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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영국의 역사 : 백년전쟁의 첫번째 국면과 의회의 발달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8.25|조회수552 목록 댓글 2




 크레시 전투의 승리 이후 잉글랜드 군은 북 프랑스에서 우위를 확립했고, 에드워드는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하여 해안 지방을 점령해 나갔다. 그는 진격을 계속해 항구인 칼레를 포위했다. 칼레는 10개월 넘게 버티며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프랑스의 군주 필리프는 칼레 시민들을 돕지 못했고 칼레 시민들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결국 칼레의 시장을 포함한 시민대표 6명은 교수형을 각오하고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그들은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에드워드 3세 앞에 출두하였고, 낭만적인 기사 군주였던 에드워드는 그들의 희생정신에 감동하여 모두 사면함에 따라, 칼레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 이후 칼레는 200년 넘게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으며, 잉글랜드가 대륙으로 진출하는 주요 교두보가 되었다. *2)


 잉글랜드로 귀환한 에드워드는 호화로운 마상시합을 열어 승리를 기념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유럽에는 공포의 흑사병(黑死病)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사회에는 심각한 위기가 닥쳐왔고, 싸움을 계속할 형편이 되지 못한 양국은 휴전을 맺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한 흑사병은 1347년 이탈리아에 들어와 급속도로 유럽 대륙에 전파되었으며, 칼레에서 도시트로 도망해 온 피난민들에 의하여 1348년 8월 마침내 영국에도 상륙하였다. 이 병은 치사율이 매우 높고 병의 진행 속도가 대단히 빨라, 아침까지도 멀쩡했던 사람이 낮이 되기도 전에 죽어갔으며, 또한 남녀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닥쳐왔다.


 여름이 지나 기후가 서늘해지면서 병은 잠시 주축한듯 보였지만, 이듬해 봄이 되자 전보다 더 심하게 창궐했다. 도시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나 작은 마을들 역시 재앙을 면치 못했으며,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완전히 사라지기도 했다. 시체를 묻을 사람조차 없어 들개들이 주검을 뜯어 먹는 참상을 보았으며, 병자가 스스로 무덤을 파기까지 했다. 흑사병은 1361년, 1368년, 1375년에 다시 만연하였으며, 17세기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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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이 병은 격심한 인구 감소를 가져왔다. 1300년에 대략 400만 정도였던 잉글랜드의 인구는 1380년에는 200만 가량으로 줄어들었다. 인구가 이처럼 급격히 감소한 것이 온전히 흑사병 때문은 아니었는데, 흑사병이 있기 이전에 잉글랜드의 인구는 다른 역병이나 홍수, 흉작으로 이미 줄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사회의 변화도 일어나고 있었다. 다만 흑사병은 그러한 변화를 훨씬 빠르게 진행시켰다. 


 인구 감소는 농촌 경제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노동력은 부족해졌고, 토지에 매인 농노의 부담을 강화하는 직영지 경영은 14세기에 들어와 어려움에 닥쳤다. 장원의 영주들은 노역봉사를 더욱 강화해서 이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고, 되려 농노제의 강화는 농민들의 저항만 불러 일으켰다. 현재의 일자리에서 도망을 친다고 해도 사람을 구하는 곳은 어디든지 있었다.


 이렇게 되자 강화된 억압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은 심해졌고, 농민들을 붙들어 놓을 가장 효과적인 길은 농민들의 예속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영주들은 직영지의 경작을 포기하고 이를 경작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임대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으며, 대신 집사나 대리자가 이를 거두어서 수령하게 되었다. 노역봉사는 이제 화폐의 납부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12세기부터 시작했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크게 진척되었다.



