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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2차 대전 전투기 에이스, 북유럽의 강자 일마리 유틸라이넨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6.23|조회수628 목록 댓글 4


2차 대전 에이스 중에서도 매우 유명한 인물이죠.



핀란드는 전투기 갯수가 대전기간 동안 150대를 넘긴적이 없는데 1,800여대가 넘는 소련 전투기를 격추했다고 합니다. 게중에서도 90대를 돌파한 슈퍼 에이스, 그리고 적기에게 단 한번도 격추 당하지 않은 인물은 더더욱 드뭅니다.


1914년 2월 21일에 태어난 유틸라이넨은, 아버지가 두 다리를 잃은 장애인 이었던 탓에 힘들게 살았습니다. 또래들처럼 비행전과 공중전에 동경을 가졌고, 1차 대전 최고의 에이스였던 "붉은 남작" 만프레드 리히트호펜의 '붉은 전투기의 조종사'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행기를 구경하기도 힘들었지만 하늘에 대한 열망을 늘 가지고 있었죠.


1932년, 18세가 된 유틸라이넨은 군에 입대했습니다. 기계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 무전병이 되었지만, 조종사의 꿈이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2년동안 복무하며 열심히 돈을 모으고, 이를 탈탈 털어 민간 조종학교를 다니다가 마침내 조종사 자격증을 얻게 됬습니다. 조종사 자격증과 무선 자격증을 토대로 1936년 마침내 꿈꾸던 공군에 지원했습니다.


핀란드에서 당시에 조종사 자격증,  무선 자격증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 드물었기에 당장 조종사 훈련과정에 선임으로 입소했죠. 그리고 훈련 과정부터 비행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유틸라이넨은 별 다른 잘못도 없이 4개월의 훈련 과정 중 4/1 이상을 영창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유틸라이넨 본인이 잘못한것은 1주일 치 정도였는데, 사고를 피운게 아니라 규정 이하의 저공비행을 했다는게 이유였습니다. 자격증에 군경력 등으로 훈련소의 선임이었던 탓에, 다른 교육생들의 음주와 같은 문제까지 유틸라이넨의 책임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유틸라이넨 본인은 담배를 안 피웠고, 술도 절제했습니다.



그리고 훈련과정이 끝나기는 했지만, 핀란드 공군은 워낙 좁쌀만해서 전투기도 드물었죠. 부사관이었던 유틸라이넨은 한동안 정찰기만 몰았습니다. 그러다가 1939년 3월 드디어 전투기에 탑승하게 됩니다.


유틸라이넨은 곧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이미 정찰비행대 시절부터 우수한 조종사로 인정을 받았고, 곧 조종술 뿐만 아니라 사격술도 뛰어나 부대 최고의 조종사로 꼽혔습니다. 공중전 전술의 이해에도 탁월 했구요. 다만 북유럽의 조용한 나라에서 이런 능력이 발휘될 기회가 올것 같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먹구름은 핀란드에도 닥쳐왔습니다.



1939년 겨울, 스탈린은 터무니없는 요구끝에 핀란드를 침략해습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묵인하는 대가로 폴란드의 절반과 발트 3국, 그리고 핀란드를 자신의 영역으로 먹어치워도 방해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스탈린은 발트 3국을 간단하게 제압한 뒤 핀란드로 침공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밀고들어가기만 하면 며칠 만에 손들 것 같던 핀란드는 거꾸로 소련군 수십만 명을 삼키는 지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핀란드의 숲 속에서 신출귀물하는 기습에 혹독한 추위가 발목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핀란드 공군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본래 예상대로라면 개전 초기에 붕괴되어야 했지만, 핀란드 전투기들은 무너지기를 거부했습니다.


유틸라이넨도 이 "겨울전쟁" 동안 11차례 출격해서 2대의 전투기를 격추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압도적 열세였던 핀란드의 패배로 끝나버렸고, 수많은 피해에도 수십만에 달하는 엄청난 지원군을 계속해서 파견하는 스탈린이 핀란드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전쟁 배상을 명목으로 국경지대 등을 떼어갔지만, 핀란드의 군대에는 손을 대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핀란드는 미국, 영국, 독일 등으로부터 무기를 도입합니다.



