간 14.07.14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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