한편, 에드워드는 흑사병의 공포에도 아랑 곧 하지 않고 궁정에서 요란한 주연으로 시간을 보냈다. 1350년 필리프가 죽고, 그의 아들 장(Jean)이 뒤를 이었으나 그는 사위 샤를 르 모베(Charles le Mauvais)에게 조종되고 있었다. 1355년 전쟁은 다시 재개되었고 두 갈래의 영국군 원정대는 대륙으로 건너갔다. 하나는 왕 자신의 지휘 아래 칼레로부터 진군하였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보르도에 있던 흑세자의 지휘하에 가스코뉴와 툴루즈로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듬해 1356년 흑태자는 푸아티에(Poitiers)에서 장이 이끄는 프랑스의 대군과 마주쳤다. 흑태자는 푸아티에의 모펠튜이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적을 상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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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가 벌어진 곳은 미오송 강과 클랭 강의 합류지점으로, 주변에 덤불과 늪지가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크레시 전투의 패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프랑스의 기사들은 여러차례 정면 공격을 하였으나 수렁에 빠져 꼼짝달삭 하지 못했다. 돌진하던 기사들은 또다시 잉글랜드 군의 장궁에 무참하게 희생되었고, 프랑스의 군주 장을 위시한 많은 귀족들은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하였다. *3) 


 장은 잉글랜드로 끌려가 몸값의 흥정 대상이 되었으며, 에드워드 3세는 의기양양하여 수많은 전리품을 싣고 돌아왔다. "잉글랜드 전체가 국왕의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가득 찼으며, 여인치고 몸에 무엇인가 장신구를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집에 좋은 리넨이나 장갑과 같은 전리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 라고 이야기될 정도였다.


 반대로 패전국 프랑스의 상황은 실로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흑사병이 만연하는 상황에서 지방은 황폐하여 농민들은 봉기했고, 영국군 병사들은 지방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자행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이를 수습해야할 국왕이 없어 정부는 혼란스러웠고, 정국을 이끈 프랑스의 왕세자는 나바르(Navarre) 당의 음모와 에티엔 마르셀(Etienne Marcel)이 이끈 삼부회(三部會) 앞에 무력했다.


푸아티에 전투가 끝난 후 프랑스에 생겨난 유량민 또는 도둑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용병 부대들도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약탈과 정부 관리들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는데, 1358년 보베지방에서 일어난 농민폭동이 그런 경우였다. 이 폭동은 순식간에 노르망디 - 일 드 프랑스 - 피카르디 - 상피뉴 등 북프랑스의 대부분에 파급되고 군인 출신인 기사 기욤 칼(Guillaume Cale)은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이 반란은 농민의 대표적인 이름이었던 '자크'를 집합명사와 한 호칭인 '자크리' 라는 말을 써서 '자크리의 난(Jacquerie)' 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자크리의 난은 파리의 일부 귀족들에게 지지를 얻었을 뿐 다른 여러 도시와의 제휴는 실패했고, 또 내부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다가 막상 정부군의 공세가 오자, 2만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완전히 진압되었다. 그나마 자크리의 난에 동조한 에티엔이 피살됨으로서 겨우 정치적 위기는 벗어났지만,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결국 1360년 브레티니(Bretigny)에서 평화를 위한 협의가 열려 영국과의 평화협상이 맺어졌고, 이 조약으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고 칼레와 퐁티외를 제외한 르와르 강 이북의 모든 땅에 대한 요구를 버리는 대신, 프와투 - 기엔 - 가스코뉴 - 리무쟁(Limousin) 등을 포함한 아키텐 전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양도받았다. 또한 장은 50만 파운드 *5) 의 몸값을 지불한다는 약속 아래 석방되었다. 대신 그의 아들들이 인질로 잡혔는데, 그 중 하나인 앙주 공 루이가 도주했고 50만 파운드의 액수가 너무나 과중하여 백성들의 부담이 될까 우려한 장은, 기사도 정신으로 런던으로 귀환해 1364년, 포로의 신분으로 영국 따에서 생을 마쳤다.    




