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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사]6. 공화국 수립부터 내전의 발발까지 - (3) 아스투리아스 혁명과 사회주의자들의 분열

작성자청색장미|작성시간18.04.23|조회수2,514 목록 댓글 2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위협은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사회주의자들의 볼셰비키화였다. 193413<엘 소시알리스타(El Socialista, '사회주의자‘)>는 이렇게 선언했다. “조화라구? 천만에! 계급투쟁이다! 범죄자 부르조아에 대한 증오를 총동원하여 그들을 끝장내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10일 후에 사회주의노동자당 집행위원회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우파뿐만 아니라 중도좌파까지 깜짝 놀랄 주장이 담겨 있었다.

 

토지를 국유화한다.

모든 종교 교단들을 해산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다.

군대를 해산하고 민주적인 수비대로 대체한다.

치안대를 해체한다.

   

스페인 공산당의 기관지 엘 소시알리스타 


선거에서 패하고 난 뒤 사회주의노동자당 내 온건 세력을 대표하던 인달레시오 프리에토는 라르고 카바예로가 장악하고 있는 사회주의노동자당 집행위원회에서 자신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이후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는 점점 과격해졌고, 그들은 의회가 아닌 노동연합(Alianza Obrera)' 설립 같은 외곽 조직을 더 중시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23일에 그들은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혁명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그 반란이 내전(內戰)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며, “그것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참하느냐, 그리고 그 반란이 얼마나 큰 폭력을 끌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노동자총동맹 지도자였다가 물러나 훌리안 베스테이로는 그런 반란은 집단 광기일 뿐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헛되고 유아적인 환상으로 끝나고 말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라르고 카바예로는 개의치 않았다. 마누엘 아사냐도 폭동을 일으키는 것은 군부가 다시 정치에 개입하여 노동자들을 압살할 구실을 제공할 뿐이라고 사회주의자들에게 경고했다. 역시나 라르고 카바예로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카바예로는 자신의 대변지 <클라리다드(Claridad, ‘분명함‘)>를 통해 베스테이로와 프리에토를 비롯한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에게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는데, 힐 로블레스나 왕당파에 대한 공격보다 더 악의적이었다. 서로 극히 무책임한 수사와 천박한 정치 담론을 주고받는 동안 증오의 불길이 더욱 타오르고 공포 분위기가 공조되었다. 젊은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무장과 군사 훈련이 은밀하게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반도 북동부의 카를로스파와, 아직은 소수에 불과한 팔랑헤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미 그 전 해 6월에 스페인 정치판에 어린애 장난 같은 유치한 행태가 나타나고 있으며 도처에서 폭력이 분출하고 있다.”라고 경고하였다.

레룩스 정부는 토지 개혁을 중단하고, 5월에는 스페인 대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한 좌파 정부의 조치를 취소했으며, 농업 노동자도 산업 노동자와 똑같이 보호한다는 법을 무효화했다. 지주들이 일거리를 찾는 배고픈 노동자들에게 공화국이나 처먹지 그래.”라고 말했다는 얘기도 있다. 노동자총동맹 내 농민 담당 부서가 총파업을 요구했으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호응이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의회의 지지도 없이 파업을 벌인 것은 오히려 우파 정부의 입지만 강화해주었을 뿐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실수였다.

1934년 여름에는 마드리드 정부와 카탈루냐 주정부인 헤네랄리타트가 주로 포도농장 소작농들의 이해와 관련된 카탈루냐판 토지 개혁 문제로 충돌했다. 1934102일 레룩스의 동료 리카르도 삼페르(Ricardo Samper)가 이끌던 새 정부는 이 충돌의 희생양이 되었다. 완고한 우파의 압력에 못 이겨 삼페르가 사임했던 것이다.

리카르도 삼페르


알칼라 사모라 대통령은 좌,우파 양쪽에서 분출하고 있는 격앙된 분위기에서 이 위기에 대처해야 했다. 좌파는 우파가 공화 정부를 파괴하려 한다면서 총선을 새로 실시하자고 주장했고, 우파는 우파대로 내각 참여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힐 로블레스는 만일 정부가 자치우익연합에 내각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선언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그 전 해에 스페인에는 파시즘의 위험이 없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러나 1934년 여름 카바예로 추종자들은 전과는 달리 파시스트 늑대들의 위험을 강조하고 나섰는데, 그것은 예언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전략이었다. 자치우익연합 지도자 힐 로블레스는 아스투리아스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무기가 전달된 사실에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자신들은 이 같은 사태가 계속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자치우익연합은 의회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내각에 1명도 참여시키지 않았는데, 힐 로블레스는 이제 자신의 몫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 노동자총동맹은 자치우익연합이 공화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들의 차후 행동에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104일 삼페르 정부가 붕괴되고 나서 알레한드로 레룩스가 이끄는 새 정부에 자치우익연합에서 3명이 입각했는데, 힐 로블레스는 들어가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이 이끄는 사회주의노동당은 호전적 발언을 쏟아 내고 정부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마치고 혁명적 총파업을 계획했다. 공화국이 적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던 좌파와 중도 좌파의 다른 정당들도 이제부터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불법으로 규정된 행동도 불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부는 총파업을 불법 행위로 규정하고, 스페인 전역에 전시 상태를 선포했다.

