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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수상 창고

참교육의 꿈은 짓밟히고 거리의 교사가 되다 [8/31 해직교사백서]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1.08.31|조회수59 목록 댓글 0

참교육의 꿈은 짓밟히고 거리의 교사가 되다

 

최창의 (경기도)

 

새싹이 움트는 봄날, 경기도 안성교육청에서 보체초등학교로 발령장을 받았다. 버스에서 내려 농촌마을의 질척한 시골길을 걷는데 학교까지 30분 넘게 걸렸다. 마을 들머리 언덕배기에 아담하게 작은 단층짜리 학교가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게 교육대학을 졸업한 지 3년 만인 1983년 3월 5일, 초등학교 교사로서 처음 교단에 서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아이들은 5학년 12살짜리인데, 인사성이 밝고 순진하였다. 사실 교육대학을 다닐 때는 교사가 되는 게 정해졌는데도 교사로서 사명감 같은 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을 만나다보니 그들의 순진한 눈망울이 주는 힘이 있었다. 아이들 가르치면서 조금씩 보람을 느끼게 되고 교육의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 때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교육학 책들을 찾아보고 아동심리와 아동문학을 공부하였다.

 

처음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는 시간은 새록새록 즐거웠다. 시골 아이들에게는 학교만이 유일한 배움터라서 나름 열의를 갖고 학습 지도를 하였다. 특히 아이들을 고루 사랑해야지 하는 교육관만큼은 지키면서 집안이 어렵고 힘든 아이들을 보살피려 애썼던 것 같다. 젊은 신규교사이니만큼 가끔씩 참신한 교육활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봄이면 시화전을 열어 교정에 게시하고 학교 문집도 만들었다. 바람 부는 가을날에는 억새밭 언덕으로 나가 야외 수업을 하고 연날리기 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학교 동료들도 대부분 신규로 발령받은 젊은 교사들이라 뜻이 잘 통하고 아이들 이야기를 자주 나누면서 힘을 얻었다.

 

아이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가고 교육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수록 교사로서 소신있게 교육할 수 없는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만 해도 교육 관료주의 폐해가 심각했다. 학교는 교장, 교감 중심으로 운영되고 그들의 지시에 복종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해야 할 이른 아침에 가장 마음 싫은 게 직원조회였다. 전체 직원이라 해봐야 6학급 교사들과 교장, 교감 합해 모두 8명이 날마다 교무실에 모여 앉았다. 조회 분위기는 늘 엄숙함과 지루함 그 자체였다. 교사들의 몇 마디 전달사항이 끝나면 교감, 교장이 되풀이하는 갖가지 지시와 훈계가 보통 30여분가량 이어졌다. 대부분 교육청 공문 지시사항과 청소 잘하기, 실내 정숙, 시험 점수 같은 잔소리가 아침 기운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안성에서 근무한 2년 뒤에 고양시로 학교를 옮기고 어느덧 교사 생활도 익숙해져갔다. 하지만 아이들 교육에 집중할 수 없는 학교현장의 문제점들은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들 가르치는 업무 외 잡무가 교사들을 짓눌렀다. 그 당시 6학급 초등학교에는 행정직이 배치되지 않아서 교사들이 온통 행정업무를 도맡았다. 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모두 6학급규모 학교에서 서무, 체육, 새마을, 애향단 같은 온갖 업무들을 배정받았다. 그래서 수업 중에 공문서를 작성하거나 수업이 끝난 뒤에도 교재연구는커녕 잡무 처리하다가 퇴근하기가 일쑤였다.

 

교육청은 학교를 말단 행정청 취급하고 교사들 위에 군림하는 게 관행이었다. 교육청에서 개최하는 체육대회, 합창대회를 비롯한 순위 경쟁 교육행사에 출전하기 위한 연습으로 수업은 뒷전이었다. 학교나 학생들을 도구삼아 실적을 내서 승진한 교육청의 장학관과 교육관료는 상전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학교를 방문하면 수업보다 청소를 신경 써야 했고, 교장은 우리들 보는 앞에서 하얀 돈봉투를 건네며 인사를 하였다.

 

학교를 둘러싼 현실이 이처럼 암울했던 그 시기는 85년도, 86년도 즈음인데 노태우 군부독재가 정권 유지를 위해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그만큼 각성된 시민들의 저항도 번져서 각 부문의 사회민주화 운동세력이 조직화되고 있었다. 도도한 민주화 물결은 교육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85년도 어느 날 일간지에서 참교육을 실천하려는 교사들이 소모임을 만들어 교육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서 떨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찾아간 모임이 YMCA초등교육자회였다. 그 곳에서 나는 참된 교육을 실천하는 동지들을 만나면서 교육운동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교사모임을 하면서 익힌 신나는 놀이와 노래, 글쓰기는 즐겁고 행복한 교실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교육 방식에 눈빛이 살아나고 우리 교실은 신나는 활동으로 출렁거렸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도 참여하여 아이들에게 참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실천하고 학급문집도 학기마다 발간하였다. 더 나아가 많은 교사들이 교육운동에 참여하면 참교육을 실현하고 부조리한 교육을 바꿔낼 수 있다는 신념이 강해졌다. 그래서 ‘민주교육추진 경기교사협의회’를 만드는데 앞장서고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준비에 매진하였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가르치고 정의롭게 살아보고자 했던 교사로서 꿈은 순탄하게 피어나기가 어려웠다. 부도덕한 군부정권은 교사들이 깨어나 깃발을 든 전교조 결성을 탄압하고 좌경용공세력으로 내모는데 혈안이었다. 교육청 장학사와 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합동이 되어 벌이는 감시와 동향 파악은 날로 심해졌다. 전교조 모임이나 행사나 있는 날이면 교장실에 불려가서 불참을 강요당하고 심지어는 방학 중에 특별 감사를 벌여 교원 전체가 비상 등교까지 시켰다.

하지만 전교조 활동이 아이들 앞에 떳떳하고 교육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라고 확신했기에 꺾이지 않고 나아갔다. 노태우 반민주정권은 결국 1989년 7월 13일, 직위해제 통보를 통해 아이들 곁에서 나를 학교 밖으로 내몰았다. 그 뒤 1989년 8월 8일, 전교조 활동을 이유로 파면 처분을 받고 찬바람 부는 거리의 교사가 되었다.

 

[최창의 약력]

1983년 경기안성 보체초 발령. 1989년 능곡초에서 전교조 결성관련 파면 처분. 1998년 9년 3개월만에 성신초로 복직하였다가 2002년 경기도교육의원에 선출되어 사직. 2014년까지 12년 동안 경기도교육의원으로 활동함. 2018년부터 2년간 경기도율곡교육연수원장을 지냄. 저서 “행복한창의교육, 교육대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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