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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2차 대전의 에이스, 대전 사상 최다 352대 격추 기록의 전설적인 에리히 하르트만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14|조회수762 목록 댓글 2





참 순진무구하게 생긴 청년



1922년 4월 19일, 독일의 바이자흐 지방에서 태어난 한 소년의 이름은 에리히 하르트만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습니다. 부유하고 평온한 생애를 보낼것 같았던 소년은, 뜻밖에도 새로운 기회를 찾은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떠나 한동안 그곳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하지만 1927년 이후 장개석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 매우 격렬해지며 중국은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었습니다. 위기를 느낀 가족은 1929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독일로 말입니다. 여기서 소년 하르트만은 새로운 모험에 눈을 떴습니다.


하르트만의 어머니 ─ 하르트만 부인은 모험을 좋아했고, 2인승 경비행기까지 가진 아마추어 조종사였습니다. 일요일이 되면 그녀는 아들들을 데리고 독일 남부의 하늘을 누볐습니다. 비록 1932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비행기를 팔아야 했지만, 꼬마 하르트만은 이미 비행에 대한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1933년, 나치당이 독일을 장악하고 전국에 비행 클럽과 글라이더 클럽이 대대적으로 개설되었습니다. 이는 장래의 조종사 양성을 위한 나치의 계략이었지만, 어찌되었던 덕택에 하르트만의 어머니는 글라이더 클럽을 만들었고, 1937년 소년 하르트만은 글라이더 조종사 자격을 넘어 나치가 조직한 소년단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의 글라이더 비행교관 자격까지 따냈습니다.



그러나 비행이면 몰라도 학업에는 별다른 소질을 보여주지 못한 하르트만이었는데, 무엇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생활을 했던 그는 군대식의 엄격한 중학교에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유로운 분위기의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학교에 보내 좀 더 숨통은 튀었지만, 학업에 미진한것은 여전했습니다. 그가 꿈꾸는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지나고, 1940년 하르트만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독일의 공군에 지원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연전연승을 거듭했고, 어차피 군에 입대할 요량이면 자기가 좋아하는 공군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히틀러 유겐트의 글라이더 교관 자격까지 있는지라, 조종사 훈련 코스를 밞게 되었고, 1년간 힘든 훈련을 거치고 나서 드디어 자신의 비행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름하야 매서슈미트 Me109.


그리고 1942년 3월에는 소위로 임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갓 훈련을 마친 이 풋내기 조종사는 자신감이 과잉이었고, 덕분에 여러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1942년 8월에는 사격훈련을 끝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다른 비행기로 날아가 온갖 곡예비행을 하며 비행장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고는 귀환했습니다. 


덕분에 1주일간 막사에 갇히는 벌을 받은 하르트만은, 이 기간동안 조용히 장래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했습니다.



길게 보면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만, 실제적은 영향은 훨씬 빠르게 일어났습니다. 하르트만이 막사에 들어간 첫날, 그의 비행기를 몰고 가던 다른 조종사는 곧바로 추락해 죽었던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이런저런 곡절끝에 이 말썽쟁이는 JG52, 즉 제52전투비행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소련 전선에서 연일 엄청난 격추 세계신기록을 경신해가는 전설적인 부대였고, 이곳에 배치되는것은 하르트만의 꿈이기도 했지만 그곳까지 가는것만도 온갖 사고의 연속이었습니다.


폴란드의 크라코프에 있는 독일 공군의 보급 비행장에 도착한 하르트만은 그곳에서 새로운 Me109 전투기를 타고 JG52가 있는 카프카스까지 날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Me109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대신 Ju87'슈투카' 급강하폭격기를 타고 가는것이 어떠냐는 제안이 왔고, 슈투카를 조종한 경험은 없지만 어차피 도착해서 매서슈미트를 타면 되는데다 비행기는 다 똑같다는 생각에 하르트만은 제안에 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몰고 보니 하르트만은 슈투카를 조종할 수 없었습니다. 활주로를 타고 똑바로 가야 할 비행기가 자꾸 오른쪽으로 꺾이던 것입니다. 결국 하늘을 날기는 커녕 슈투카는 관제사무실로 쓰이던 오두막에 시원하게 들이박고 맙니다.


