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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영국의 역사(외전) : 폴커크 전투와 영웅의 몰락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8.09|조회수944 목록 댓글 2




1298년 4월,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원정을 논의하고 각종 원정 준비를 할 통치 본부를 요크에 설치하였다. 그가 이 원정에 심열을 기울이고 있다는것은 원정 지원을 위해 재무성과 법정이 런던에서 요크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통해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는 6월 25일까지 스코틀랜드 원정군이 록스버러에 집합하도록 명령하였다. 원정군은 3,000여명의 기병, 웨일즈에서 소집된 10,900여명의 보병, 잉글랜드에서 소집된 보병 14,800명 등 3만에 육박하는 굉장한 대군이었다. *1) 그리고 총지휘관은 잉글랜드의 왕이었다.


 잉글랜드군은 7월 11일에는 에딘버러 남쪽 2마일에 위치한 브레이드(Braid)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는 템플 리스톤(Temple Liston)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몇 가지 불행한 사건들로 인해 원정의 미래는 불확실 했다. 그는 버웍에서 온 배로부터 군량미를 보급 받을 계획을 세웠지만 불행하게도 역풍이 불어 군량미는 도착하지 못했다. 주력군은 식량 부족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했고, 웨일즈에서 징집된 보병 중의 일부는 굶어죽는 등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2)


 이 무렵 200배럴의 포도주가 도착하자, 에드워드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포도주를 배급하였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취한 웨일즈 보병들은 폭동을 일으켜 잉글랜드인 성직자 몇 명을 살해하는 참사를 저질렀고, 잉글랜드 기병이 폭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그들 중 80명에서 100명 정도는 사살되고 나머지는 도망하였다. *3) 웨일즈 병사들은 스코틀랜드 군에 붙을 기세를 보이며 위협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에드워드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태도와는 별개로 원정은 실패로 돌아갈 것처럼 보였다. *4)


 에드워드 1세는 우선 에딘버러로 철수하여 더 많은 보급품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바로 이때, 잉글랜드에 가담한 스코틀랜드 백작인 던바 백작 패트릭(Earl Patrick)과 앵구스 백작 길버트 움프라빌(Gillbert de Umfraville)은 결정적인 정보를 전하였다. 그들이 파견한 척후병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군은 잉글랜드의 야영지로부터 겨우 13마일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폴커크(Falkirk) 옆에 있는 칼렌더 숲(Wood of Callendar)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5) 이 정보가 모든것을 변화시켰다.


 마치 카이사르를 영광스러운 승리자에서 그저 그런 한 시대의 장군들 중 하나로 격하시킬 기회를 놓친 베르셍게토릭스(Vercingetorix)처럼, 윌리엄 웰레스가 잉글랜드 왕을 물러나게 할 기회를 놓치고 회전을 치룰 자세를 보인것은 의문이다. 잉글랜드 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오판하거나, 웨일즈 병사들의 소란이 그에게 전해져, 이들과 협력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윌리엄 웰레스가 그러한 판단을 내렸다면 상황을 너무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여겼던 것이다. 


 필승의 냄새를 맡은 잉글랜드 왕은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폴커크로 향하는 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7월 22일, 그들은 폴커크 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스코틀랜드 군대와 맞닥뜨렸다.


File:Falkirk1298(1).JPG



 윌리엄 웰레스 군단의 규모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어찌되었건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의 왕의 병사들보다 많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윌리엄 웰레스가 전력의 열세를 그복하기 위해 내놓은 수단은 역시 실트론이었다. 그는 창병을 4겹의 밀집형 방패 고리로 만든 전투 대형, 즉 고슴도치와 같은 전투 대형을 만들었다. 각 방패 고리 간의 공백은 궁사들을 배치하여 보완하였고, 이들의 후미에는 여러 백작들이 이끈 기병이 위치하였다. 군인들 사이에 있는 작은 늪지와 호수는 잉글랜드 중갑 기병의 위협으로부터 스코틀랜드 군을 보호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6) 


 그러나 잉글랜드 군의 기병 전력은 워낙에 압도적이었고, 스코틀랜드의 궁사(bowmen) 보다 훨씬 강력한 궁노수(crossbowmen)을 보유하고 있었다. 윌리엄 웰레스의 옆에는 빈약한 기병들이 있었지만, 그리 기대를 걸만한 요소는 되지 못하였다. 적수의 대처에 대해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기병을 600명씩 4개 여단으로 나누어 대응했다. 그 여단 중에 하나는 에드워드 자신이 지휘하고 있었다.