형편없는 전투기를 몰던 유틸라이넨도 미국제의 브루스터 F24 '버팔로' 로 기종을 바꾸었습니다. 이것도 구식은 구식이지만 그 이전에 비하면야 훨씬 좋았습니다.


버팔로


설욕을 위해 훈련을 계속하던 핀란드 공군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와았습니다. 1941년 6월, 독일군이 대대적으로 소련에 쳐들어가자 핀란드 역시 조국 영토 수복을 위해 소련을 공격한 것입니다.


소련군이 힘없이 무너지자 핀란드 군은 레닌그라드 가까이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핀란드 전투기 조종사들도 대전과를 기록해서, 1941년 유틸라이넨은 한해동안 13대의 적기를 격추했고 다음해에는 21대의 적기를 격추해 핀란드의 최고 훈장인 만네르하임 십자상을 받았습니다. 유틸라이넨을 비롯해 그가 소속된 제24중대 제3편대에는 유틸라이넨을 포함해 세 명이나 이 훈장을 받았고, 그 덕분에 이 편대는‘ 기사 편대(Knight Flight)’ 라고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버팔로를 몰던 핀란드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능력 이상인 비행기들을 상대하면서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I-16, MiG, Lagg, 영국제 허리케인, 스팟파이어, 미국제 P0-40, P-39 등 온갖 기종의 전투기를 격추했지만 갈수록 높아지는 적기의 성능과 조종사들의 기량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연습용으로나 쓰이는 버팔로로 이 정도 전과를 거두는것도 기적이었습니다.


1943년 3월, 유틸라이넨은 마침내 진정한 전투기를 얻었습니다. Me109 였습니다. 유틸라이넨은 '신세계'를 경험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버팔로가 신사라면, 매서슈미트는 살인 기계다."


그리고 살인 기계를 잡은 유틸라이넨은 아직 완전히 기종이 손에 익지도 않았지만 1943년에만 19대의 적기를 격추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엔 44년에는 무려 40여대를 단번에 격추해버렸습니다.


유틸라이넨은 뛰어난 시력과 관찰력을 가졌고, 적기를 놓치는 일도 적었습니다. 용감하면서도 경솔하지 않아 전투중에도 종종 6시 방향을 살펴보며 후방을 주시했습니다. 다른 방향에서도 적기가 오는 것을 거의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버팔로보다 압도적으로 빠른 가속과 상승력을 가진 매서슈미트는 안성맞춤이었고, 또 20mm 기관포와 우수한 조존기는 먼 거리에서도 짦은 사격으로 적을 격추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미 44년이면 소련 공군이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독일 공군을 밀어낼 수 있게 성장했지만, 이 시점에 40대를 격추했다는것은 그가 얼마나 Me-109와 죽이 잘 맞는지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소련군과 싸우면서도 감정에 휩싸여 돌진해 간 일이 없고, 적으로서 싸우면서도 소련 조종사들을 인간적으로 증오하진 않았습니다.


1942년 3월, 그는 소련의 MiG-3와 교전을 벌인 끝에 소련 전투기를 불시착 시켰습니다. 보통 영국 조종사들은 종종 이때 기관총 세레를 퍼붓었으나, 유틸라이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소련군 조종사가 유틸라이넨에게 손을 흔들자, 그는 답례로 한 바퀴 돌고 날개를 좌우로 흔든 뒤 기지로 돌아갔습니다. 아직 신사도가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1943년 9월 말, 유틸라이넨과 Me 109 편대는 소련군 전투기 편대와 마주쳤습니다. 유틸라이넨은 순식간에 3대를 격추했지만, 곧 적기의 추적을 받았습니다. La-5 1대가 6시 방향에 접근한 것입니다. 워낙 평소에 경계하던 버릇이 있어 공격은 피해 도주했지만, 꼬리를 문 적기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주무장이던 20mm 기관포탄은 3대의 적기를 쓰러뜨리면서 바닥이 났습니다.



