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폭격의 역사 (34) 독수리 깨어나다 -4- 일본 움직이다.

작성자Venice의 선원|작성시간11.11.27|조회수1,763 목록 댓글 8

자 그럼 이제 일본은 남쪽으로 전선을 확대하기 전에 미국 태평양함대를 날려버릴 계획을 짜게됩니다. 먼저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대 미국 전문가였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을 위시로 하여 전쟁계획을 착착 수립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잘알고

 

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 전쟁을 그동안 반대했었고, 심지어 그를 암살하려던 시도도 있었을 만큼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미국 대사관에서 무관을 지냈던 적이 있었던지라 미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도조 히데키曰"미국 상대로 승산이 있습니까?"

야마모토 이소로쿠 曰 "절대로 없슴돠 길어봤자 6개월~1년정도 승기를 잡겠지요"-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 승산 없는 싸움에서 이기려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적을 제압해야한다는 생각이 었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전함파가 장악하고 있던 일본 해군에서 거의 유일하게 항공모함을 팍팍 밀던 식견있던 장군이었습니다. 동시에

 

해군 항공대육성과 함재기 개발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고, 이는 전쟁 초반 미해군을 압도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일본 함재기 3종셋트 위에서부터 제로센, 97식 함상공격기, 99식 급강하 폭격기-

 

그리고 이미 1940년 11월 영국해군이 함재기공습으로 상당한 성과를 낸적이 있는 타란토 공습을 모티브로 하여 작전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먼저 태평양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주력함들을 모두 격침시키거나 대파시키면 결국

 

미해군은 미국본토로 해군을 철수 시킬수 밖에 없을테고 그동안은 태평양의 제해권을 꽉쥐고 미국이 물자를 쏟아내기 전에

 

미국과 강화조약을 맺는 방식으로 밖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이 물량을 쏟아내기 전에 승부를 보겠다는게 일본의 계획이었습니다-

 

1941년 가을이 되자 이제 미국과의 전쟁은 불가피해보였습니다. 연일 회의가 벌어졌고 대부분의 해군제독과 육군장군들은

 

석유 자원을 위하여 미국령 필리핀을 점령하고 단숨에 영국령 동남아일대를 휩쓸겠다는 계획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당시 동남아는 열강의 식민지였습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프랑스령,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 필리핀은 미국령이었고, 유일한 독립국은 태국......-

 

하여간 영국령이었던 브루나이에는 석유가 왕창 묻혀있었고, 이를 노린 일본군은 단숨에 그곳을 먹어서 부족한 석유를

 

메꾸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제일 먼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진주만을 공격

 

해야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먼저 태평양함대를 제압해서 미국에게서 제해권을 뺏은다음 1년내로 유럽에서

 

나치 독일이 소련을 처부순다면 미국은 어쩔수 없이 강화에 응할수 밖에 없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독일군은 말그대로 승승장구 소련군을 처부수고 있었으니 이런 관측도 무리는 아니었죠-

 

하지만 야마모토를 무시하는 당시 전함파 해군 제독들은 야마모토의 작전계획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야마모토는

 

일본군 수뇌부를 설득했고, 도조 히데키와 일왕 히로히토는 야마모토의 계획이 맘에 들었습니다. 결국 일본군 수뇌부는 작전을

 

개시하게됩니다. 당시 일본 해군은 충분히 미국 해군과 싸울 전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미해군은 이미 몇번의 감축으로 일본

 

해군을 통제할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일본 해군을 얕잡아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해군은 대서양함대 태평양함대로 양분

 

되어있었고, 태평양 해전의 핵심이 될 항공모함 대부분은 대서양함대 소속이었습니다. 당장 태평양에 배치된 항공모함 숫자만

 

놓고 본다면 일본 9척 Vs 미국 2척으로 숫적 열세에 있었죠. 그리고 이미 항공모함의 위력이 검증된 타란토항 공습을 면밀히

 

연구한 겐다 미노루 소령이 진주만 공습은 성공가능성이 높다며 야마모토 제독을 돕고 나섰습니다.

