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폭격의 역사 (40) 독수리 날개를 펴다 -적의 심장부에 폭탄을!-

작성자Venice의 선원|작성시간11.12.07|조회수701 목록 댓글 5

1942년 초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심상치 않은 여론의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대공습 이후 태평양함대

 

가 없어진 미군은 말그대로 태평양과 동남아 전역에서 펼쳐지는 일본 해군의 움직임에 손놓고 보기밖에 할수 없었으며 그나마

 

믿을만한 전력인 영국의 Z기동함대마저 날아가버리자 동남아는 말그대로 일본의 손에 떨어집니다. 먼저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이

 

일본군에 점령당하고, 1942년 2월에는 영국의 싱가포르가 함락당하죠, 그 여세를 몰아 1942년 2월말이되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

 

아 근방까지 일본 해군이 진출합니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미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죠. 도대체 미군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하고 말이죠.

 

 

-압도적인 전력의 일본해군을 막을 상대가 동남아에는 없었습니다.-

 

결국 루즈벨트는 국민들의 분노를 좀 잠재우고 국민들의 사기를 높여줄 작전을 기획하게 됩니다. 그 작전은 일본의 수도인

 

도쿄를 폭격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으로 나타납니다. 1942년 1월 백악관에 모인 군관계자들에게 루즈벨트는 군 장성들을 질타하며

 

다그쳤습니다. '도대체 언제 우리가 반격에 나설 것이냐?'라면서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이 다그쳐도 군 장성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말이 좋아 도쿄 폭격이지 도저히 폭격기가 뜰만한 항공기지를 확보 할수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나온

 

방안이 두가지였는데 첫번째는 중국에서 발진하여 도쿄를 폭격하자는 안이었는데 이는 이미 해안가를 점령한 일본때문에 도쿄와

 

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일본의 항공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이 안은 현실 불가능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두번째로 나온

 

안은 바로 항공모함을 이용하자는 안이었는데, 이미 진주만 공습에서 보여준 일본해군 항공모함의 놀라운 성능때문에 가뜩이나

 

열세인 항공모함을 무리하게 작전에 동원했다가 실패하면 그 책임을 누가 감당할수 있겠느냐라는 것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중

 

해군 작전성의 어네스트 킹제독의 참모중 한 사람이었던 프란시스 대령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냅니다. 바로 항공모함에서 육군의

 

중형폭격기를 발진하자 라는 아이디어였죠, 그는 즉시 자신의 상관인 어네스트 킹제독에게 이 작전 아이디어를 브리핑 합니다.

 

 

-엄청난 아이디어를 낸 프란시스 로 대령-

 

킹제독은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구체적인 작전안을 내보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하지만 막상 구체적인 작전을 내보려고 해보니

 

아무리 중형폭격기라지만 1km의 활주로를 필요로 하는 육군 항공기들이었기때문에 기껏해야 수백미터 밖에 안되는 항공모함

 

갑판에서 날아오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프란시스 로 대령은 육군 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 장군에게

 

찾아가게됩니다. 아무래도 진짜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겠죠. 헨리 아놀드 장군은 이 프란시스 로

 

대령의 이야기를 듣고 이거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헨리 아놀드 장군은 프란시스 로 대령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부하이자 세계적인 곡예비행사겸 여러 세계기록을 가지고 있던 둘리틀 중령을 소개시켜줍니다.

 

 

-예전에도 소개했던 둘리틀 중령, 당시 최고의 조종사중 한명이었습니다-

 

프란시스 대령에게 작전을 설명받은 둘리틀 중령은 자청해서 자신이 이 작전을 맡겠다며 나섭니다. 그리고 자신이 특별히

 

엄선한 조종사들과 함께 기종을 선별합니다. 그리고 B-25미첼 폭격기가 결정되었죠.