105일 총파업이 시작되자 전국 대부분에서 들고일어났다. 라르고 카바예로와 지지자들은 무책임한 행동에 한 술 더 떠서 아무런 계획도 없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것은 베스테이로 등이 경고했던 것처럼 중간 계급을 겁먹게 하여 우파의 품에 안기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노동자총동맹은 마드리드에서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마치 1934년의 스페인 수도가 1917년의 페트로그라드라도 되는 것처럼, 군인과 경찰들도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곧 총파업으로 자신이 원했던 대중의 자연 발생적 혁명을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파업 참가자들은 내무부 청사와 몇몇 군사시설물을 점거하려고 시도했고. 그중 일부는 총을 쏘며 공격하기도 했으나 곧 치안유지군에게 체포되었다. 108일이면 혁명위원회 구성원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1934년 10월 폭동으로 체포된 라르고 카바예로


카탈루냐에서는 전국노동연합이 불참했는데도 총파업을 실행에 옮겼다. 전국노동연합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시작한 혁명에 힘을 보탤 생각이 없었다. 그에 반해 카탈루냐 좌파는 마드리드 정부가 카탈루냐 자치법을 처리하는 처사에 분노한 데다가 총파업을 기회로 독립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 106일 저녁 8시에 콤파니스는 헤네랄리타트 건물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고 스페인 연방공화국 내 카탈루냐 국가를 선언했다. 그는 스페인 전 지역의 ()파시스트들이 바르셀로나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레룩스는 지역 사령관 도밍고 바테트(Domingo Batet) 장군에게 전시 상태를 선언하고 선동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신중한 성품이었던 바테트는 산하우메(Sant Jaume) 광장에 두 문의 대포를 설치하고 공포를 발사하게 했다. 107일 아침 6시에 콤파니스는 추종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콤파니스에게 30년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당시 우연히 바르셀로나에 체류하고 있던 전() 총리 마누엘 아사냐도 같이 체포되어 감옥으로 사용하던 선박에 구금되었다. 카탈루냐 자치법은 즉각 정디되었고, 마누엘 포르텔라 바야다레스(Manuel Portela Valladares) 장군이 카탈루냐 주장관에 임명되었다.

도밍고 바테트


산하우메 광장에 배치된 대포



추종자들과 함께 체포된 유이스 콤파니스


스페인 북부에서는 혁명적 총파업이 레온의 광산 지대, 산탄데르, 비스카야 등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빌바오에서는 대엿새 동안 치안유지군과 파업 가담자들이 충돌했고, 이이바르와 몬드라곤에서는 40명의 사망자가 났다. 그러나 군대가 도착하고 스페인 공군이 광산 지대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반란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아스투리아스에서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이곳에서는 한 달 전에 이미 자치우익연합 사람들이 집결하는 데 항의하여 파업을 벌인 적이 있었다. 아스투리아스는 무어인들로부터 영토를 되찾는 재정복 운동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우익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아스투리아스는 또한 스페인에서 전국노동연합과 혁명적 동맹 세력인 노동연합이 손을 잡은 유일한 곳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이 상당한 지지 기반을 마련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 혁명위원회는 사회주의자 라몬 곤살레스 페냐(Ramon Gonzalez Pena)가 이끌었다. 그러나 뒷날 공산주의자들은 폭동을 자신들이 주도했다고 자랑했다. 이 폭동은 중도파와 우파가 혁명에 두려움을 품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고, 뒷날 프랑코가 적색분자들의 음모를 거론하게 만드는 구실이 되었다.

아스투리아스 지방


라몬 곤살레스 페냐


폭동에 참가한 무장 노동자는 15천 명에서 3만 명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무장한 소총은 대부분 당시 사회주의노동당에서 가장 온건한 인물로 꼽히던 인달레시오 프리에토가 주선하여 보내온 것이었다. 소총은 요트 투르케사호에 실려 오비에도 북동쪽 프라비아에 상륙했다. 프리에토는 체포를 피해 재빨리 프랑스로 도망갔다. 다른 무기는 노동자들이 점령한 지역의 무기 공장들에서 넘겨받았다. 광부들은 또한 자신들이 갖고 있던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했는데, 이것은 일명 혁명의 대포로 불렸다.

