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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신하들을 때려잡던 옹정제가 믿고 신뢰하던 측근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4.15|조회수1,596 목록 댓글 6


1. 이친왕 윤상


이친왕은 옹정제의 형제로 총리시무대신이었고 옹정제의 많은 신임을 받은 인물입니다.
본래 옹정제는 형제들과 사이가 전혀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옹정제에게 그들은 그저 경쟁자일 뿐이었고 개, 돼지라고 부르면서 멸시하도록 했죠.


그렇지만 이친왕은 자신을 낮추었고, 거기다 일까지 완벽하게 처리해서 옹정제로서는 보기 드물게 몇번이고 칭찬하며 자기 옆에 두었습니다.


윤상은 능력적인 면으로 봐도 대단했는데 옹정제가 즉위한지 3년만에 청나라의 은 보유량을 무려 7배를 증가시켰습니다. 1725년 베이징 근처에서 홍수가 나 무려 100만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수리 사무대신이 임명된 윤상은 수해 지구로 뛰어가 귀신같이 현황을 파악하고 물길을 일일히 측량하여 그림으로 기록해서, 옹정제에게 여러가지 안을 내어 관개 시절을 깨끗하게 정비했습니다.



이친왕에 대한 옹정제의 신임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친왕 윤상은 옹정제가 처리하기 힘든 복잡하고 피곤한 일을 다 척척 처리했고, 그러면서 내색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옹정제는 그에게 밑에서 들어오는 보고나 사람들을 모두 만날 권리를 주었죠. 즉 명나라로 따지면 아랫사람들의 보고를 받고 황제에게 전달하는 환관 같은 역할이었는데, 이친왕은 환관들같은 병폐를 부리지 않고 옹정제가 바라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었습니다. 너무 무서운 황제에게 함부로 말을 못 올리는 신하들도 이친왕에게는 편하게 속내를 털어놓았고, 이친왕을 통해 들은 그들의 제안을 옹정제는 심사숙고했습니다.


왕권이 엄청나게 강한  강희 - 옹정 시대에 청나라는 관리들이 붕당을 이루는것은 극도로 혐오해서 탄압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친왕을 중심으로 모이는것만은 옹정제도 눈을 감아주었습니다.




이친왕이 병으로 죽자 옹정제는 무려 사흘간이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있었습니다. 장례는 친히 집전했고, 황제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신하가 쓰지 못하는 피휘를 깨고 욘상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가 하면, 그 아들들도 두명이나 왕의 직위를 주면서 대우했습니다.


이친왕은 옹정제에게 있어 신하를 뛰어넘어서, 어쩌면 유일하게 속내까지 털어놓을만한 형제이자 친구였죠.




2. 악이태


악이태는 강희제 시절부터 관직에 있던 인물이지만, 정작 그때는 별 출세와 인연이 없어서 나이만 먹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악이태와 옹정제가 인연을 맺은 계기는 다음과 같았죠.


한참 강희제의 자식들이 차기 황제를 노리며 싸우던 당시, 옹정제 역시 드러나지 않게 움직이며 사람을 모으면서 악이태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익이태는 거절했습니다.


"왕자는 조정의 신하와 교분을 쌓아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황제가 된 옹정은 악이태의 그런 태도를 높이 여기고 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악이태는 현장 출동해서 막 부딫히면서 꼬인 일을 해결해가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큰 관점에서 정치를 볼 줄 알았습니다.



청나라는 자신들을 제외한 소수민족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특히 서남부의 묘족이 행패를 부리는게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악이태는 이 문제를 현지 소수민족에서 뽑은 관리들이 수탈이 너무 심한게 원인이라고 보았고, 이를 바꿔 중앙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도록 해서 성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을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죠.


