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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yd] 발트십자군사

[중세유럽][발트십자군]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의 종말 (1228년~1236년)

작성자Floyd|작성시간07.11.08|조회수1,658 목록 댓글 7

* 원래 본문의 내용은 튜턴 기사단의 동프러시아 정복 이후 작성하려고 했던 내용인데 깜빡 잊고 중간에 빠트린 것입니다. (근성이 떨어지니 건망증이 따라오더군요-_-)  그러므로 원래 예정했던 페이푸스 호수의 전투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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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니아 연방(1260년)>

 

 

1. 검의 형제단(Livonia Sword Brethren)의 위기

 

12세기 말 리가 교회의 창설로부터 시작된 북방 리보니아 십자군은, 1228년 교황 특사인 모데나의 윌리엄의 중재로 검의 형제단과 주교구들로 이루어진 리보니아 연방을 형성하는 것으로 일단 정리가 되었었습니다.

 

사실 교황특사가 파견되었던 이유는 기사단과 주교들 사이의 분쟁, 특히 리가 교회와 검의 형제단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모데나의 윌리엄은 양 세력 간에 신뢰를 얻는데 성공하여 세력 경계선을 긋고 사법권 및 징세권과 같은 통치 권한의 범위를 비교적 명확히 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리보니아의 주인은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결국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리가 교회와 리보니아 기사단 사이의 주도권 분쟁은 리보니아 연방의 고질적인 문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원래 검의 형제단은 리가 교회를 수호하고 이교도를 상대로 성전을 수행하여 선교사업을 돕기 위해 창설된 종교 기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방 십자군에서 검의 형제단의 비중은 커져갔고 형식상으로도 교황청 관할로 되어 있었으므로, 점차 리가 교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1211년, 리보니아에서 기독교 세력이 커지게 되면서 새로운 점령지의 배분과 징세권의 귀속 권한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생기게 되었는데 당시 리가 교회는 검의 형제단의 도움이 절실했으므로 많은 권한을 기사단에 인정해야 했고, 이후 검의 형제단은 1228년 교황특사의 중재에 따라 리보니아의 2/3를 차지하였으며 덴마크령 에스토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하는 등 그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23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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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기사와 검의 형제단의 결투>

 

 

드비나 강 남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리보니아 지방이 어느 정도 안정됨에 따라, 기사단이 십자군 운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토와 전리품, 그리고 서구의 공후들로부터 주어지는 기부가 줄어들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이 시기에는 튜턴 기사단이 프러시아 십자군을 주도하게 되면서 리보니아로 오는 십자군 지원 중 많은 부분이 그 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리보니아의 2/3를 차지하는 커다란 영토의 관리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기사단은 자신의 옛 이교도 신민들을 끊임없이 단속해야 했고 외적으로부터 영토를 방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병기를 제조하고 용병을 고용하고 성채를 건설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이 모든 것은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북방의 척박한 토지에서는 농업생산 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대안으로서 큰 도시를 차지하여 발트해의 교역수입과 세금수입을 노리는 것이 유력한 수익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사단은 리보니아의 대도시들을 독점할 수 없었습니다.

 

리보니아 최대의 도시인 리가 시(市)는 리가 대주교의 수중에 있었고 대주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기사단에 자신의 돈주머니를 풀지는 않을 것이었습니다. 도르팟(Dorpat)의 경우, 그 도시는 도르팟 주교구의 중심지였으며 도르팟 주교는 옛 리가 대주교 알베르트의 동생인 헤르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기사단이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 획득한 레발(Reval‎, = 린다니쎄, 탈린) 시는 든든한 자금원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레발과 북부 에스토니아 지역은 원래 모데나의 윌리엄이 교황 직할령으로 소속시키려고 시도했던 지역이기도 해서 교회세력과의 분쟁은 예고된 것이었으며, 이 곳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던 기사단의 시도는 오히려 그들의 정치적 입지까지 약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검의 형제단은 북방 십자군 과정에서 이교도와 기독교 개종자를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행위로 인심을 잃었고 교회 세력과의 거듭된 분쟁으로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다가 레발의 주도권 분쟁 과정에서, 그들은 벨기에의 알나(Alna) 수도원 출신의 교황 특사 보두앵(Baldwin)을 적으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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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린(=레발) 시의 구 시가지>