 양측의 기병전력이 처음 부딫혔을때, 백작들이 이끈 스코틀랜드의 기병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전쟁에서 도망쳤다. 양측의 전력이 그렇게 압도적으로 차이 나지 않았다면, 그들이 매수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워낙 전력상 차이가 심각했기에 그들이 도망친것 자체는 나무랄 것은 아니었다. 


File:Falkirk1298(2).JPG



 상대의 기병들만이라면 용감한 스코틀랜드 보병들은 어떻게 저항을 해볼 도리가 있었다. 그러나 웨일즈 궁병과 보병이 합동작전을 피면서 화살을 쏘는것에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빗발치는 화살 속에 4겹 대형의 스코틀랜드 군은 정지된 표적이나 다를 바 없었고, 제 아무리 용감한 전사들이라 할지라도 화살에 맞고서는 대형을 유지 할 수 없었다. 드디어 실트론의 대형이 무너지자 잉글랜드의 기사들은 눈을 번뜩이며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고, 이후의 전투는 그저 살육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싸움에서 윌리엄 웰레스는 한명의 로버트 브루스를 보았다. *7) 이 사람이 로버트 브루스 6세인지, 혹은 훗날 스코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불리게 되는 그 아들일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찌되었건 이 로버트 브루스는 윌리엄 웰레스의 군대를 공격하면서, "잉글랜드 왕의 세력에 맞서 무모하게 싸우고자 한 오만함" *8) 을 지적하였다. 윌리엄 웰레스는 이렇게 소리쳤다.


 "네가 태어난 땅에서 자유를 얻도록 자극한 여성스런 겁쟁이 같으니!" *8)


 윌리엄 웰레스와 몇몇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폴커크 성과 스털링 사이에 있는 토르 숲(Wood of Tor)으로 도피하여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폴커크 전투의 패배로 윌리엄 웰레스는 그의 군사적 명성을 상실하였고, 왕국의 보호자 직에서 사임하였다. '사임' 한 것이든 '내쫓긴' 것이든, 모양새의 차이일 뿐이지 이는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치열한 싸움 탓에 잉글랜드의 병사들은 2,000여명이 살해 당하였고 110마리의 말이 죽었지만 윌리엄 웰레스의 타격이 훨씬 심각했다.


 스코틀랜드 - 잉글랜드의 관계로 따지자면 폴커크 전투는 결정적이라고 할 만한 싸움은 아니었다. 이 전투 이후 1314년 베넥번 전투(Battle of Bannockburn)가 벌어지기 전까지 16년 동안 양국은 결전이라고 할만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윌리엄 웰레스와의 관계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웰레스는 귀족 공동체의 지도자처럼 혈연에 의한 세습적 지위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가 스코틀랜드를 이끌어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스털링 브릿지 전투에서 보여준 군사적 명셩의 덕택이었다. 따라서 그의 군사적 명성을 곤두박질 치게 만든 폴커크 전투의 패배 이후 상황이 급변한것은 이상할 것이 아니었다.


 윌리엄 웰레스가 일개 평민은 아니었지만, 귀족 공동체에 비하면 봉건적인 세습 지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거의 없었다. 그가 귀족 공동체의 압력을 받았을 가능성은 없지 않을 것이다. *10) 패배한 영웅이 된 그는 협력자를 구할 수 없었고, 그가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윌리엄 웰레스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으나, 그 길은 대단히 험난하고, 종국에는 이룰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다.


 


   
*1) Chronicle of Guisborough, pp. 324.

*2) Chronicle of Rishanger, p. 186.

*3) Chronicle of Lanercost, p. 192.

*4) Barrow, Robert Bruce, p. 131.

*5) Chronicle of Guisborough, pp. 326.  

*6)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119

*7) Chronicle of Guisborough, pp. 295.

*8) Chronicle of Fordun, pp. 323.

*9) Scituchronicon, p. 97

*10)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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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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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튜어니즘. | 작성시간 13.08.10 브레이브 하트의 그 내용이네요..흠.
  • 작성자raining278 | 작성시간 16.12.08 월레스는 싸우지 말아야 할때를 몰랐거나 정보전에서 밀린게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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