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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yd] 발트십자군사

[중세 유럽][발트십자군] 노브고로드 성전(聖戰)의 시작 (1240년)

작성자Floyd|작성시간07.11.22|조회수1,482 목록 댓글 5

 

 

도르팟의 헤르만 주교는 이 시기에 러시아 인들과 다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에도 그러했듯이 기독교 신앙을 방해하고 싶어했고 그들의 불경함은 많은 손실을 야기하였다. 그들은 커다란 해악을 자행해왔는데,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참아오다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형제 기사들을 찾아갔다.

 

<리보니아 운문(韻文) 연대기 中>

 

 

 

도시 외곽에 불이 질러졌고, 훨씬 사악한 일이 벌어졌다. 성스러운 아이콘과 모든 재산과 함께 교회들이 완전히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프스코프 주변의 촌락들은 폐허가 되어 방치되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생애 中>

 

 

1240년 7월의 네바 강의 전투는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12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던 노브고로드 – 스웨덴 분쟁의 연장선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것은 같은 해 가을부터 시작된 대 노브고로드 성전(聖戰)의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노브고로드는 그들의 영토 서쪽에서 스웨덴 인들보다 더 강력하고 치명적인 세력과 접경하고 있었습니다.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의 이교도들을 정복하고 노브고로드의 바로 옆에 눌러 앉아버린 독일과 덴마크의 카톨릭 세력이었습니다.

 

1230년까지 발트 십자군의 주요 진로는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 이후로는 자기들끼리의 분쟁에 휘말려 있었으므로 노브고로드에 대해서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2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교황특사와 튜턴 기사단의 노력으로 인하여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 지역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되던 것입니다.

 

그럼 본격적인 캠패인을 서술하기에 앞서, 먼저 리보니아의 정세와 전쟁의 동기, 그리고 참여세력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튜턴 기사단의 리보니아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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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니아>

 

 

1236년 검의 형제단이 리투아니아 인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후, 리보니아의 정세를 우려한 교황은 튜턴 기사단에 의한 검의 형제단 합병을 승인하였습니다. 튜턴 기사단 프러시아 지부의 단장(Landmeister)인 헤르만 폰 발크가 합병임무를 위해 리보니아로 파견되었고, 1237년 5월 검의 형제단은 공식적으로 튜턴 기사단 리보니아 지부로 간판을 바꿔 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르만 폰 발크는 직접 신생 리보니아 지부의 첫 단장을 겸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리보니아에 들어오면서 우선적으로 해야 했던 일은, 급격히 줄어든 리보니아의 기사들을 충원하여 원주민의 반란에 대처하는 것과 검의 형제단이 카톨릭 교회 및 덴마크 왕국과 일으켰던 불화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헤르만 폰 발크가 리보니아로 왔을 때 그는 신중하게 모집된 60명의 기사와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사들은 북 독일 지역의 튜턴 기사단 지부에서 선발되었으므로 옛 검의 형제단 생존자들이 사용하는 저지대 독일어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리가에 도착한 후, 이들 튜턴 기사들은 리보니아 기사단의 여러 거점들에 배치되어 모자라는 기사의 수를 보충하였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원주민들을 제압하였습니다. 그러나 드비나 강 남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쿠르 족과 세미갈 족은 1250년대까지 완전히 진압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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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턴기사>

 

 

한편 튜턴 기사단은 옛 기사단이 리보니아에서 일으켰던 분쟁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검의 형제 기사단은 교황청 군대와 덴마크와 전쟁을 벌인 전력이 있었고, 무력으로 승리는 얻을 수 있었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었습니다. 그런데 옛 기사단의 이러한 행위는 기독교 세계로부터 명망을 얻어 그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튜턴 기사단의 정책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1233년부터 1234년까지 리보니아에서 벌어졌던 분쟁의 주요 진원지는 옛날 덴마크 십자군이 점령했다가 검의 형제단에게 빼앗겼던 레발 시와 북부 에스토니아였습니다. 이 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인하여 기사단과 교회 세력 간에 분란이 일어났고, 그 이후에는 교회와 교회 지지자들, 덴마크 왕, 검의 형제단 사이에 일련의 고발사태가 벌어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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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발 성>

 

 

1238년, 헤르만 폰 발크는 스텐스비(Stensby)라는 곳에서 덴마크 왕국과 협정을 맺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 협정에서 튜턴 기사단은 검의 형제단이 무력으로 점거했었던 옛 덴마크 령 에스토니아의 세 지역인 하리아와 비로니아와 예르비아 중에서, 하리아와 비로니아를 덴마크 왕에게 돌려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반환은 1234년 교황특사인 모데나의 윌리엄의 중재 안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으며, 또한 발트해의 유력한 카톨릭 세력인 덴마크 왕국을 튜턴 기사단의 동맹자로 맞아들이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텐스비 협정은 반항적인 검의 형제단 생존자들의 반발을 야기하게 되었습니다.