하지만 위기의 프랑스에 즉위한 샤를 5세(Charles V of France)는 사려깊고 현명한 인물로, 신중하고 현실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징수세를 개혁함으로써 나라의 재정을 극적으로 안정시켰다. 또한 '확실한 승산이 생기기 전까지, 잉글랜드 군과의 전투는 피한다' 는 원칙으로, 현명한 전략가인 베르트랑 뒤 게클렝(Bertrand du Guesclin)을 최고의 원수로 중용하고 제독 장드 비앵을 기용하여 함대를 건조하는 등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한편 가스코뉴의 통치자인 흑태자는 1367년 프랑스와 옹맹한 트라스타마라(Trastamara)의 엔리케(Enrique)와 다툰 카스티야(castilla) 왕 페드로(Pedro)를 원조하기 위해 에스파냐로 진군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가스코뉴로 돌아왔다. 많은 전비로 인해 재정이 궁핍해진 흑태자는 새로운 호별세(戶別稅)를 징수함으로서 가스코뉴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여전히 프랑스 왕을 자신들의 군주로 여긴 가스코뉴인들은 흑태자를 샤를 5세에게 고발하였다. 파리의 고등법원에서 소환장을 받은 흑태자는 이를 거부했으며, 이에 대해 샤를은 아키텐 공령의 몰수를 선언했다. 이렇게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또다시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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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0년 흑태자는 잉글랜드 편에서 이탈한 리모즈의 주민 3,000여명을 학살했다. 여전히 그는 뛰어난 지휘관이었으나, 전세는 대체로 잉글랜드 군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이제 드디어 패배에서 교훈을 배웠으며, 유능한 왕 샤를과 뛰어난 장군 게클렝의 지휘하에 위험한 정규전을 피하고 게릴라 전술을 사용해 잉글랜드 군을 괴롭혔다. 또한 잉글랜드 군의 해군력은 이전보다 약화된것에 비하여, 프랑스 해군은 카스티야 선박들의 도움을 받아 이전보다 강력해졌다. 잉글랜드 군은 어디서나 고전했으며, 무엇보다 1371년 흑태자가 병을 얻어 잉글랜드로 귀환해야만 했다. *6)


 이 상황에서 에드워드 3세는 왕비가 죽은 후 탐욕스러운 정부 앨리스 페러스에 완전히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왕은 여자의 품에 빠져 지내고, 전투는 큰아들인 흑태자와 다른 아들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주로 담당하였다. 1369년 곤트의 존이 패배를 당하고, 흑태자마저 건강이 나빠지자 결국 에드워드 3세는 다시 움직여야 했으나 역풍으로 잉글랜드 해군은 프랑스에 상륙조차 하지 못했다. 해군 역시 카스티야 해군과 손을 잡은 프랑스 해군에게 잇달아 패배하였고, 승리의 기세를 잡은 프랑스인들은 영국인들을 몰아내겠다는 결의가 더욱 강해졌찌만, 이제 잉글랜드는 칼레와 보르도, 바이욘을 제외한 프랑스 내의 다른 어느 곳도 장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양군은 1375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흑태자의 병이 심상치 않자 앨리스 페러스의 도움을 받은 곤트의 존이 섭정인이 되었으나, 그가 국민들의 뜻에 어긋나는 정치를 하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결국 의회는 앨리스 페러스를 축출하고 곤트의 존의 추종자들을 탄핵했는데, 이 작업이 마무리 되기도 전에 의회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흑태자는 세상을 떠나버렸다. 결국 곤트의 존은 다시 권력을 차지했으며, 아들을 먼저 떠나보던 에드워드 3세 역시 곧 사망했다.


 에드워드 3세는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기사 군주였고, 많은 전쟁을 벌여 대부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할 무렵에 그는 자신이 정복한 거의 모든 것, 그가 이어받은 거의 모든 것, 그리고 전쟁 초기만 해도 어느 정도 남아있던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의 사이의 친선 감정을 거의 다 잃어버린 채 죽었다. 백년전쟁의 초기 국면에서 영국의 군대는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거의 무적과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프랑스를 점령할 수 없었다. 