또한 옹정에 대한 충성심도 뛰어났습니다. 1727년, 악이태는 새로운 운남의 순무가 된 주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상(옹정제)이 사람을 쓰는 법을 기상천외 하다고들 하지.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라네. 오직 지성을 다하고 황상의 뜻을 철저히 관철하면 중용 될 수 있네. 황상을 기만하지 않으면 큰 과오를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은, 만약 못된 꾀로 속이려 든다면 아무리 작은 죄라도 큰 벌을 받을 것이네. 나는 성실함과 능력으로 황흔을 받았네. 관망하고 눈치를 보는것은 부질 없는 일이야!"


옹정제는 이런 악이태에게 지대한 관심을 주어서, 악이태가 몸이 아프자 사람을 불러 수명을 점쳐(의외로 옹정제는 이쪽에 관심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악이태가 아직 한참 더 산다는 결과가 나오니 안심하는가 하면, 특별히 황제의 가마를 타고 가게 하기도 합니다.


건륭제는 이런 모습을 보고 훗날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악이태, 전문경, 이위는 선황께서 가장 칭찬을 한 인물들이네. 하지만 전문경은 이위만 못하고, 이위는 또 악이태만 못하네."




3. 장정옥



이 장정옥에 대한 신임이 더 남다른 이유가 장정옥은 만주족하곤 별 관련이 없는 한족 출신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한족 출신이지만 장정옥은 강희, 옹정, 건륭 3대에 걸쳐 요직을 담당한 인물이었죠.


장정옥은 옹정제가 즉위하기전부터 요직을 담당하고 있었고, 옹정제는 계속 그를 중용했습니다.

특히 그에게는 다른 신하들에게 없는 빼어난 문장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지를 작성할때 다른 신하들이 옹정제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던 반면에, 장정옥은 옹정제의 의도를 완벽히 파악해서 작성했는데, 그 속도도 대단했습니다. 문어체도 아닌 구어체로 옹정제가 말을 해도 바로 옆에서 거의 동일한 속도로 문어체로 글을 작성해서 나무랄데 없는 문장으로 탄생하게되었죠. 이건 옹정제의 다른 신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장정옥은 겸손하고 과묵했는데, 신하들이 개기는것을 정말 싫어하는 옹정제는 이 충실한 일꾼을 아주 마음에 들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수십년 동안 수많은 문서를 처리하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일하는데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장정옥이 아프다는 소리를 들은 옹정제는 뜬금없이 "팔이 아프다." 고 했습니다. 신하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장정옥이 아프니 나도 팔이 아프오."






4. 전문경


비록 서류상으로 많은 보고를 듣는다 해도, 직접 본것만 못하게 됩니다.옹정제는 중국의 명산인 화산으로 가는 길에 서북지방의 백성들이 가뭄으로 고난을 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더군다나 이 지역의 순무가 실상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옹정제는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전문경은 관료 사회의 "서로 대충 봐주고 넘어가기." 를 넘어서 바로 직언을 올리면서 옹정제의 신임을 사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전문경은 30년 동안 하급 관리로 구른 탓이라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들어오고 싶어했을 수도있습니다.


제발 큰 일을 맡을 기회만 있었으면, 하고 있던 전문경은 이제 하남의 순무로 한성의 대권을 장악하게 되자 물만난듯이 일을 벌였습니다. 뇌물수수 관행을 뿌리뽑고, 재정 적자를 해결하고 몰래 숨긴 토지를 찾아냈습니다, 하급 관리 일을 통해 실무 능력과 현장 상황도 이미 훤이 꿰고 있었죠.


자연히 이런 급진적인 개혁은 그 지역의 지주 계층의 커다란 반발을 샀는데, 사방에서 탄핵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옹정제는 전문경의 그런 면모를 아주 흥미로워 하며 믿어주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남성의 순무로 가장 오래 재직하는 기록을 남깁니다.