 

튜턴 기사단으로 옷을 바꿔 입기는 했으나 검의 형제단 출신의 기사들에게 있어서 북부 에스토니아의 반환은 참을 수 없는 조치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리보니아의 형제 기사들은 헤르만 폰 발크와 협력하기를 거부했고, 그들 중 일부는 이탈리아로 가서 당시 튜턴 기사단장이었던 헤르만 폰 잘차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게 그 협정을 재고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북부 에스토니아는 예정대로 덴마크로 반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에스토니아 북쪽에는 덴마크 왕국이 다시 돌아왔고 에스토니아 남부와 리보니아 지역에는 튜턴 기사단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리가, 외젤-비크, 도르팟과 같은 카톨릭 교회의 주교구들이 그 영역에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고, 이러한 여러 세력들의 경계선과 권한관계도 정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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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세력 – 1240년경> 

 

 

2) 노브고로드와의 갈등

 

원래 북방 십자군 초창기에는 카톨릭 세력과 정교 세력의 분쟁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군은 주로 리보니아의 이교도에 대한 정복에 집중했으며, 북방 십자군을 주도하는 리가의 알베르트 폰 북스회베덴(Albert von Buxhoeveden) 주교는 오히려 정교 세력의 유력한 공후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 세력이 에스토니아로 북상하면서 점차 두 세력간의 충돌이 빈번해졌는데, 특히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그러했습니다. 13세기 초반부터 일어난 양 세력 간의 주요 분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218년, 에스토니아에서 노브고로드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리가 교회의 알베르트 주교가 덴마크 왕의 개입을 요청하였습니다.

 

2. 1222년경, 노브고로드 군대가 레발 성을 4주간 포위했습니다.

 

3. 1223년, 독일 십자군이 북상하자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동부 에스토니아의 변경지역인 타르바타에 드루지나 전사들을 증원하였으나, 1224년, 그 요새는 발트 십자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으며 수비대는 전멸하였습니다.

 

4. 1225년을 전후해 교황 특사인 모데나의 윌리엄이 파견되어 노브고로드 정교회가 카톨릭 의례를 받아들일 것을 수 차례 권유하였으나 모두 거절 당했습니다.

 

5. 1234년, 야로슬라프 대공의 노브고로드 군대가 습격하여 도르팟(= 타르바타) 지역을 약탈했습니다.

 

 

이러한 주요 분쟁과 더불어, 변경 지역에서는 카톨릭 계열의 지방 영주들과 러시아의 정교도들 간에 자잘구레한 소규모 분쟁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북방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카톨릭 세력과 정교 세력 간의 주요 갈등은, 검의 형제단의 독단과 야심이 불러 일으킨 카톨릭 세력끼리의 내부 분쟁으로 인하여 당분간 소강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튜턴 기사단의 개입으로 혼란스러웠던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의 정세가 안정되자, 새로운 영토 확장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과 카톨릭 복음 전파라는 종교적인 의무감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일단 남쪽의 ‘이교도’인 리투아니아 인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검의 형제단이 행한 섣부른 십자군 원정은 이미 1236년 사울레의 대 재앙으로 끝을 맺은 적이 있었습니다. 리투아니아는 숲과 늪지대와 황무지로 이루어진 천연의 방벽으로 보호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가 되면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어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습니다.

 

동쪽의 ‘분파주의자’인 정교세력 노브고로드는 보다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주로 도시 민병대와 농민병으로 이루어진 공화국 군대는 군사적으로 취약했으므로,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위해서는 노브고로드 대공의 상담역이자 직업전사이기도 한 드루지나들로 보강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공화국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단합을 지속시키는 데 서툴렀고, 드루지나의 주군이기도 한 노브고로드 대공의 지위는 변덕스러운 시민들의 동향에 흔들리기 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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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민병대>

 

 