 

 

2. 교황특사와의 분쟁

 

알나의 보두앵은 원래 리가 대주교의 사후, 그의 후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리보니아에 파견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교회의 권익을 위하여 검의 형제단이 원주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사법권한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며, 결정적으로 레발 시를 포함한 옛 덴마크 령 에스토니아를 교회로 귀속시키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 것은 당연히 검의 형제단에는 심각한 위협이었는데 그들에게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하여 이 도시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사단장인 폴크빈(Volquin)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검의 형제기사들은 지금까지 리가 주교에게 그래왔듯이 교황 특사에게도 저항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리가 주교를 선출하는 일은 뒷전이 되어버렸고 교황특사와 기사단 사이의 분쟁이 격화되었습니다. 평화로운 해결이 요원하게 되어버리자, 교황특사는 리가 교회의 참사회와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대주교가 추천한 니콜라우스(Nicholaus)라는 인물에게 리가 대주교 자리를 서둘러 맡긴 후 로마로 돌아가 검의 형제단을 성토하였습니다.

 

이 것은 교황청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으므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교회의 권리를 관철시키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알나의 보두앵에게 여러 특권들을 부여하고 리보니아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1233년 여름이 되자 그는 군대를 모아 리가 시로 돌아와, 쿠를란트 지역을 점령하고 에스토니아로 분견대를 보내는 등 리보니아를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군이 리보니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검의 형제단은 일단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234년 여름, 알나의 보두앵이 레발 시를 넘길 것을 요구하자 마침내 기사단은 행동에 나섰습니다. 검의 형제단의 기사들은 교황청에 충성할 것을 주장하는 기사단장을 연금해 버린 후, 교회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황 특사의 지지자들을 리보니아 전역에서 체포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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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형제 기사>

 

 

알나의 보두앵은 뒤나뮌데(Dünamünde)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도망가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아서, 교황청에는 그와 기사단 간에 고발과 맞고발이 줄줄이 이어지는 추태가 벌어졌습니다.

 

그 중 보두앵 측이 행한 1234년 11월 20일의 고발에서는 검의 형제단에 씌워진 41개의 혐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입장이 일방적으로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당시 리보니아에서 벌어진 난장판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으므로 그 내용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해 보겠습니다.

 

4) 그들(=검의 형제단)은 비로니아(Vironia)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100명 이상의 비로니아의 속민(Vassals)들을 살해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 개종한 사람들로서 비로니아는 실질적으로 로마 교회의 소유이다.

 

5) 교황이 개입하자 그들은 자발적으로 비로니아, 게르바, 그리고 쿠를란트를 이제 교황 특사로 임명 된 세미갈의 주교(=알나의 보두앵)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그 직후 그들은 이 지역들을 공격하여 교회에 침해를 입혔으며 게르바(Gerva)와 비로니아의 새로운 개종자들을 억압하였다. 한번의 원정에서 그들은 400 운코스(Uncos, 아마도 지역 화폐단위) 가치의 손실을 그들에게 입혔다.

 

8) (교황의) 중재로 그들과 교회를 대표하는 보두앵 주교와의 사이에 발생한 논란이 종식되었을 때, 그들은 그(주교)의 단장을 붙잡아 중재안에 명시된 (레발)성의 1/4의 귀속을 거부하였다.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속임수로 레발 성의 3/4를 차지하고 교회의 권익을 침해하였으며 로마 교회의 속민 100명 이상을 살해하여 8개 지역에서 교구를 침범하고 수도원 내부와 교회의 재단 위에 피를 뿌렸다. 그들은 시체들을 무더기로 쌓아 올렸고, 그 위에 로마 교회에 가장 충성스러웠으므로 교황 성하의 대리인과 같았던 한 사람의 시체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당황시키기 위해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개종자들이나 다른 사람들, 프루스 인들이나 이교도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게 해서 검의 형제단이 로마 교회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고자 하였을 것이다.

