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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사]3. 공화국 성립 이전의 스페인 - (3) 국왕의 퇴진

작성자청색장미|작성시간18.03.24|조회수1,122 목록 댓글 0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수출 붐이 수그러들자 노동자들은 점점 호전적으로 변해 갔다. 또한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은 좌파 세력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유럽의 양쪽 끝(러시아와 스페인)이 혁명의 불길에 휩싸일 것이라는 얘기들이 오갔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안달루시아에서는 폭동이, 바르셀로나에서는 대규모 노동쟁의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시기는 볼셰비즘의 3으로 알려졌다. 최악의 소요 사태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의 전국노동연합이 라카나디엔셰(La Canadiense) 공장 노동자들을 파업에 나서도록 부추기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카탈루냐 지역 고용주들은 공장 폐쇄로 맞서거나, 가난한 지역의 이탈 노동자들을 고용해 공장을 가동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고용주들은 노동조합, 특히 전국노동연합이 주도하는 폭력에 대응하여 총잡이들을 고용하여 노조 지도자들을 암살했다. 알폰소 13세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세베리아노 마르티네스 아니도(Severiano martinez Anido)를 주지사에 임명했는데, 아니도가 임명한 경찰총장 아를레기(Arlegui) 장군은 경찰 총잡이들을 재조직했다. 그러고 나서 이틀도 지나지 않아 21명의 노조 지도자들이 자택이나 길거리에서 피살되었다. 보복의 악순환이 점점 증폭되어 1921년에는 총리인 에두아르도 다토가 아나키스트들에게 암살되기에 이르렀다.

라카나디엔세 공장. 바르셀로나 시와 전차에 전력을 공급했던 이 회사의 실제 이름은 바르셀로나 전차전력회사였다. 그러나 대개 라카나디엔세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1919년 수력 발전 회사인 라카나디엔세 공장에서 8명의 노동자가 해고된 것을 계기로 발르셀로나 일대에서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파업으로 꼽히는데, 이 파업으로 노동자들은 세계 최초로 1일 8시간 노동을 보장하는 법과 큰 폭의 임금 인상을 쟁취해냈다.


세베리아노 마르티네스 아니도


아를레기 장군


체포되는 노동조합 측 암살자. 1921년과 1923년 사이에 바르셀로나에서 152명이 피살되었다. 1923년에는 노동 변호사 프란세스크 라이레트와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 살바도로 세기가 암살되었으며, 사라고사의 대주교 솔데비야 추기경도 이 해에 살해되었다.


전국노동연합이 과격해지면서 사호주의자들이 이끌던 노동자총동맹의 온건 노선과 자주 충돌했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노동계급에 대한 반역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개량주의자 정도로 여겼다. 안드레스 닌(Andres Nin)과 호아킨 마우린(Joaquin Maurin)의 부름에 응답한 투쟁적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을 중심으로 1921년 에스파냐 공산당(Partido Comunista de Espana, PCE)이 출범했다. 이 제3의 세력 역시 아직은 그 힘이 미미했지만 산업 노동계급을 둘러싼 주도권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한편 농촌에서는 안달루시아 지역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결국은 실패로 끝날 불운한 농민 폭동을 이어 갔다. 농촌 노동자들의 파업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치안대가 소집되었고, 발포와 체포를 통해 파업이 진압되었다. 항의의 물결이 코르도바에서 하엔, 세비아, 카디스로 퍼져 나갔고, 항의자들은 더 나은 대우와 농민 노조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의 다른 쪽 끝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자극받은 그들은 소비에트 만세같은 슬로건을 채택했고, 그런 글귀를 하얀색 담벼락에 써놓기도 했다. 지주들은 자연스럽게 만일 약한 모습을 보이면 자신들 역시 러시아 지주들과 마찬가지로 참혹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드리드의 정치가들조차 모종의 토지 개혁 프로그램이 시급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문제와 진지하게 씨름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한 정부가 거의 없었다. 1917년부터 1923년 사이에 23차례의 중요한 정부 위기와 30번의 작은 위기가 있었다.

안드레스 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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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마우린


에스파냐 공산당의 결성


이 시기 대부분 기간 동안 마드리드의 정치가들이 그러저럭 현실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19217월 스페인 군대가 모로코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나자 훨씬 심각한 위기가 나타났다. 실베스트레(Silvestre) 장군이 지휘하는 1개 사단이 1921720일 아누알(Annual)에서 아브드 엘 크림(Abd el-Krim)이 이끄는 모로코 부족들에게 매복 공격을 당했다. 국왕 알폰소 13세는 허영심 때문에 산티아고 성인(야고보 성인. 스페인 군대의 수호 성인)의 축일에 뭔가 그럴듯한 승리를 발표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전쟁부 장관을 은밀하게 만나 이 모험에 나서도록 실베스트레 장군을 부추겼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마누엘 페르난데즈 실베스트레. 톨레도 군사학교를 졸업한 그는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의 상급 지휘관이었다.