 전쟁은 소득의 재분배를 가져왔다. 일반 병사들은 봉급을 받았고, 귀족들은 약탈과 프랑스인 포로의 몸값으로 이익을 얻었으며, 군납청부업자들은 무기와 식량의 공급으로 돈을 벌었다. 전쟁은 또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고, 민족적 의식을 일꺠웠다. 그리고, 파한산 국왕으로 하여금 의회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전쟁을 수행하는데는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의회의 힘은 커지고 그 지위는 높아졌으며, 더 이상 왕령지나 법정 수입, 봉건적 수입이나 다른 관례적 부과만으로는 막대한 전비를 댈 수 없었던 왕은 여러 상인들이나 도시 및 주와 개별적으로 협의하는 대신, 전국적인 의회안에서 그들의 대표들과 상의함으로써 비상시의 세금을 부과하는 편이 모든 당사자들에게 편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치세 50년 동안 의회는 48회나 열렸으며, 그때마다 고위 성직자, 대영주, 하위 성직자의 대표, 주 기사와 도시 대표가 소집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치세 기간 의회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발전은 의회가 귀족원과 평민이라는 역사적 구조를 갖추고, 각 원이 나름대로의 힘과 그 기본 권한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의회도 처음에는 대륙의 삼부회처럼 성직자, 귀족, 평민의 세 신분이 따로 모이는 기구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고위 성직자들은 세습 귀족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하급 성직자들의 대표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따로 가지고 있어 성직자들은 의회 내에서 별도의 모임을 가지지 않았다. 기사들 역시 처음에는 귀족들과 같이 모였으나, 이후 귀족 모임에서 배제된 후 무거운 과세부담을 함께 지고 있던 시민들과 연합하는 기구를 만들었다. 따라서 잉글랜드 의회는 대륙의 유사 기관과는 달리 귀족원과 평민원의 상 - 하 양원으로 분리되고, 작위 귀족과 일부 고위 성직자가 상원을, 기사들과 시민들이 하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의회가 강화되며 13세기만 해도 의회를 장악하던 판사들과 국왕 관리들의 수 역시 줄어들었다. 잉글랜드의 의회는 14세기 동안 양원제가 자리 잡고, 근대 의회 제도의 얼개가 형성되었고, 무엇보다 하원은 상당한 영향력을 얻어 왕이 제시한 사항들을 토의하고 과세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으며, 때때로 행정부를 통제하고 일부 입법에도 참여했다. 이런 하원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장하는것도 문제가 있겠지만 그 발전이 괄목할만한 것이었음은 확실하다. 



*1) 오귀스트 로뎅(Auguste Rodin)은 칼레의 시민(The Burghers of Calais)이라는 작품을 조각하여 이 모습을 담았다.

*2) 1348년 칼레에서 열린 전승 축하연에서 에드워드 3세는 애인 솔즈베리 백작 부인 조운(Joan)과 춤을 추었고, 이때 그녀의 파란색 가터(각반)이 바닥에 떨어졌다. 에드워드는 이것을 주여 그의 무릎에 동였다. 이를 본 사람들이 그를 놀리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Honi soit qui maly pense(이를 나쁘게 생각하는 자는 창피한 줄을 알아라)." 이후 이 말은 유럽의 가장 오래된 기사단의 표어가 되었으며, 여기에서 기원한 가터 훈장(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은 가장 영예로운 훈장이 되었다 ─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177 

*3)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 170 ~ 170 pp

*4)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 177

*5) 이는 잉글랜드 왕의 5년 수입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 Ibid pp. 178

 *6) Ibid pp.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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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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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레아스 | 작성시간 13.08.26 정말 흥미롭게 읽고 갑니다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8.27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 유행이 어느 정도로 위력을 발휘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네요.... 옆에서 얘기하고 일하던 사람들 중 반절이 죽어나간다라...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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