 

 

-미공군의 선각자 빌리 미첼의 이름을 딴 B-25미첼 폭격기 이 작전을 위해 개조되기 시작합니다-

 

둘리틀 중령은 이 폭격기를 손보기 시작합니다, 먼저 무게를 줄이기 위해 무선장비와 기관총들이 제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연료

 

탱크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혹시 기체가 일본토에 불시착하게될 점을 고려하여 당시 미국의 극비 무기였던 노던 폭격 조준기가

 

제거되고 간이 폭격조준기가 설치됩니다. 그리고 둘리틀 중령에 의해 엄선된 24명의 조종사들이 항공모함 갑판의 길이 160m에

 

맞춰 이륙하는 훈련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1942년 3월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를 올리게됩니다. 미군은 이에 따라 도쿄뿐만

 

아니라 오사카 나고야등 일본의 대도시의 목표를 정하기 시작합니다. 주로 정유시설과 발전소등을 노리고 총 16기의 B-25에

 

각각 4발의 250kg폭탄을 적재한뒤 작전을 결행하게 됩니다. 누구도 이 4발의 폭탄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일본에 입힐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작전은 떨어진 미국민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작전이었으므로 이 작전에 참가하는 모든 대원은

 

비장한 각오로 작전 결행에 나섭니다. 1942년 4월 2일 16대의 B-25를 적재한 항공모함 호넷호는 태평양을 향해 출항했고,

 

10일뒤 태평양 해상에서 할지 중장이 지휘하는 엔터프라이즈 항모 함대와 만나게 됩니다.

 

 

-항모에 적재된 B-25-

 

최대한 일본 본토에 가까운 위치까지 이동하려던 이 함대는 4월 18일 일본 동쪽 1150km에서 일본 순시선과 맞닥드리게 됩니다.

 

예정되었던 곳보다 300km나 떨어진 곳이었지만 이미 발각된 이상 더 이상 전진은 무리라고 생각했던 할지 중장은 둘리틀 중령

 

에게 작전 속행을 할것인지 묻게됩니다. 원래 계획은 야간 공습후 중국에 착륙이었지만 만일 지금 이륙하게 되면 대낮에 일본

 

본토를 지나게 될것입니다. 둘리틀 중령은 여기서 이륙해도 충분히 중국대륙까지 갈수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작전을 속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1번기를 몰고 항공모함 호넷호에서 발진합니다.

 

 

-1번으로 발진하는 둘리틀 중령의 B-25-

 

곧이어서 15기의 B-25가 발진했고, 할지 중장은 그들이 무사하길 빌며 함대의 뱃머리를 돌립니다. 한편 발진한 둘리틀 중령의

 

폭격기들은 미리 훈련한대로 무려 60m의 초 저공으로 비행을 계속합니다. 그러던 중 일본 순시선들의 보고를 받은 일본 해군의

 

G4M 폭격기들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 폭격기들은 항공모함을 찾던중 이들과 우연히 만나게 된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해군

 

항공모함 함재기 중에 쌍발기는 없었으므로 같은 일본군 소속 정찰기라고 생각한듯 그냥 지나칩니다. 일본 연안까지 접근한

 

B-25폭격기들은 자신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일본인들을 보며 작전이 성공했다는 것을 예감했다고 합니다. 도쿄 근방에

 

도착한 B-25기들은 둘로 나눠져 3기는 나고야 방향으로 향하고 13기는 그대로 도쿄로 진입합니다. 애초에 정밀 폭격같은것은

 

신경도 안쓴 이 폭격기들은 그냥 주요 목표처럼 보이는 곳에 폭탄을 투하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국쪽을 향해 도망갑니다.

 

 

-도쿄 공습을 감행한 B-25기체들-

 

한편 대낮에 만세일계의 천황이 사는 황도 도쿄에 나타나 공습을 감행한 미국 폭격기를 목격한 일본인들은 대 충격에 휩싸입니다.