아브드 엘 크림.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과 프랑스의 통치에 대항해 저항 운동을 벌인 지도자. 한때는 리프 공화국까지 세웠으나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는 능숙한 전략가이자 뛰어난 조직가로서 해방 운동을 이끌어 마그리브(아프리카 북서부)의 영웅이 되었다.


아누알 원정군은 무능한 군대의 고전적인 사례였다. 1만 명의 병사가 죽고 4천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실베스트레 장군은 자살했다. 일 주일 후에 중요한 기지 하나를 적에게 빼앗겼는데, 7천 명의 병력이 더 학살당했으며, 모든 장교들이 사슬에 묶여 끌려갔다. 국민들이 이 치욕적 패배에 너무나 분노했기 때문에 정부는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조사 보고서가 발표되기 직전인 1923913일 카탈루냐의 신임 총사령관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ra)가 프로눈시아미엔토를 단행했는데, 그는 알폰소 13세를 계속 국가 수반으로 둔 상태에서 스스로 독재관(dictator)에 취임했다. 이에 대해 다른 장군들은 군대와 와이 공적인 단죄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리모 데 리베라에게 암묵적으로 지지를 보냈다.

아누알 전투 이후 사상자를 수습하는 모습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 일부 분야에서는 업적을 이루기도 했으나, 그가 이끈 억압적인 정부는 만족스러운 정치 제도를 창출하지 못했고 이에 따른 불만이 확산되어 실각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은 반대파의 반발과 그에 따른 혼란을 막기 위해 즉각 전국에 걸쳐 전시 상태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제1,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유럽에서 출현한 전형적인 독재자는 아니었다. 어떤 점에서 프리모 데 리베라는 섭정기 영국(1811~1820)에서 출현했던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훈련하는 신사들의 안달루시아 판본이었다. 젊은 장교시절 그는 병사들의 식량과 장비를 빼돌려 팔아먹는 것 같은 군대 내 부패 관행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러나 그 역시 정치에는 치명적이랄 수 있는 군인 특유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어서 모든 사람을 군대처럼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면 만사가 잘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 후 프리모 데 리베라는 애국연합(Union patriotica)'이라는 정당을 설립했지만 대중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프리모는 또한 사법권을 완전히 자의적으로 해석했으며, 가끔은 유머 감각을 발휘해서 솔로몬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독재 기간 동안 경찰의 야만적 폭력 행위는 그리 많지 않았다.

1928년 카르타헤나에서 개최된 애국연합의 모임


프리모는 집권 초기에는 산업 자본가들의 환영을 받았고, 자유주의적 중간계급의 반응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중간계급은 프리모의 집권이 당시의 엄청난 혼란과 유혈이 난무하는 상황보다 더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독재자가 비록 귀족 출신이기는 해도 어쩌면 그 정부가 지주들의 정부에서는 어림도 없었던 농업 개혁을 단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비록 프리모가 가부장적 태도로 농민들에게 동정을 표하기는 했지만 농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급진적이었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여러 조치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프리모는 카탈루냐에서 산업 전쟁을 끝내려는 조치를 단행했다. 그는 노동자 단체가 정부의 영향권 안에 있어야 하고 고용주들 역시 통제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리모는 중앙집권화를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을 선택했고, 그리하여 노동자총동맹 위원장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를 국가 자문위원 자격으로 자신의 정부에 끌어들여 산업 조정 기구를 설치하게 했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지도자였던 인달레시오 프리에토는 노동자총동맹 지도자들이 프리모의 정부에 들어가 일하는 데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아나키스트들 역시 자신들의 조직과 출판 사업이 금지당하자 라르고 카바예로를 파렴치한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웠다.

한편 처음에 프리모의 집권을 환영했던 카탈루냐 지역 고용주들은 피리모가 집권 후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다루는 문제에서 자신들의 방식에 간섭하려 하자 거세게 항의했다. 프리모는 또한 카탈루냐의 언어와 문화의 억압을 시도하면서 카탈루냐 고용주들의 민족주의를 공격하기도 했다. 새 교파의 창시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프리모 역시 자신의 선의에 대해 신념이 확고했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사소한 일에까지 간섭했으며 한마디로 예상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프리모가 거둔 가장 큰 성공은 모로코에서 전쟁을 끝낸 일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판단 덕분이 아니라 행운의 산물이라 할 수 있었다. 19254월 리프족 대족장 아브드 엘 크림이 의욕이 앞선 나머지 무모하게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까지 쳐들어가자 프랑스와 스페인은 즉각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99일 프랑스와 스페인 동맹군이 알루세마스(Alhucemas)에 상륙했고 아브드 엘 크림의 군대는 궁지에 몰렸다. 이로써 모로코 반란이 마침내 진압되었다.