천만 다행으로 사람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본래대로라면 그는 이때 조종사 자격증 마저 빼앗겼을 겁니다. 하지만 워낙 조종사는 만성적으로 부족한 탓에 자격은 지켜내었습니다. 만일 이때 조종사 자격증을 잃었다면 훗날의 그는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사고뭉치 풋내기는 폭격기도 아닌 수송기로 카프카스에 도착했습니다. 조종은 물론 다른 조종사가 했습니다.




이런 말썽끝에 카프카스에 있는 JG52의 제3비행중대에 배속된 하르트만은 에두아르트 로스만 준위의 요기 조종사로 배속되어습니다. 로스만은 이미 무려 80대의 격추 기록을 가진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도착했던 중국만큼이나 낯선 카프카스에서 생활을 시작합니다.


1942년 10월 14일, 마침내 하르트만은 생에 최초로 공중전 경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솔다츠카야의 비포장 활주로를 넘어 날아오른 하르트만의 임무는 선배들과 함께 테렉 강을 따라 날아가며 적기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동료들은 모두 세계를 통틀어도 가장 많은 실전경험을 가진 베테랑들이었고, 그들 사이에서 이 애송이 조종사는 진짜 적기가 나오더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대의 일류신 IL-2 지상 폭격기가 나타났습니다. 하르트만과 그를 이끄는 고참이 탄 2대의 독일 매서슈미트는 이 손쉬운 상대를 처리하기 위해 급강하했습니다.


간단한 상대였고, 당연히 금방 무찔러야 했지만, 무언가 귀신이 들렸는지 하르트만은 전투기도 아닌 지상폭격기를 상대로 빗맞쳤고, 두번째 공격을 위해 접근하는 순간 이번에는 IL-2를 엄호하던 소련군 전투기가 나타났습니다.


하르트만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구름 속으로 달아났는데, 고참인 로스만이 탄 Me-109가 어디갔는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도 안보였습니다. 


부대에서 이탈해서 이렇게 두려움에 떨던 애송이 조종사의 뒤를 따라 다른 전투기들이 달려왔습니다. 겁을 집어 먹은 하르트만은 전속력으로 도망쳤고, 몇분간 계속 도망친 끝에 적을 따돌리는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기판이 빨간불을 내며 번쩍거리는 것입니다.


전투기는 5분도 안되어 엔진이 꺼졌고, 하르트만은 카프카스의 평야에 비행기를 불시착 시켰습니다. 운 좋게 독일군 행렬 옆에 창륙한 그는 육군의 차를 얻어 타고 기지로 도착했습니다. 물론 기지에서는 이 멍청이에게 신랄하게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 멍청한 놈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는 알아?"




적기를 놓친 것은, 풋내리가 그렇다고 쳐도, 겁에 질려 아무 말도 없이 동료들도 놔두고 떨어져버린 것이 첫번째 실수였습니다. 게다가, 사실 하르트만이 구름 속에서 보고 겁에 질려 달아났던 전투기가 사실 그의 아군이었던 것입니다.


로스만은 계속해서 하르트만에게 적이 아니라고, 돌아오라고 무전을 했지만 겁에 질려 멘탈이 붕괴된 하르트만은 듣지도 못했고, 연료를 죄다 소모해서 불시착해서 멀쩡한 전투기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한심한 모습은 다 보였고, 이 멍텅구리는 3일 동안 비행을 금지당했습니다. 그리고 비행이 허가된 후에도 로스만을 따라 철저하게 행동했습니다.



멍청한 짓은 다 저지른 하르트만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로스만을 멘토로 해서 잘 관찰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공중전을 펼쳐 성공을 거두는지, 어떻게나 80기나 되는 적기를 격추하고도 무사한지. 로스만은 속도와 기습효과를 살리는 전술이 주특기였고, 하르트만은 출격에서 돌아올때마다 이런 점을 연구해서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 있게 노력했습니다.



1942년 11월 5일, 하르트만은 3대의 다른 Me109와 함께 19대의 IL-2 공격기 편대와 이를 엄호하는 10대의 LaGG3 전투기를 요격하러 출동했습니다.