이러한 약점을 가진 노브고로드에 대한 군사원정은, 세속 영주들에게는 새로운 영토와 전리품을 안겨주고 성직자들에게는 새로운 교구와 십일조를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실리적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새로운 전쟁은 카톨릭 입장에서 분파주의자로 간주되는 동방 정교세력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성전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동서교회의 분열은 36년 전인 1204년, 제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더욱 심화 되었습니다. 당시 4차 십자군을 설파했던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이 결말에 격분하여 사건의 당사자들을 파문시켜버렸지만, 한편으로는 그 상황을 이용하여 동방교회에 라틴 식 종교 의례를 부과하려고 시도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것은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이후 교황의 계승자들에 의하여 동서교회 통합에 대한 하나의 전례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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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1222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그리스 인’의 종교 의식은 ‘라틴 인’들이 통제하고 있는 모든 지역에서 허용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는데 이 원칙은 북방지역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1224년, 정교 세력권인 타르바타 요새가 발트 십자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곧 카톨릭 계열의 도르팟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동방 정교에 속하는 노브고로드 대주교구(Archbishopric of Novgorod)로 하여금 카톨릭 의례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일련의 외교적인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통합 시도는 노브고로드의 완강한 거부로 결렬되었지만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123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특사자격으로 리보니아에 돌아온 모데나의 윌리엄이 러시아 정교도들에 대한 성전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의 서구세력은 정교도 노브고로드를 향하여 십자군을 일으킬 수 있는 종교적인 대의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북방 지역의 교회 통합은 평화로운 설득이 아닌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 시도될 것이었습니다.

 

 

3) 발트 십자군의 주요 세력들

 

1240년 노브고로드와 직접적으로 얽히게 된 주요 세력은 크게 세 군데였는데, 그것은 북부 에스토니아로 돌아온 덴마크 왕국, 리보니아에 새로 개입하게 된 튜턴 기사단, 페이푸스 호수와 프스코프 호수를 사이에 두고 노브고로드와 대치 중인 도르팟 주교구였습니다.

 

3-1) 덴마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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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왕국은 10여 년 전에 검의 형제단에게 에스토니아를 빼앗겨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여전히 유력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사시에 200척의 군선을 동원할 수 있는 해군력으로 발트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에스토니아 동부에서는 최대 200명의 기사와 서전트를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덴마크는 비록 북부 에스토니아의 소유주이기는 했지만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주요 영주들은 대부분 독일인이었습니다. 이들 영주들은 덴마크 령 에스토니아의 통치에 있어서나 군사 방어에 있어서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십자군은 덴마크가 영주들에게 새로 정복한 영토를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30년 전, 교황으로부터 ‘성스러운 순례의 여정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기사’라는 찬사를 받았었던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는 아직도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많이 든 덴마크 왕 본인은 이 원정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으며, 대신 왕의 아들인 아벨(Abel)과 크누트(Knut) 왕자가 에스토니아로 파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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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덴마크의 전사들>

 

 

아벨과 크누트가 덴마크에서 출항했을 때 왕자들의 함대에는 덴마크 인 남녀들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십자군이 성공한다면, '타타르인들이 초토화시킨 나라들까지 가서 정착'하는 것이 그 덴마크 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3-2) 튜턴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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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부터 남쪽의 프러시아에서 이교도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검은 십자가의 기사들은 아마도 발트 십자군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이었을 것입니다. 1237년 리보니아로 진출한 튜턴 기사단은, 검의 형제단과는 달리 훨씬 부유했고 규율이 잡혀있었으며 훈련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리보니아에서는 350명 정도의 튜턴 기사들이 서전트들과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튜턴 기사단에 있어서 이 리보니아 지부의 사안은 부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발트해는 1년의 절반은 얼음과 유빙으로 덮여 있어서 선박 항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튜턴 기사단이 북쪽에 고립된 리보니아 지역을 통제하기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또한 기사단은 팔레스타인과 프러시아 지역에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새로 추가된 리보니아 지역으로 할당할 수 있는 자원도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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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턴 기사단의 영토 – 리보니아의 지리적 고립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미래에 벌어지게 될 리투아니아 성전의 주요원인 중 하나였다.>

 

 

기사단 전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리보니아 지부의 역할은 남쪽의 프러시아 지부의 작전을 돕기 위한 보조 전력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1240년은 공교롭게도 튜턴 기사단이 십자군과 함께 동 프러시아에서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제 2대 리보니아 지부장인 디트리히 폰 그뤼닝엔(Dietrich von Grüningen)이 기본적으로 이번 군사행동에 대한 자금 지원과 병력 제공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부장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튜턴 기사단은 대 노브고로드 성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옛 검의 형제단 출신의 튜턴 기사들이 주축이 되어, 많은 기사들이 개별적으로 덴마크 왕이나 도르팟 주교의 군대에 합류하거나 리보니아 지부의 부 지휘관인 안드레아스 폰 펠벤(Andreas von Felben)의 지휘하에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3-3) 도르팟 주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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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구라는 이름만 본다면 전쟁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중세의 주교구는 평화로운 복음 전파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피 튀기는 전쟁과 연루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모양입니다. 변경에 위치한 이 도르팟 주교구에는 주교의 친척과 독일에서 온 기사들이 신하로 봉직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도르팟 주교구는 그 자체만으로도 300명의 봉건기사와 서전트, 그리고 1000명 정도의 에스토니아 보조병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원래 도르팟 주교구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변경요새였던 타르바타와 그 주변 지역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주교구는 페이푸스 호수를 사이에 두고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접경하고 있었고 그들과의 크고 작은 분쟁에도 많이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쪽의 노브고로드와 이해관계가 가장 많이 걸려 있는 세력도 바로 이 도르팟 주교구였습니다.