 

당시 언론을 장악하던 군부는 일본 본토는 불침의 영역이라면서 일본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는데 대낮에 미국 폭격기들이 나타

 

나 폭격을 퍼부엇으니 일본 군부의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즉시 이 폭격기들을 격추시키겠다면서 대규모로 전투기를

 

띄웠지만 제대로된 레이더 망이 없던 일본은 이미 중국쪽으로 날아가버린 이 폭격기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둘리틀 중령이

 

이끄는 이 폭격기 부대는 3700km를 날아 중국에 도착했고, 연료가 바닥날때까지 최대한 중국 내륙쪽으로 비행하다가 불시착

 

하거나 낙하산으로 탈출합니다. 그 중 1대는 엔진이상으로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 불시착했고, 8명이 대원이 일본 측 점령지에

 

떨어졌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도피할수 있었습니다. 한편 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국은 환호의 물결로 뒤덮입니다. 둘리틀은 미국의 영웅이 되었으며 대낮에 적의 수도에 폭격을 가했다는 것만으로도

 

미국민의 사기는 급속히 올라가게 됩니다. 미국으로 귀환한 둘리틀은 무려 2계급을 특진해 준장이 되었고, 미국인 중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영웅이 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직접 명예훈장과 준장 계급장을 달아줬다고 합니다-

 

 

-나중에 또 나오시겠지만 이분은 중장으로 전역했습니다만 오래 사셔서 1985년 예비역으로는 처음으로 4스타가 되었고,

1993년 96세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미국민은 이 공습으로 사기가 올라갔지만 반대로 일본인들은 대부분 충격으로 오히려 사기가 급락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껏

 

승승장구하던 일본제국의 수도에 폭격이 왔으니 말이죠. 일본의 모든 군사 작전을 총괄하는 대본영은 그동안의 우려가 현실이

 

된것에 조급함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미국의 함대가 일본의 함대가 남방 작전으로 빠졌을때 본토를 치게되면 그 책임을 감당

 

할수 없었기에 남방작전을 잠시 미루고, 진주만 공습때 놓쳤던 미 항공모함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야마모토의

 

의견을 무시했던 대본영은 어쩔수 없이 야마모토의 의견-즉 미 항공모함을 조기에 격멸하고, 일본의 동쪽 방어선을 하와이까지

 

늘린다-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급하게 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일본의 몰락이 시작되는

 

미드웨이 해전까지 이어집니다.

 

 

- ㅠㅠ어떻게 모은 항공모함인데 ㅠㅠ, 한방에 6척이 탈탈 털려버린 일본해군-

 

태평양쪽 전선은 이 미드웨이 해전이후에는 과달카날전투 같이 섬점령방식으로 전환하기에 일본 본토 공습이 시작되는 1944년까

 

지 이 연재가 진행된 이후에나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만, 이 둘리틀 공습은 줄리오 듀헤가 그렇게 주구장창 주장했던 '민간인

 

을 살상해 적의 사기를 꺾는다'라는 이론이 어느정도 들어맞은 공습이었고, 적의 의표를 찔러 적을 당황케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정말 대단한 작전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이 작전의 결과가 미드웨이 해전까지 이어져 결국 일본이 일찍 패망한

 

것을 보면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폭풍을 만든다는 이론이 거짓이 아니다라는 것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럼 이제 다음 연재부터는

 

1943년부터 실시되는 미국과 영국의 대규모 공습에 대해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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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Luflusica | 작성시간 11.12.07 미드웨이 해전에 앞서 일 항모를 계속 공격한 불나방이야기를 어디서 본것같은데 말이졈... 잘보았습니다 ^^
  • 작성자밥묵고자자 | 작성시간 11.12.07 너무 너무 재밌어요
  • 작성자VOCALOID 時代 | 작성시간 11.12.07 진짜 미드웨이 해전이 전황을 뒤집은 甲중의 甲인 해전이였죠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11.12.07 즐감하고 갑니다..*.*
  • 작성자Che_GueVaRa | 작성시간 11.12.08 생각해보니 님말씀대로 전략폭격의 이론에 딱 맞는 공습이었군요. 후후후.
    글 잘 읽고 갑니다. 고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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