-겐다 미노루 소령은 직접 본 결과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구닥다리 복엽기 21대 만으로 3척의 전함을 격침시킨것과 다름 없는게 타란토 항 공습인데 우리 일본은 더욱더 발전된 항공기와

 

더 많은 공격기들이 있으니 충분히 할만하다는게 겐다 미노루 소령의 결론이었습니다. 진주만의 수심이 얕아 어뢰 공격이 실패

 

할거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타란토항도 수심이 얕았지만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로 밀어붙였습니다. 한편 이렇게 일본이 착착

 

준비하고 있을때 미국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일본은 이제 충분히 제압했다고 생각한 미국 정부의 수반들도 오로지 유럽상황에만

 

관심이 있었고, 대부분의 잘나가는 해군 수뇌부도 당장 전투가 벌어지는 대서양에서 성과를 올리기에 급급했고,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수병들도 정신이 해이해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와이는 태평양에 떠있는 낙원이나 다름 없었고, 미국의

 

최전선은 미드웨이제도 웨이크제도 필리핀등이라고 생각했고, 하와이는 안전한 후방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전해지는 전쟁

 

소식을 들은 미 해군의 생각은 '그깟 일본해군 따위 깝 ㄴㄴ'였으니 말이죠.

 

한편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미 1941년 초부터 미리 전쟁을 대비하여 해군의 최고 엘리트들을 불러 모아서 비밀리에 작전을

 

계속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겐다 미노루 소령의 의견에 따라 최소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한 400대이상의 항공기, 그리고 적

 

함에 정확히 철갑탄과 어뢰를 맞출수 있게 고도로 훈련된 조종사들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호위할 100여대의 전투기가

 

필요하다는 계획서를 제출합니다. 이 계획서에 맞춰서 1941년 여름부터 일본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은 얕안 가고시만에서 훈련

 

비행을 시작했고, 매일 같이 훈련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미리 진주만의 모형을 갖춰서 해군 조종사들에게 숙지하도록 했고,

 

미군 전함들의 사진을 준비하여 숙달시켰습니다.

 

 

-이런식으로 진주만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와이에 심어둔 첩자로부터 미국 함대는 매주 토요일마다 항내에 진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공격 개시는 하와이 날짜

 

일요일 새벽으로 결정하였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진주만을 공격하려던 일본해군은 1941년 11월 17일로 계획하고 있었으나

 

수심이 얕은 진주만에 쓸 수 있는 특수어뢰 제작이 늦어져 20일뒤 12월 7일로 작전일이 결정되었습니다. 간신히 특수어뢰 100발이

 

함대 출발 시일에 맞춰서 인도되었고, 드디어 일본 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일본 해군의 최정예

 

항공모함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그리고 신형항모 쯔이가꾸, 쇼가꾸 그리고 전함 기리시마 히에이등 일본 해군의 주력 함선들이

 

속속들이 일본 북쪽 쿠릴열도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일본 해군기지는 미국 첩보원들이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함선들이

 

한두척씩 몰래 빠져나가 아무도 모르는 조그마한 항구를 발진기지로 삼아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휘하는 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모든 승조원에게 무선연락을 금지했고, 빛 신호로만 연락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기동함대장 나구모 주이치, 그의 특기는 조함(배를 조종하는것)이었는데 이는 혹시나 작전이 실패해도 항공모함을

살려 오라는 의도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11월 26일 기동함대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기함 아카기를 선두로 민간 상선들이 많이 움직이는 일본-하와이간 직항로를 피해

 

북쪽으로 멀리 우회해 가기 직했습니다. 12월 2일 일본 본토로 부터 최종명령문이 떨어졌고, 함대 후미에 따라오던 유조선으로

 

부터 마지막 연료보급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연료보급이 끝나자 일본함대는 전속력으로 하와이를 향해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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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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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j s k | 작성시간 11.11.27 그보다 렌야가 세배 많았더라면?
  • 답댓글 작성자Venice의 선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1.27 음냐 조선현 내지는 경성시서 살고 있을 생각하니 끔찍하네요
  • 작성자Che_GueVaRa | 작성시간 11.11.27 -미국이 물자 쏟아내기 전에 먼저 미함대를 부셔놓자. 그리고 강화조약을 맺자.-

    독일이든 일본이든
    너무 낙관적인 가정하에 전쟁을 시작했다는 건 똑같네요.
  • 답댓글 작성자Venice의 선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1.27 둘다 승승장구 했으니 충분히 낙관적 생각할만 했죠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11.11.27 드디어 진주만 공습이!!...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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