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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에 만난 아름다운 사람 [7/1 고양신문]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1.07.12|조회수15 목록 댓글 0

여름날에 만난 아름다운 사람

 

최창의 (경기서울글쓰기회)

 

7월이 왔다. 나무들 잎사귀가 짙푸르러간다. 계절이 바뀌어 가는데도 코로나19는 1년이 넘도록 여전히 기세를 부리고 사람들은 여유가 없어진 듯하다. 불평등한 경쟁에 지친 시민들은 능력주의로 미혹하는 세태에 더 지친다. 이렇게 마음잡기 산란할 때일수록 청량감있는 사람이 그리워진다.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 참된 삶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런 목마름이 간절한 여름날에 만난 아름다운 두 사람 이야기이다.

봄비 온 뒤 맑게 개인 참이라서 바람도 살랑 불고 상쾌한 토요일 오후였다. 부안 변산공동체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님과 만날 시간이다. 윤선생님은 내 마음 속에 인생의 스승으로 받드는 분이다. 내가 26살 때쯤 이오덕선생님이 이끌던 글쓰기교육연구회에서 처음 인연을 맺고 30여년이 되었다. 보통 한 해에 두서너 차례 강의나 문화 활동 자리에서 가끔씩 뵈었는데, 요즘은 윤달모임에서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윤달모임은 “윤구병과 달마다 모임”의 준말로 세상사와 우리말 공부를 함께 하려고 만들었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몇 달째 거르다가 지난 6월 중순에야 다시 모임을 갖게 되었다.

파주의 한적한 주택에서 먼저 온 선생님들이 책상에 빙 둘러 공부를 시작하였다. 달마다 미리 해오는 숙제가 있는데 이번 달에는 윤구병선생님이 집필 중인 <우리말 백 마디 멋대로 사전> 살핀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전 초고에는 “1.것, 2.하다, 3.있다, 4.되다”부터 연이어 “97.땅, 98.짓다, 99.품, 100.싱글벙글”까지 100가지의 우리말을 윤선생님이 생각하는 대로 풀이해 놓았다. 낱말마다 뜻풀이를 여러 가지 쓰임새로 적어 놓고 보기까지 들어서 우리말을 바로 알고 쓰도록 해 놓았다.

나이가 팔순에 이른 윤선생님이 산속 흙집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우리말 풀이를 해 온 정성에 감동이 일어난다. 예쁜 우리말 사전을 내고 싶다는 웹사전 기획자를 만났는데 그 뜻이 좋아서 직접 써보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그 뒤 스무날 정도 걸려 백 마디 사전을 집필했다니 평소 우리말에 대한 애정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선생님은 늘 저승 갈 날이 가까워서 미련 없다 말하면서도 이렇게 부지런히 애써 우리말을 살려주고 있다. 변산공동체에서는 땀흘려 일하며 나누는 삶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윤선생님이 이렇게 돕고 나누며 살아가는 길을 닦아놓기에 우리 같은 후배들이 그 길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또다른 세상 곳곳에도 자기 자리에서 소리없이 소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롭거나 돈이 되지 않더라도 약자들에게 필요하고 값진 일을 해서 주위를 밝힌다. 최근에 알게 된 왕진의사 양창모님도 그런 분이겠다. 그이가 소양댐 수몰지구 농촌을 돌며 왕진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를 읽고 진한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 세탐 인문학모임에 초대해 강연까지 듣게 되었다. 그는 진료실 안에서 의사를 할 때는 환자가 오면 질환을 갖고 있는 존재로만 바라보았단다. 그저 어떤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인가가 중요할 뿐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진료실 의사를 그만 두고 의료생협 왕진의사를 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느낌이 달라졌다고 한다. 주로 강원도 산골 마을 노인들 집을 찾아 왕진을 하면서 삶의 맥락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단순히 질병만 진단하는 게 아니라 거주하는 환경과 삶 속에서 질병의 원인을 알고 근본적인 처방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가 진료를 다니면서 보고 겪은 시골 노인들이 사는 형편과 의료 체계의 현실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어떤 할아버지는 큰 병원에서 진료 받으려면 오가는데 몇 번씩 차를 갈아타야 해서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한다. 심하게 골다골증을 앓고 있는 할머니는 뼈가 부서지는 걸 무릅쓰고 몇 번씩 휠체어를 옮겨 타면서 병원에 가기도 한다. 이렇게 방문 의료가 절실한 상황인데도 우리나라 왕진의사 비율은 0.1%에도 못미치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그는 강연 끝 무렵에 한국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각기 다를지라도 죽음은 다 똑같다고 말했다. 대부분 나이 들고 병이 나면 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의료기관에서 사망하는 비율이 네덜란드 29.1%, 스웨덴 42%인데 비해 한국은 76.2%로 대부분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고 한다. 결국 방문 진료가 제도적으로 정착되어야만 집에서 병을 앓고 죽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왕진 의료수가가 낮아서 왕진의사 제도가 자리잡기 어렵다. 하지만 양창모 같은 의사들이 비록 개인적인 벌이가 덜하더라도 방문 의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기에 희망이 있다. 지치고 주저앉기 쉬운 여름날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보내 준 향기로 다시 힘을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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