적 전투기의 방어망을 뚫고 하르트만과 그의 요기는 저공으로 비행하는 IL-2들에 접근했습니다. 하르트만은 맨 왼쪽의 적기를 표적으로 삼고는, 100M도 채 안되는 근거리까지 접근 한뒤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쉽게 박살이 나진 않았지만 계속 공격을 퍼붓은 결과 적기는 연기를 내뿜으면서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운이 없으면 이렇게도 되는지, 적기에서 날아온 파편이 하르트만의 기체를 강타해 그의 Me109도 검은 연기를 뿜으며 고도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하르트만은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독일군 기지에 불시착했습니다.


그는 또다시 육군의 차를 얻어타고 기지에 왔지만, 기지에선 아무도 하르트만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말썽만 일으키던 애송이가 드디어 첫 전과를 올리고 침착하게 귀환하는것을 동료들 모두가 축하했습니다.


1943년 3월까지 하르트만은 4대를 더 격추했고, 에이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두달 뒤에는 기록이 17대까지 치솟았습니다. 그런데 이 17대 격추기록이 그의 최후의 기록이 될뻔했습니다. 17대 째를 처리한 후 하르트만의 기체가 적기와 충돌해버린 것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이번에도 운이 좋게 그는 독일군 지역으로 날아와 불시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한달 동안 독일 본토로 돌아가 요양하면서 휴가를 했는데, 그동안 그는 마법에라도 걸렸는지 휴가가 끝난 후부터 기록 갱신이 갑자기 급가속이 걸렸습니다.


7월 5일, 단 하루에 하르트만은 4대를 격추했고, 이틀 뒤는 또 7대를 격추했습니다. 그리고 1943년 8월 3일에 이르면 무려 50대를 격추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는 독일 공군이 완연한 수세로 바뀐 탓이 컸습니다. 하늘에서도 소련군은 이제 공세를 가했고, 본래 소련군 전투기들을 사냥하며 스코어를 올리던 독일 에이스들이지만 이제는 코제두프를 비롯한 소련 에이스들이 독일 공군을 사냥하며 스코어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치열해지자 독일 공군은 계속해서 출격 할 수밖에 없었고, 하르트만은 심지어 하루에 4번 출격하는 것을 보통으로 알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잦은 출격을 감안하더라도 하르트만의 페이스는 경이로웠습니다. 50대의 기록은 불과 이틀뒤에 60대로 증가했고, 2주일 뒤에는 1차 대전 최고의 에이스인 붉은 남자, 만프레드 리히트호펜의 80대에 도달했습니다. 다시 두달 뒤인 10월에는 마침내 148대까지 이르러 기사 철십사장을 수여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훈장은 2년전이면 50대의 격추로 얻어지는 것이었는데, 하르트만 뿐만 아니라 다른 독일의 에이스들도 맹렬한 기세로 스코어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 1943년의 경이적인 전과 동안 하르트만은 수 차례 죽을 위기를 넘겼습니다. 언제나 적기까지 멀어야 100m 가까이로 수십미터 정도의 짦은 거리까지 접근해 사격을 퍼붓는 통에 적기의 파편을 뒤집어 써서 기체는 손상을 입었습니다. 특히 위험했던 것은 8월 19일이었는데, 이날 하르트만과 동료들은 40여 대의 IL-2 편대를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고, 하르트만도 2대를 격추했지만 타격을 입어 이번에도 불시착해버렸습니다.


하르트만은 간신히 조종석에서 기어나왔고, 마침 독일군 트럭이 다가오는것을 보고 안도했습니다. 그런데 트럭이 다가오자 하르트만의 안도는 경악으로 바뀌었습니다. 트럭에 타고 있던 것은 소련군이었습니다!




하르트만은 소련군에 붙들려 트럭에 실렸고, 이 트럭은 동쪽의 포로수용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만약 그대로 포로수용소로 갔다면 심각한 대접을 받았겠지만, 마침 하늘에 독일 전투기들이 나타나타 트럭은 급정거했습니다.


하르트만은 즉시 자신을 감시하던 소련군의 배에 주먹을 먹였고, 사람보다 큰 해바라기가 울창한 들판으로 달아났습니다. 소련군은 그를 잡기 위해 총을 쏘아대었지만 계속 달아난 끝에 마침내 그들의 추격을 뿌리치는데 성공합니다.