 

도르팟 주교인 헤르만 폰 북스회베덴(Hermann von Buxhoeveden)은 리보니아 북방 십자군을 주도했던 북스회베덴 가문의 5형제 중 막내였습니다. 헤르만 주교는 맏형인 리가의 알베르트 주교만큼 화려한 경력을 쌓지 못했지만, 성격만큼은 자신의 맏형 못지않게 정력적이었고 거칠었으며 야심만만했습니다. 1240년 당시 그의 형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노브고로드에 대한 군사작전은 형들에게 가려져 있던 헤르만 개인적으로도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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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대신 검을 든 헤르만 주교>

 

 

헤르만 주교는 노브고로드에 대한 성전에서 덴마크와 튜턴 기사단의 협력과 함께, 가문 간의 혼인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러시아의 한 공후와 그 지지 세력으로부터도 지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북스회베덴 가문은 정교 세력의 유력한 공후가문과 혼인관계에 있었습니다. 헤르만의 형인 테오도릭(Theodoric)이 스몰렌스크의 블라디미르 므스티슬라비치(Vladimir Mstislavich) 대공의 딸과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므스티슬라비치의 가문은 종종 노브고로드의 대공 자리를 차지하곤 했으며, 블라디미르 본인은 프스코프(Pskov)의 대공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블라디미르 므스티슬라비치는 시민들에 의해 프스코프의 대공직에서 쫓겨났고, 그의 뒤를 이어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다름아닌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아버지, 야로슬라프 프세볼로도비치(Yaroslav Vsevolodovich)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좌도 안정적이진 않아서, 변덕스러운 노브고로드를 장악하는데 애를 먹어야 했으며 그의 가문과 라이벌 관계인 므스티슬라비치 가문과의 분쟁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1240년 당시에는 블라디미르 므스티슬라비치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블라디미로비치(Yaroslav Vladimirovich)가 독일세력의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리보니아로 도망쳐 들어온 상태였습니다.

 

야로슬라프 블라디미로비치는 자신의 드루지나 전사들과 함께 발트 십자군에 약간의 군사력을 제공할 수 있었겠지만, 그의 진짜 효용성은 교역관계로 인하여 독일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노브고로드 공화국 내부의 친 독일파 세력으로부터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 카드역할이었습니다. 야로슬라프는 리보니아 독일 세력의 가장 권세 좋은 가문과 친척지간이었던 것입니다.

 

 

4) 십자군의 출정

 

이렇게 모든 상황이 무르익으면서 마침내 1240년, 십자군이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1. 1240년 가을, 페이푸스 호수의 남쪽에서 튜턴 기사단의 지휘관 안드레아스 폰 펠벤과 덴마크의 두 왕자들, 그리고 헤르만 주교가 이끈 십자군의 주력이 프스코프 방면으로 출정했습니다.

 

2. 그리고 겨울, 페이푸스 호수의 북쪽에서 덴마크 령 에스토니아의 봉건기사들과 튜턴 기사들, 그리고 에스토니아 보조병으로 구성된 십자군이 노브고로드 북쪽의 코포례(Koporye)로 진격했습니다.

 

3. 그러면서 십자군 분견대가 노브고로드 근처까지 출몰했고, 멀리 외젤-비크 주교구에서는 군선들이 핀란드 만을 향해 출항했습니다.

 

 

이러한 발트 십자군의 전격적인 공격으로 인하여, 불과 몇 달 전 스웨덴의 침략을 잘 극복했던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다시금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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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탕 – 노브고로드의 고질병 “독재자는 물러가라!”>

 

 

 

 

노브고로드에서 쫓겨나서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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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앨런비 | 작성시간 07.11.22 묵념(......)
  • 작성자학생[역갤] | 작성시간 07.11.22 무서운 주교님이네요. ^^;;;
  • 작성자롱기누스 | 작성시간 07.11.22 노보고로드... 잘 가게나
  • 작성자동해물과뷁두산 | 작성시간 07.11.22 고질병이라서, mtw2에서 반영된건가........ 툭하면 반란군 생기고...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8.06.12 십자군이 라틴제국건설후 비잔틴제국은 니케아로 건너가서 복수의 기회를 노르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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