 

15) 그들은 리가의 주교로서 활동하는 영주 니콜라우스 및 리가 인들과 공모하여, 71명의 상인들에게 세미갈리아와 쿠를란트의 일부를 주었고 56명의 상인들에게는 다른 부분을 나누어 주었으며 나머지는 그들 자신과 음모자들이 취득하였다. (그들은) 세미갈의 주교나 교회뿐만이 아니라 그의 전임자들에 의해 그 곳으로 들어왔던 속민들에게는 한치의 공간도 남겨두지 않았다.

 

18) 그들은 시토 수도회에 소속된 뒤나뮌데 성의 동산과 부동산, 장원과 마을들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개종자들을 붙잡아 고문하였는데 그 곳의 수도원이 교황청의 편지에 명기된 명령에 따라 그(교황특사)와 협력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만약 뒤나뮌데의 수도원이 빠른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리보니아를 떠나 수 많은 집단으로 분열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크리스마스 이브에 형제 기사들은 로마 교회의 사무를 추진 중이었던 수도원의 식료품 보관인을 살해하였다.

 

25) 그들은 자신들의 사실상의(de facto) 신민인 반두레(Bandure)의 이교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들이 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이교도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토지세를 교회로부터 박탈하였다. 비록 그들이 카톨릭 신앙 속으로 받아들여지고, 당시 교황 특사였던 세미갈의 주교를 통해 로마 교회로 소속하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해, 반두레의 사람들은 개종을 받아들였는데도 계속 이교도처럼 취급 받았다.]

 

39) 그(교황)은 기사단의 형제들을 소환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개종했거나 여전히 개종 중인 리보니아 지역의 토지에서 무엇이든 취득하거나 보유할 수 있게 해주도록 작성된 어떠한 법적 협정서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을 교황과 추기경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40) 그는 그들(검의 형제단)을 소환하였으니, 로마 교회와 덴마크 왕과 특사들과 성직자들과 교회의 속민들과 새로 개종한 사람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고발한 모든 내용에 대하여 답변하여야 한다.

 

결국 이 지리한 분쟁은 모데나의 윌리엄이 다시 교황특사 자격으로 리보니아로 돌아와 기사단과 교회 세력 간의 경계를 재정리함으로써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검의 형제단은 교황특사가 배분해 준 영토를 가지고는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을 타결할 수 없었습니다. 더더군다나 모데나의 윌리엄은 검의 형제단이 점거하고 있던 옛 덴마크 령 에스토니아를 장차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에게 귀속시킬 것을 지시하고 있었으므로, 만일 그렇게 된다면 기사단의 재정 악화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기사단이 만일 교황특사의 중재 안을 거부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교황청 전체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었으므로 무엇인가 자구책을 물색해야만 했습니다.

 

 

3) 검의 형제단의 선택

 

가뜩이나 나쁜 기사단의 평판은 교권과의 싸움으로 더 떨어졌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제 검의 형제단은 전리품과 영토를 획득하기 위한 새로운 정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표가 된 지역은 남쪽의 이교도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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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니아의 주요 십자군 거점 및 부족들>

 

 

드비나(Dvina, 다우가바 Daugava) 강 남쪽의 쿠르 족과 세미갈 족은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체로 남아있었으나 당시 이 지역을 덮친 기근으로 인하여 별 무리 없이 기독교 세력권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때 남쪽의 이민족에 대항하기 위하여 독일인들과 협력했던 세미갈 족은, 일방적으로 동맹이 파기당하고 공격을 당했던 경험 때문에 옛 적수인 리투아니아 인들과 손을 잡고 복수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더 남쪽에는 아직 십자군의 물결이 다다르지 못한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 곳은 다름아닌 리투아니아(Lithuania)였습니다. 사실 리보니아에서는 리투아니아 인들이 그리 낯선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리투아니아 인들은 주민과 재물을 약탈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리보니아를 습격해 왔었으며, 검의 형제단 역시 리보니아를 쳐들어온 리투아니아 인들과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투아니아 인들의 습격은 1220년부터 급격히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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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전사(13세기)>

 

 

검의 형제단이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습격이 감소한 원인은 그들의 내부 정세가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투아니아는 10년 전부터 이교도 공작(Duke)들 사이에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으므로 외부 세계에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황상 리투아니아를 공격하기로 한 그들의 결정은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통합된 하나의 전제국가로 탄생하기 위한 그 이교도들의 이러한 몸부림은, 훗날 발트 십자군의 가장 무서운 적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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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리투아니아의 문장>

 

 

1236년, 기사단은 교황의 칙서로 리투아니아 이교도들에 대한 십자군을 정식으로 승인 받았습니다.