편대로부터 멀어져 1:1 대결이 시작된 유틸라이넨과 La-5의 추격전은 곧 태양을 향한 달음박직이 되었습니다. 유틸라이넨은 보다 높은 상승력을 가진 Me-109의 특징을 이용, 적기를 따돌리려 했습니다. 그리고 예상이 들어맞았습니다.


Me-109를 쫓아 급상승을 계속하던 La-5는 결국 균형을 잃었고, 제 자세를 찾느라 안간힘을 썻습니다. 그 즉시 유틸라이넨은 내려가면서 몇발 남은 기관포탄을 모두 쏘아부었지만, 명중했는데도 La-5는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La-5는 도망치느라 급히 기수를 올렸고, 유틸라이넨 역시 깜짝 놀라 급히 상승했습니다. 그런데 그 즉시 두 명모두 급기동하면서 "중력가속도"로 피가 쏠려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사고가 터지기 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유틸라이넨이었는데, 옆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친구들이 편대 비행을 하듯 두명의 비행기가 나란히 날고 있었습니다.


둘은 가만히 서로를 한참동안 바라보다, 곧 즐겁게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 친구처럼 손을 흔들어댔고, 곧 La-5의 조종사는 자신을 Me109의 아래쪽으로 옮겼습니다. 적기를 두고 일부러 고도를 낮춘것은 자살행위였지만, 그 짦은 사이에 친구같은 신뢰감이 생겼던 것입니다. 둘은 모두 무사히 기지로 돌아갔습니다.




유틸라이넨은 94기를 격추하면서 22대가 넘는 전투기 종류를 무너뜨렸지만, 그가 가장 좋아했던 기록은 자신의 요기들은 철저하게 지켜주었다는 것입니다. 유틸라이넨의 요기가 된다는것은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다는 소리였고, 곧 핀란드 공군에서는 유틸라이넨의 요기를 맡기 위해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위험에서도 유틸라이넨은 요기가 적기의 추격을 받으면 반드시 달려들어 구해내었습니다.


94대의 스코어. 하지만 외딴 북유럽의 하늘에서는 종종 기록되지 않은 승리가 있었기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최소한 30대는 추가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틸라이네는 단 한번도 적기에게 격추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단 한번, 정찰 중에 적 대공사격에 맞아 격추될 뻔한게 고작으로, 공중전에서는 가히 천하무적이었습니다. 수준이 떨어지는 기체에서 당대 최고 기종까지 골고루 무너뜨렸습니다. 이런 유틸라이넨은 핀란드 공군에선 영웅이었고, 소련에서도 그를 높이 여겨 경외할 정도였습니다.



소련과의 휴전이 벌어지고, 소련 공군 전투기 편대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내린 소련 장군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유틸라이넨에게 달려가 한참이나 굳은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누구보다 훌륭한 조종사를 만나고 싶었소."


적과 아군 사이에서 모두 경외의 대상이 되고 전설이 된 유틸라이넨은 전쟁이 끝나자 마자 민간인으로 되돌아가 편안하게 생활했습니다. 물론 비행에 대한 어린 시절의 열정은 잃은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군에서 퇴역한 영국제 모스 연습기 한대를 불하받은 뒤, 수리해서 핀란드 전역의 하늘을 누볐습니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핀란드 최고훈장을 두 번이나 받은 불세출의 영웅과 함께 비행하겠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비행으로 영웅이 된 그는 곧 비행으로 자신과 가족의 삶을 부양 할 수 있었고, 1956년에는 핀란드의 베스트셀러가 된 자신의 회고록을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 마침내 84세의 일기로 이 위대한 조종사는 천국으로 영원한 비행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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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평범한삶 | 작성시간 12.06.23 핀란드에 생각해보니 유명한 저격수도 있지 않았나요? 참호 위로 나온 손가락을 날려 버렸다는....??
  • 답댓글 작성자明智光秀 | 작성시간 12.06.23 지금의 핀란드를 만든 용자들.
    (근데 노키아가 너무 맥없이 무너지고 있어;;;)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 작성시간 12.06.23 시모 하이카 말씀하시는 듯
  • 답댓글 작성자다스라이히 | 작성시간 12.06.26 제가 아는 이름으로는 시모 하이아;;;; 으음;; 발음상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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