공직사회에서 전문경은 왕따였습니다. 개인적인 책임감이든, 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의 몸부림이든 그는 어찌되었건 당파나 기득권에 얾매이지 않고 죄다 처리했죠. 심지어 장정옥의 친동생이 죄를 짓자 뒷배경 다 무시하고 그를 처벌해서 장정옥을 불쾌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옹정제는 이런 전문경에게 이렇게 표현했죠.


"만약 전문경과 악이태를 얻지 못했다면 짐은 실로 하늘의 용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5. 이위

이위는 사실 과거제도로 합격한 관리는 아니고, 돈으로 관리가 되는 제도를 이용해서 관직 생활을 했지만 정작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게다가 이위는 별로 성격도 좋지가 못했습니다. 오만방자할뿐더러, 거칠기까지 했죠. 오죽하면 옹정제가 이렇게 말 할 정도였습니다.


"걔는 원래 그런데 뭘 새삼스럽게 그런걸로 또 까냐?"


그런데 아무 능력도 없는 인물에게 옹정제가 이렇게 관대한 태도를 보이질 않겠죠. 사실 관료로서의 능력으로 말하자면 이위는 그 부분에서도 썩 좋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깨끗한 청렴감과, 무엇보다 한번 밀어부칠때 앞뒤 잴것 없는 과감한 면이 옹정제의 맘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이위는 하급자면서 상급자를 마구 까고 다녔는데, 이 뒷배경에는 옹정제의 비호가 있었습니다. 이위를 이용해서 옹정제는 그들을 돌려서 비판을 했던 것이죠. 이위가 얼마나 관료 사회에서 개차반 취급을 받았는지, 이위는 여러 행정부에게 까이고 다녔죠.


예를 들자면 이위가 소금 관련 문제로 호부에 몇번이나 협조를 구했지만, 호부가 씹어버리면서 쩔쩔 매게 됬지요. 옹정제의 도움으로 협조는 간신히 얻어내었지만, 호부는 이위를 비웃을 의도로 일부러 문서에서 이위의 지위를 "염정" 즉 당나라때 소금을 전매하던 관리로 낮춰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위는 청렴했으며, 과감하기까지 했습니다. 옹정제가 지정은제를 확립할떄의 일입니다. 기득권인 향신 측은 대규모 시위 집회를 반복하며 정책에 반대를 했는데, 이위는 비난을 무릎쓰고 그들을 떄려잡으며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물론 지금 시각으로 보면 막장스럽지만 이 시기에 시위를 벌이던 계층은 "기득권 층" 이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진압하는것은 기득권 층과 척을 지는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옹정제에게 있어 이위는 믿음직한 호위병과도 같았죠. 이위에 대한 애정이 깊은 옹정제는 항상 이위에게 충고를 하면서 그 성질머리를 고쳐보려고도 했습니다. 무려 이위의 나이가 50이 되었는데 동네 어린이에게 하듯이 "성질을 죽여라." 라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친왕은 황족이고, 장정옥은 선황때부터 있었으니, 이위 - 전문경 - 악이태를 옹정제 시기의 3명신으로 봅니다. 옹정제가 윤계선이라는 인물에게 이들의 평가를 묻자 윤계선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신은 이위의 용감성을 배우고 싶으나, 거친 면은 배워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전문경에게는 근면성을 배워야 하지만 지나친 철저함은 또한 안될 일입니다. 악이태는 배울 점이 참으로 많지만, 괴팍함은 배우지 않아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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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Viduka | 작성시간 12.04.15 황제나 신하나 죽어나가겠네요...
  • 작성자본다충승 | 작성시간 12.04.15 1번째 이친왕 짤은 보보경심 짤인가요? ㅎ
  • 작성자의경 | 작성시간 12.04.15 우리나라에도 저런사람 안나오나...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2.04.16 일반적인 관료사회에서 큰일 맡는걸 좋아하는 사람자체가 드물죠. 출세에 안달하는 사람or포청천 같은 사람 아닌바에야........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12.05.30 뒤어난 황제 밑에 뛰어난 관료들이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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