얼마 뒤 서쪽으로 걸어간 하르트만이었지만, 걸어도 걸어도 소련군 뿐이었습니다. 그는 몸을 숨기고는 어둠이 깔릴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대로 머물던 하르트만은 한 무리의 소련군이 걸어가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독일군 기지로 공격을 가는 모양새였습니다. 하르트만은 그들을 몰래 따라갔고, 예상대로 소련군은 독일군 진지에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렇지만 반격이 막강해 소련군은 흩어졌고, 기쁨에 찬 하르트만은 기지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기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독일군 역시 적의 공격을 격퇴한 후 바로 후퇴한 것입니다. 낙심했지만 서쪽으로 다시 두시간 가량 걸어가다보니 갑자기 총성이 일었습니다. 하르트만은 총에 맞았지만, 다행히 바지를 뚫고 지나갔을뿐 상처는 입지 않았습니다.


"쏘지 마시오! 쏘지 마시오! 아군입니다! 나는 독일군입니다!"


독일군에게 붙들리고 하르트만은 자신의 신원을 밝혀 간신히 살아났는데, 그 순간 또다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르트만은 소총을 들고 육군과 함께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싸웠습니다. 결국 모든 공세를 저지하고 다음날이 되서야 그는 부대로 귀환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모험과 150대에 이르는 그의 격추기록은, 곧 독일과 소련 양쪽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독일에서는 그를 다른 에이스 파일럿들 처럼 선전의 도구로 사용했고, 소련에서는 하르트만의 무전 콜사인인 카라야 1호, 나중에는 '검은 악마' 라는 별명이 타도대상 1호가 되었습니다. 하르트만의 목에는 1만 루블의 현상금까지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현상금을 걸어도, 이제 소련군의 조종사들은 하르트만의 검은 Me109가 달아나면 검은 악마가 나타났다며 겁을 먹고 달아나버릴 뿐이었습니다. 역으로 하르트만 역시 적들이 달아나는 통에 1943년의 겨울 동안 스코어를 전혀 올리지 못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1944년 1월부터 다른 기체와 구분이 가질 않도록 색칠을 바꾸었고, 효과는 순식간에 드러났습니다. 그로부터 단 두달 동안 50여대의 적기를 격추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무선 콜사인은 계속 같아서 소련군은 그것을 감청해 적이 하르트만인지 아닌지를 파악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하르트만을 죽이려 했습니다.


1944년 2월 무렵에도 하르트만은 위태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기수를 붉게 칠한 Yak-9 전투기 1대가 거의 충돌할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하르트만은 5분간 달아나다가 순간적으로 적기의 아래쪽으로 피했고, 적기가 당황하는 사이 뒤로 부터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적기는 독일군 진영으로 떨어졌고, 적 조종사는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하르트만은 붙잡힌 적 조종사를 JG52로 초대해 이틀 동안 손님으로 대접한 뒤 포로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공군에 기사도가 남아있었습니다.


1944년 여름이 되자 JG52와 하르트만이 전과를 올리기는 1년전보다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Me109도 몇 차례의 개량은 걸쳤지만 소련군 역시 신형 전투기를 동원했고, 숫자도 압도적이었습니다. 지상과 공중 모두 이기는건 고사하고 막기 위한 전투도 어려운 형세가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하르트만의 격추 기록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출격할때마다 하르트만은 최소한 1대 씩은 격추했고, 어쩔때는 심지어 단 한번의 사격으로 무려 4기를 격추해버린 말도 안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4대의 IL-2 편대를 발견한 그는 가장 오른쪽의 적기를 쏴 맞추었는데, 맞은 적기가 옆으로 심하게 꺾으면서 도미노 현상이 발생, 4대 모두 지면에 떨어져 대폭발을 일으켜 버렸던 것입니다.


1944년 3월 2일에는 이제 단 하루에 10대를 격추했고, 그는 히틀러의 별장으로 초대되어 철십자장에 백엽 장식을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짦은 포상휴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3월 18일 귀환한 하르트만은 이제 부대가 소련에서 폴란드까지 쫒겨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JG52는 루마니아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에선 미국이 머스탱 기를 동원했고 하르트만은 그들과 겨루어볼만 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또다시 크림 반도에 대대적인 공세를 퍼붓기 위해서 이동했습니다.