 

 

4) 사울레의 전투 (1236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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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쿠나스여! 위대한 조상들의 신이시여!

하늘에서 벼락을 박살내시니 하늘과 대지가 진동하리로다!

부디 우리가 이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소서!

 

<메탈밴드 Skyforger의 ‘사울레의 전투(Kauja pie Saules)’>

 

 

1236년 가을, 잠시 개점 휴업 상태였던 리보니아의 검의 형제단에 반가운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달고 독일 홀슈타인(Holstein)에서 온 기사들로 대규모의 군대와 함께 리보니아에 막 도착했던 참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서방으로부터 오는 십자군은 전쟁터에서는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기부로써 재정적으로도 도움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언제나 환영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선 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진흙탕 때문에 전쟁에 적합하지 않은 계절에 찾아 온 이 홀슈타인의 기사들은 당장 이교도들과 싸우러 가자고 기사단을 재촉하였습니다. 아마 리투아니아 인들과 이미 싸워본 경험이 있었을 검의 형제단 기사단장인 폴크빈은 – 예전에 형제 기사들의 항명으로 봉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사단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 땅이 얼어붙어 기사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겨울까지 기다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홀슈타인의 기사들은 겨울에 바다가 얼어 항해가 불가능하게 되기 전에 이교도들을 해치워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고 기사단으로선 그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검의 형제단은 앞서 기술한 여러 어려움으로 인하여 대 고객 친절봉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별 수없이 홀슈타인에서 온 십자군과 함께 리투아니아에 대한 때이른 성전을 시작했습니다. 기사단장 본인과 기사단의 형제기사 중 1/3 정도가 동행한 원정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경무장한 리보니아의 원주민 보조병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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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기티아>

 

 

십자군 원정대는 리보니아의 세미갈 족 영토를 지나 리투아니아의 사모기티아(Samogitia) 지방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십자군이 감행한 초기의 공격은 성공적이어서 미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여러 이교도 부락들이 기습을 받고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로를 북쪽으로 돌려 어느 강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강의 도하지점에서 대규모의 리투아니아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교도 군대는 사모기티아의 대 공작(Senior Duke)인 비킨타스(Vykintas)의 지휘를 받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는 에르드빌라스(Erdvilas)와 함께 사모기티아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아우크스타이티아(Aukstatia)의 대 공작인 민다우가스(Mindaugas)의 경쟁자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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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기티아의 대 공작, 비킨타스>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사울레(Saule)의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만 리투아니아의 쉬아울리아이(Siauliai) 근교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사울레는 태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태양의 여신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교 신앙에서 사울레 여신은 가장 강력한 신격(Deity)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그녀는 지상세계에 자연의 따스함과 함께 비옥함을 아울러 선물하였고 한편으로는 불운한 이들의 수호자가 되어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태양의 여신이 자신의 전차를 몰고 지평선 위로 떠올라 찬란한 빛을 지상에 흩뿌렸을 때 아침이 찾아오면서 악령들은 잠이 들고, 여신이 지상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거느리고 지하 세계로 침잠하게 되었을 때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다고 이교도들은 믿었습니다.

 

아무튼 십자군이 이교도 군대를 대면한 장소는 습지대였으므로 기사가 활동하기에는 좋은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홀슈타인에서 온 기사들은 그러한 지형에서 말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말에서 내려 도보로 싸우는 것도 거부를 했습니다. 그들은 일단 그 곳에서 진지를 구축하자고 주장했으므로 십자군은 별 수 없이 그 곳에서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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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형제단의 기수>

 

 

1236년 9월 22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면서 리투아니아 군대가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병력 규모의 추정치는 십자군 3000명과 이교도 군대 5000명 정도였습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십자군은 튼튼한 갑옷과 석궁, 투석기와 같은 기술적인 우위를 점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는 전력의 핵심인 중무장 기병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고 낯선 지형에서 열세에 몰린 상황이었으므로 전황은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마침내 경무장한 원주민 보조병들이 무너져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고, 보조병이나 이교도 전사만큼 민첩하지 못했던 기사들은 뒤에 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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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 귀족 vs 십자군 기사>

