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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십자군] 프러시아 반란의 기원

작성자Floyd| 작성시간07.11.03| 조회수1522| 댓글 14

댓글 리스트

  • 작성자 앨런비 작성시간07.11.03 몽골침입과 알렉산드르 간지의 여파가 여기에도 영향을 미쳤군요-_-;
  • 작성자 Τιταυιζ 작성시간07.11.03 흠... 무시무시하군욥 역시...ㅠㅠ
  • 작성자 타마누님 작성시간07.11.03 알렉산더 네브스키 기념비인가 보죠? 크기 한번 ㄷㄷ 하군요.
  • 답댓글 작성자 Τιταυιζ 작성시간07.11.03 동상스탈이 왠지 소련 대인배들이 세운거 같군엽...
  • 답댓글 작성자 앨런비 작성시간07.11.03 크기 ㅎㄷㄷ하다길래 사진을 다시보니 옆에(?) 선 사람을 발견했다능 ㅎㄷㄷ
  • 답댓글 작성자 팔랑기테스 작성시간07.11.03 페이퍼스 전투 간지 하악하악... 앨런비님 말듣고 동상사진 다시보니 크기에 ㅎㄷㄷ.....
  • 작성자 유틸라이넨 작성시간07.11.03 몽골이 전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을 보면 참으로 후덜덜 하네요 @..@;;;;
  • 작성자 리카르도 작성시간07.11.03 몽골 아해들이 서유럽까지 쳐들어 왔다면 독일애들이 프루스인처럼 되었겠죠 ;;;;;
  • 작성자 학생[역갤] 작성시간07.11.03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교황은 도미니크회와 밀접했나 보군요.
  • 답댓글 작성자 Τιταυιζ 작성시간07.11.03 뭐랄까, 예수회 등장이전엔 가톨릭 수도원 세력중 가장 머리좋고, 자부심이 너무 강한 사람들이랄까요.. 때문에 프란치스코파가 인정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지요.
  • 작성자 쑤레빠 작성시간07.11.03 크리스티안 주교.. 좀 안습이네요. 열정과 야심은 있었으나 ...정치력이 부족했다고 정의해도 될까 모르겠네요..
  • 답댓글 작성자 Floyd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7.11.04 사실 주교는 운도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30년까지는 리보니아 십자군 운동이 활발해서 많은 십자군 자원을 리가 교회와 검의 형제단이 끌어가고 있었으므로 주교가 서방의 지원을 받아 프러시아에서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233년에는 프루스 인들에게 납치 당해버렸으니 튜턴 기사단이 프러시아 교회를 한 구석으로 밀어버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요.
  • 작성자 jager 작성시간07.11.04 조만간 튜튼기사단을 아작낼 러시아의 영웅이 등장하겠군요
  • 작성자 문학 작성시간08.12.05 불쌍하네요 진짜 종교를 하던 사람은 망하고 종교를 수단화 하던 사람들의 욕심은 승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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