크림 반도에서 하르트만은 두달만에 250대까지 전과를 올렸고, 7월 20일부터 9월 22일까지 한 달 동안에는 무려 32대를 여기에 더했습니다. 하르트만의 전과는 JG52의 대장인 게르트 바르크호른 소령과 맞멎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8월 23일, 하르트만은 단 하루만에 8대를 격추하며 바르크호른을 앞질러, 세계 최고의 격추왕에 등극했습니다.


이제 JG52,아니 독일 공군 전체는 하르트만이 과연 300대에 도달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열띤 내기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기의 결과는 고작 24시간만에 결판이 났습니다.


다음날, 단 하루에 하르트만은 10대의 적기를 격추하고, 300대 기록을 세워버렸습니다.




이제 하르트만은 전인미답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독일군은 더 이상 하르트만을 이대로 내버려 둘수 없다고 판단하고 상부에 보고해서 독일로 보냈습니다. 독일로 귀환한 그는 그야말로 영웅이 되어 히틀러로부터 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철십자장을 받았고, 고등학교 때부터의 연인 우르술라와 결혼했습니다. 각종 영화와 방송 모두에 출연해서 독일 최고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상부에서는 이런 홍보 효과가 있는 하르트만을 전방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르트만 본인은 이런 영웅 대접보다 전방에서 싸우기를 원했고, 결국 JG52로 다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JG52는 이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밀려났습니다.


마침내 이곳에서 하르트만은 미군의 비행기가 격돌하게 되었습니다. B-17, B-24 폭격기들은 체코의 표적에 연일 폭격을 가했고, 그들을 보호하는 엄호 전투기들과 독일 공군은 7,620m의 고공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하르트만은 이들을 상대로도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결국 1944년이 지나가고 1945년이 되면서 패배는 확실해졌습니다. 승패가 명확한 와중에 하르트만과 동료들은 조국의 패배를 단 1분이라도 늦추기 위해 지독한 혹사를 당하면서 전투를 계속했지만, 결국 1945년 5월 8일,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항복으로부터 몇 시간전, 하르트만은 1대의 Yak-11 전투기를 격추했습니다. 352대. 바야흐로 그는 인류 최대의 격추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패잔병에게 영광 따윈 없었습니다. 하르트만은 미군에게 항복했지만 오래지 않아 소련군에게 넘겨졌고, 전쟁 범죄자로 낙인 찍여 무려 10년간 지독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격추 기록을 세운 동료들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 목숨을 잃었고, 많은 동료들이 고문에 못이겨 전쟁 범죄자를 시인하고 소련의 선전활동에 동원되는 인형 신세가 되었지만 하르트만은 온갖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0년을 버틴 결과, 그는 넝마가 되서 간신히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조국은 돌아온 이 세계 최고, 최강의 에이스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르트만은 서독으로 귀환했고, 그곳에서 곧 새로 재건된 서독 공군에 입대했습니다. 비록 그가 타는 전투기는 과거의 숙적이었던 미국제의 제트 전투기였고, 또 10년동안 조종을 하지 못했지만 이 전설의 격추왕은 제트 시대에도 만만찮은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1955년부터 1970년대까지, 서독 공군의 전투조종사로 지낸 하르트만은 대령이 되어 제대했고, 평화로운 만년을 보내다가 199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르트만이 352대를 격추하면서 사용한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태양을 등지고, '적기가 당신 앞의 방풍창을 한가득 채울 정도' 로 뒤에 접근한 다음 있는 힘을 다해 화력을 퍼붓는 것입니다. 즉 절대로 빗맞을 수 없는 거리까지, 적이 반격하지 못할 거리까지 접근해서 사격을 가하는 일인데,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운 일입니다.


또 하르트만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시력이 있어 적이 자신을 발견하기보다 먼저 발견했고, 아군들보다 몇분 더 빨랐습니다. 하르트만은 "내가 격추한 적기의 80%는 격추당할 때에야 내가 뒤에 있는것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르트만이 가장 자랑스러워한건, 352대라는 전인미답의 격추기록이 아니었습니다. 

3년동안 852차례의 실전 출격. 그 동안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요기를 잃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 점을 이 전설의 격추왕은 그 어떤 격추전과보다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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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콤네누스황제 | 작성시간 12.07.16 대단하네요
  • 작성자Che_GueVaRa | 작성시간 12.07.22 저 기록이 깨질 일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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