알루세마스에 상륙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12월에 프리모는 군 장교들과 민간인들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그의 스페인 현대화 계획은 판단력도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그 계획에는 결국 엄청난 낭비로 끝날 수밖에 없는 수력 발전용 댐 건설이나 고속도로 건설 같은 욕심이 지나쳤고 처음부터 계획을 잘못 세운 대규모 토목 공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독재 정부는 전국 특별 도로공사협회를 이용하여 2,500km의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에브로 강, 두에로 강, 세구라 강, 과달키비르 강, () 피레네에 공사를 계획했으나 그중 에브로 강 수력발전소 사업만 엔지니어인 마누엘 로렌소 파르도의 감독과 관계장관 과달오르셰 백작의 지휘로 진행되었다. 1925년부터 1929년 사이에 예산 적자는 두 배로 늘어났다. 더구나 젊은 재무부 장관 호세 칼보 소텔로(Jose Calvo Sotelo)는 스페인의 페세타화()를 금본위제로 고정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통화 투기꾼들은 거대한 수익을 올린 데 비해 정부는 큰 손실을 보았고, 화폐 가치를 유지하려는 정부의 시도 또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자본이 빠져나갔으며, 1931년 제2공화국이 들어섰을 때 페세타화는 거의 50%나 가치가 폭락한 상태였다.

호세 칼보 소텔로


1928년 발행된 50페세타 화폐


프리모가 통치하는 동안 질식할 것 같은 짜증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 갔다. 은행가들과 기업가들은 프리모가 잘 알지도 못하는 문제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데 넌더리를 냈고, 중간계급 사람들은 그가 대학 문제에 나서자 반발하기 시작했다. 프리모의 직업과 배경의 화려한 산물이었던 족장과도 같던 면모가 이제는 그가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바로 그 왕정에 부담스러운 짐이 되고 말았다. 알폰소 13세는 프리모가 왕위를 노리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지난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치권에서 독재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좌파 자유주의자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높아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공화연합(Alianza Republicana)'이었는데, 이 당의 지도자는 마누엘 아사냐(Manuel Azana), 알레한드로 레룩스, 마르셀리노 도밍고(Marcelino Domingo) 등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독재 체제 타도를 넘어서 왕정까지도 폐지하는 것이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프리모와 협력하는 데 반대하는 의견이 점차 확산되어 갔으며, 1929년 라르고 카바예로는 프리모 체제와 협력하는 데 동의한 자신의 결정이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1930년 사회주의자들이 왕정과 독재에 반대하고 나섰을 때 노동자총동맹에 가입한 노동자 수는 그동안 급속히 늘어 1923년에 211천명에서 1930년에는 277천명이었고, 2년 후에는 50만 명을 넘어섰다.

알폰소 13세(왼쪽)와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


전쟁부 장관에서 나중에는 내전기 공화국 대통령이 되는 마누엘 아사냐


마르셀리노 도밍고


권위를 도전받은 엄격하고 둔감한 가장이 보통 그러하듯이 프리모는 자기 생각을 더욱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자신의 뜻이 인정받지 못한데 상처 입고 혼란에 빠진 그는 군대에 다시 한 번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군대는 이 요구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프리모는 1930128일 왕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외국으로 망명을 떠났으며, 몇 주 후에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130, 알폰소 13세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파기한 헌법에 더는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또 다른 장군 다마소 베렝게르(Damaso Berenguer)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했다. 이 조치에 대해 당시 치안대 최고 책임자로서 베렝게르보다는 자기가 총리 자리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산후르호(Sanjurjo) 장군이 분노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장군들에게 의지하려는 국왕 알폰소의 태도와, 베렝게르가 거의 1년 동안이나 의회를 소집하지 않은 사실에 분노를 터뜨렸다. 국가는 칙령을 내려 통치했고, 검열은 여전히 유효했다. 심지어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Niceto Alcala Zamora)와 미겔 마우라(Miguel Maura) 등 예전에는 왕정을 지지했던 정치가들도 이제 공공연히 공화정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다마소 베렝게르


호세 산후르호. 1925년 리프족 반란전쟁 당시 과감히 진압하여 '리프의 사자(The Lion of Rif)'라는 별명을 얻었다.


공화국 초대대통령이었던 사모라. 정부내 각 분파들의 조정에 노력하다가 1936년 5월 의회결의에 의해 면직된다.