1934년 아스투리아스 혁명 가담자들


오비에도의 위치


105일 반란자들은 새벽에 치안대 초소와 공공건물을 공격하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그들은 미에레스, 히혼, 아빌레스와 광산 지대 몇몇 소읍을 손에 넣었다. 그들은 다음날 1천 명 가량의 수비대가 지키던 오비에도로 이동하여 치열한 시가전 끝에 도시를 점령했다. 혁명 세력은 코뮌을 구성하고 화폐를 위원회가 발행하는 쿠폰으로 대체했다. 또한 기차와 운송 수단을 징발하고 건물을 접수했다. 그 과정에서 약 40명이 살해되었는데, 그중 다수는 부자와 성직자들이었다. 반란은 비록 한 지역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완전한 내전의 양상을 띠었다.

오비에도를 점령한 혁명군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전쟁부 장관은 프랑코 장군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107일 로페스 오초아(Lopez Ochoa) 장군이 원정군을 거느리고 출발했다. 다음날 순양함 리베르타드(Libertad, '자유‘)호가 두 척의 포함을 이끌고 히혼에 도착했고, 그들은 바아머물면서 해안 지역에 있는 광부들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들도 탄광 지대와 오비에도에 폭탄을 투하했다. 108일 프랑코는 야구에(Juan yague) 중령이 이끄는 스페인 외인군단 2개 중대와 모로코인 레굴라르(Regulare) 2개 대대를 보냈다. 그날 오후 로페스 오초아는 아빌레스를 탈환했다.

로페스 오초아


순양함 리베르타드호


프랑코(좌)와 야구에(우)


모로코인 레굴라르


1011일 오비에도에서 혁명 세력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실탄은 거의 다 떨어졌고, 다른 지역의 봉기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1012일 황혼 무렵 로페스 오초아 장군은 도시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6일 후 혁명위원회의 새로운 수장 벨라르미노 토마스(Belarmino Tomas)가 모로코군 병력이 도시와 마을에서 철수하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1010일 이후 외인군단 병사들과 모로코인 레굴라르들이 광산촌에 밀고 들어가 재산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겁탈하고 포로들을 현장에서 사살하는 등 그 마을을 마치 적군 대하듯 짓밟았다. 치안유지군들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야만스러운 탄압을 자행했다. 가장 잔인하기로 악명을 떨친 사람은 치안대 지휘관 리사르도 도발(Lisardo Doval) 소령이었다.

로페스 오초아에게 항복하는 벨라르미노 토마스


프랑코(우)와 리사르도 도발 소령(좌)


아스투리아스 혁명은 고작 2주 남짓 지속되었지만 1천 명 가량의 인명이 희생되고 막대한 재산 피해가 났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폭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고 수천 명이 구속되었다.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19351월 전시 상태 해제와 함께 풀려났다. 20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실제로 형이 집행된 것은 2명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스탈린이나 히틀러 체제가 혁명적 성격을 띤 반란 행위에 대응했던 방식을 고려하면 당시로서는 대단히 너그러운 조치였다. 치안유지군들이 저지른 무시무시한 야만적 행위는 마드리드의 정치가들보다는 현장에 있었던 지휘관들, 특히 야구에와 프랑코 장군에게 책임이 있었다. 카스틸블랑코 마을 사건에서 아사냐가 받았던 비난은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아스투리아스 반란에서 불가피하게 더 강력한 조치가 뒤따랐는데, 그것은 마드리드 정부가 군대와 치안대의 행동을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의미였다.

1934년 10월, 아스투리아스 혁명이 실패하고 나서 치안대 대원들이 체포한 반란자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좌파에서도 지각 있는 사람들은 이 반란을 엄청난 재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급진 투사들, 특히 라르고 카바예로 같은 사람들에게 반란은 마치 마약에 취한 것과 같은 혁명의 열정을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반면에 우파에게 반란은 칼보 소텔로가 주장한 것처럼 오직 국가의 중추인 군대만이 혁명적 상황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보루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반란은 국가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스페인 민주주의에 치명타였다. 그 같은 폭력적 반란이 골수 우파뿐 아니라 중도파까지도 깜짝 놀라게 해따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보수 세력에게 이 반란은 이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창출하려는 또 다른 시도를 막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신념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라르고 카바예로는 나는 계급 투쟁 없는 공화국을 원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한 계급이 사라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아스투리아스로 인해 보수 세력은 이제 러시아 혁명 이후의 대공포와 부르주아를 절멸하겠다는 레닌의 결심을 굳이 상기할 필요가 없었다.