 

 

이어 벌어진 결과는 검의 형제단에 있어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뒤처진 십자군 기사들과 함께, 검의 형제단의 기사단장과 50여명의 형제 기사들이 이교도들과 싸우다가 몰살당했습니다. 가까스로 전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자들도 달아나는 길에 세미갈 족의 습격을 받아 리가로 살아 돌아간 이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 한번의 전투에서 1/3에 가까운 검의 형제단의 기사들이 태양의 여신에게 피의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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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의 승리>

 

 

리투아니아 군대의 전후 상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교도 전사들은 자신들의 풍습에 따라 전사한 동료들의 시체를 모아서 그들의 소지품과 함께 화장(火葬)을 했을 것이며, 어쩌면 태양의 여신이 그들의 영혼을 사후세계로 무사히 데려가기를 빌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편 전투에서 잡힌 포로들은 처형되거나 노예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이 전투는 이교도들이 발트 십자군에 대항해서 거둔 최초의 대대적인 승리였습니다. 리투아니아 인들은 그들의 막강함을 과시할 수 있었고, 엄청난 피를 뿌리지 않고서는 결코 쉽게 정복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념비적인 승리의 지휘관이었을 비킨타스 공작의 행로는 앞으로는 그렇게 순탄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검의 형제단은 생존이 위태로워졌습니다. 그들은 곧 원주민 반란으로 드비나 강 남쪽을 잃어버렸고 다른 지역들은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입은 피해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복구할 수 없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사울레의 전투는 검의 형제단의 종말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기사들은 튜턴 기사단과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리보니아 지역의 정세를 우려한 교황의 승인 아래, 1237년 프러시아 지역에서 튜턴 기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헤르만 폰 발크가 생존자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리보니아로 파견되었던 것입니다. 과거의 검의 형제단은, 이제 튜턴 기사단 리보니아 지부라는 이름을 달고 검은 십자가의 기사로 다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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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Floyd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1.08 검우기사단을 설명하는 글을 보면 거의 '규율없다 (undisciplined)'라는 말이 들어가더랍니다. ~_~ 튜턴 기사단에 합병된 직후에도 에스토니아 문제로 헤르만 폰 발크한테 반항을 하게 되지요.
  • 작성자앨런비 | 작성시간 07.11.08 십자군 전쟁을 보면- 외부의 지원군은 보통때는 도움이 되지만, 현지를 잘 모르고 너무 호전적으로 가서 트러블을 일으키고, 재앙을 유발시켰는데, 사울레 전투도 그 패턴의 전형이군요-_-;
  • 작성자게이볼그 | 작성시간 07.11.08 뭐, 강력한 자체적 국가 기반이 아니라 외부 세력 유입으로 세력을 유지하는 집단의 한계랄까요. 결국 튜튼기사단도 저런 과정을 고스란히 밟으면서 몰락해가죠(...) 계속되는 공격에 리투아니아-폴란드가 연합해버리고, 거기다 리투아니아가 개종해버려서 십자군으로 대표되는 외부에서 인원수급은 줄어가고, 그래서 상황이 어려워지다가 대규모 격전에서 치명적으로 패한 뒤 결국엔 몰락해버리는 과정이 비슷하달까요. 음, 검우 기사단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좋은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학생[역갤] | 작성시간 07.11.09 스키를 탄 전사의 모습이 이색적입니다. 3,000 vs 5,000 의 전투에서 대패했다면... 이교도 군대들도 꽤 강력한 적수로군요. ^^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작성자쑤레빠 | 작성시간 07.11.10 튜턴기사단과 검의기사단의 결정적 차이는 뛰어난 정치력을 갖춘 인재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차이같네요... 정치력은 없고, 재물과 공명에 눈이 어두워 교황청과 불화하고, 홀슈타인 기사들한테 휘둘려 나쁜 시기에 진군을 해버렸고,.. 황산벌의 대사 생각나네요.."정치력이 없는 장군은 부하들을 개죽음시키는 나쁜 장군인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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