미겔 마우라


인달레시오 프리에토는 처음에는 자신의 계산에 따라, 후에는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인 사회주의노동자당과 노동자총동맹 집행위원회의 지지를 받아 모의에 참여했다. ‘공화연합1930827일 바스크 지역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an)의 해변 리조트에서 공식 출범했다. 카탈루냐 공화주의자들도 카탈루냐에 자치법을 부여한다는 조건을 걸고 산세바스티안 협약에 참여했다. 이 공화주의 운동은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Gonzalo Queipo de Liano), 이그나시오 이달고 데 시스네로스(Ignacio Hidalgo de Cisneros) 같은 군 장교들의 지지를 받아 더욱 강력한 세력으로 커져 갔다.

스페인 북쪽 끝에 있는 산세바스티안, 바스크 지방에서는 도노스티아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이그나시오 이달고 데 시스네로스. 그는 내전 기간 동안 공산주의자로서 공화군 측 공군사령관이 된다.


12월에 노동자총동맹이 총파업을 선언했을 때,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의 전국노동연합도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한편 알카라 사모라가 의장이 된 혁명위원회는 미래의 수권 정부를 자처했다.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은 공공연히 왕정 타도를 주장했고, 1212일로 예정했던 봉기는 사흘 뒤로 연기해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하카(Jaca) 지역 수비대 대장 갈란(Galan)과 가르시아 에르난데스(Garcia Hernandez)가 봉기가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지 못하는 바람에 원래 예정된 날 오전 6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곧 사태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항복했으며, 곧바로 군사 반란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들은 즉각 공화주의의 순교자가 되었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에밀리오 몰라(Emilio Mola) 장군은 혁명위원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했고, 봉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이 공화주의 운동의 추동력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페르민 갈란과 가르시아 에르난데즈(오른쪽)


에밀리오 몰라. 몰라는 1936년 군부의 공화국전복음모 수립당시 팜플로나 지구에 군정지사(Military Governor)로 파견되어 있었다. 애초에는 산후르호의 뒤를 이어 2인자격으로 받아들여졌던 지휘관이었으나 너무 소심한 그의 성격과 무능은 결국 프란시스코 프랑코에게 선두를 빼앗기는 원인이 되고 만다.


다음 달, 그러니까 19311월에 또다시 대학생들이 파업에 나섰는데, 이 파업은 공화국을 위하여(Al servicio de la Republica)'라는 단체가 주도했다. 이 단체에는 스페인 지식인 사회를 대표하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 그레고리오 마라뇬(Gregorio Marañón), 라몬 페레스 데 아얄라(Ramón Pérez de Ayala), 그리고 의장을 맡은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 등이 가담했다. 214일 왕은 이런 소요에 당황하여 베렝게르를 해임하고 해군 제독 후안 바우티스타 아스나르(Juan Bautista Aznar)를 정부 수반에 임명했으며, 412일에 지방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412일 저녁에 투표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들이 거의 모든 도시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마드리드에서는 공화파가 왕당파보다 세 배, 바르셀로나에서는 네 배 가량 더 많은 표를 획득했다. 마드리드 도심을 꽉 메운 흥분한 군중들은 이 선거가 의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는데도 즉각 알칼라 사모라가 이끄는 새 정부를 임명하라고 주장했다.

공화국을 위하여의 주요 인물들. 좌측부터 안토니오 마차도, 그레고리오 마라뇬,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라몬 페레스 데 아얄라


후안 바우티스타 아즈나르


전쟁부 장관에 임명되었던 베렝게르 장군은 군대에게 인민의 뜻에 따르라고 명령했다. 아스나르 제독 정부의 일원이었던 로마네노스 백작이 공화위원회(republican committee)와 모종의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치안대 최고 책임자인 산 후르호 장군에게 가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자존심이 상해 있었던 장군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 마드리드 전체가 혁명의 면모를 띤 인민들의 축제의 장이 되었다. 그날 저녁 아스나르 제독은 왕에게 내각 총사퇴서를 제출했다.

1931414일 아침 6시에 에이바르(Eibar)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이 소식은 즉각 스페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로마네노스 백작은 공화주의자들을 이끌던 알칼라 사모라와 회동했는데, 사모라는 왕과 그의 가족이 그날 오후에 스페인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왕은 군대가 지켜줄 것이라는 한 장관의 조언을 거부하고, 배를 타기 위해 마드리드를 출발해 카르타헤나 항으로 갔다. 왕의 출발은 아무런 소동도 일으키지 않았다. 미겔 마우라는 왕정은 그것이 붕괴되기 오래 전에 이미 스페인 사람들의 마음에서 증발해버리고 없었다라고 썼다.

에이바르. 바스크 지역의 도시이다.


1931년 4월 14일, 알폰소 13세가 왕위를 내놓고 스페인을 떠나자 거리로 몰려나와 환호하는 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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