10월 혁명의 패배로 카탈루냐 자치법 중지, 좌파 성향의 도시협의회 해체, 급진공화당과 자치우익연합 동맹 등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자치우익연합은 레룩스 정부에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의회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의석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힐 로블레스는 교육 문제에서 교회의 역할을 제한한 헌법을 개정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서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는데 레룩스와 급진공화당 사람들이 적어도 교회에 반대한다는 원칙만은 어떻게든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서 정부가 위기에 빠진 데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알칼라 사모라 대통령이 헌법에 보장된 자신의 특권을 이용하여 곤살레스 페냐의 사형 선고를 감형하기로 했을 때 자치우익연합 지도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레룩스는 다시 한 번 내각을 구성해야 했고, 이번에는 자치우익연합에서 5명이 내각에 참여했다. 힐 로블레스는 육군부 장관을 맡은 다음 팡홀(Fanjul) 장군을 차관으로, 프랑코를 참모부장으로, 고데드 장군을 공군 총사령관으로, 몰라 장군을 모로코 주둔 사령관으로 각각 임명했다

팡홀 장군


고데드 장군. 프랑코와 함께 군부 우파를 대표하는 군인이었지만 내전 초기 공화파에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새 정부는 예수회가 과거에 몰수당한 재산을 돌려주고, 대귀족들에게도 전에 몰수당한 토지를 보상해주는 등 몇 가지 사안에서 공화국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정부는 또한 농업 개혁과 공교육 개혁을 중단했다. 한쪽에서는 공화주의 좌파가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193412월 아사냐는 10월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몇 달 후 아사냐는 좌파와, 세 개의 중도파 정당인 공화좌파, 공화연합, 전국공화당 간의 협약을 이끌어냈다. 19353월 아사냐는 의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중 집회를 이끌었다. 마드리드에서는 3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아사냐는 대중 연설을 통해 이듬해 2월에 열린 총선에서 좌파에게 승리를 안겨줄 좌파 선거 연합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대중 집회에서 연설하는 마누엘 아사냐


한편 그 무렵 사회주의자들은 심각하게 분열했다. 10월 혁명 중에 망명하여 그때까지 파리에 머물던 프리에토는 카바예로파와 절연을 선언하고 다시 한 번 아사냐와 제휴를 시도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11월에 출옥했는데, 그는 감옥에서 레닌의 저서들을 독파하고, 프랑스 코민테른의 대표 자크 뒤클로(Jacques Duclos)의 방문을 받은 이후로 전보다 더 볼셰비키 쪽으로 기울었다. 반란 지도자들은 뜻밖에도 너그러운 대접을 받았다.

자크 뒤클로


자치우익연합과 레룩스가 이끄는 급진공화당 연합 세력은 1935년 말 정치적 추문으로 결국 좌절했다. 10월에 암거래 도박 추문이 발생했다. 2명의 네덜란드 사업가 스트라우스(Strauss)와 펄(Perl)은 룰렛 게임의 특허권을 따내 스페인에 도입하려고 했다. 그런데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체제 이후 스페인에서는 사행성 게임이 금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뇌물을 써서 허가를 받아내려고 했다. 이 뇌물 공여 사건에 레룩스의 양자 아우렐리오 같은 급진당 인사들이 연루되었다. 이를 이용하여 공화국 대통령은 레룩스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호아킨 차파프리에타(Joaquin Chapaprieta)에게 새 정부 구성을 맡겼다. 그러나 그 다음달 또 한 번 부패 추문이 터졌다. 사업가 안토니오 타야(Antonio Taya)가 뇌물을 써서 정부 발주 계약을 따낸 것이다. 그 일은 급진공화당 전체에 마지막 일격이 되었다.

암거래 도박 추문을 보도한 신문. 사진의 인물은 네델란드 사업가 스트라우스


호아킨 차파프리에타


힐 로블레스는 이제 자신이 직접 정부를 맡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현실화하기 위해 차파프리에타에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실수로 밝혀졌다. 힐 로블레스를 싫어하고 대규모 중도 성향의 당을 출범시키고 싶어했던 대통령 알칼라 사모라는 자신이 신뢰하던 전임 카탈루냐 주장관 마누엘 포르텔라 바야다레스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매우 취약한 상태임을 잠시 망각한 알칼라 사모라는 공화제 민주주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들이 너무나 격렬하게 충돌해서 갈등의 힘들이 의회 안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마누엘 포르텔라 바야다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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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titanis | 작성시간 18.04.23 아스투리아스 혁명이 가지는 의미가 크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공황상태에 빠져 아름다운 오비에도를 불바다로 만드려 했던 '혁명군' 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 작성자Histotius | 작성시간 18.04.25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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