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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수상 창고

학교에 걸리는 구호와 현수막을 보면서

작성자운영자|작성시간09.05.18|조회수582 목록 댓글 0

                     학교에 걸리는 구호와 현수막을 보면서

                                                                     최 창 의 (한국글쓰기연구회 회보, 경기도교육위원)

 

지난 5월 6일 경기도교육청 건물 중앙에 걸려 있던 교육지표 현판이 바뀌었다. 주민직선으로 당선된 김상곤 새 교육감이 취임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첫 변화이다. 지난 4년 동안 걸려 있던 “세계 일류를 지향하는 글로벌 인재 육성”이 내려지고 대신 “더불어 살아가는 창의적인 민주시민 육성”이 새로 올라갔다. 교육지표 간판이 걸린 자리는 똑같지만 그 글귀가 지향하는 의미와 내용은 사뭇 달라 보였다.

 

교육감이 바뀐 뒤 취임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교육지표 현판 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한 선생님은 교육감 따라 교육청이나 학교의 간판이 바뀌는 것도 권위주의 습성이라며 간판은 그대로 두고라도 교육행정의 관행을 바꾸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로벌 인재 육성”이라는 용어가 문제라며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거나, 떼어낸 다음 아예 아무 것도 걸지 않는 것도 진보 교육감의 이미지에 맞는다고 하였다.  

 

나는 그때 어차피 교육지표를 바꾸어야 한다면 대중적인 방식으로 공모를 하자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교육감이 지향하는 교육 가치와 정책 방향을 각 학교와 기관에 공문이나 홈페이지로 알린 뒤 좋은 문구를 모으자는 것이다. 이처럼 교육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여 교육지표를 만들면 주인 의식을 갖게 되고 실제 교육현장에 적용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간의 제약 때문이었는지 두루 공모를 하지 못하고 도교육청 담당부서에서 일부 교원들의 자문을 얻어 결정했다고 한다.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에는 교육의 지향을 나타내는 현판이 많이 걸려 있는 편이다. 학교의 건물 꼭대기나 구령대 머리에는 어김없이 교육과 관련된 구호가 적혀 있다. 우리 교육이 지향하는 목표나 방향, 의지가 담긴 이상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에서 고 성내운 선생님이 일찍이 이러한 학교의 구호나 표어에 대해 비판한 내용이 기억난다. 교문 앞에 붙이는 구호가 마치 밖으로 교육활동을 요란하게 내보이려는 눈속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꼬집었다. 오히려 교문에서 떼어 학교 안에다 아이들의 정서와 눈높이에 맞게 붙이라고 하였다. 성내운 선생님이 활동했던 시기에는 학교마다 박정희정권이 국민운동으로 벌였던 새마을 운동이나 반공정신과 관련된 구호가 걸려 있었겠지.

 

구호가 적힌 현판 못지않게 교문의 머리에 나붙은 현수막도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확 띄게 마련이다. 학부모나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야 할 행사나 자랑할 만한 일을 스스로 나서 현수막으로 알리는 것이야 얼마나 바람직한가. 그런데 때때로 어떤 현수막 내용들은 앞서 성내운 선생님이 지적한 것처럼 전시 효과에 이끌려 오히려 학교교육을 왜곡하거나 잘못 이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4월만 되면 어김없이 교문 머리에 올라오는 학교폭력 신고 현수막이다. 해마다 6월 15일까지 두 달여 동안 내걸리는 이 현수막에는 “00년 학교폭력 자진 신고 및 피해 신고 기간”이라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그리고 신고 기간, 기관의 전화번호 따위를 적어놓고, 자진 신고는 처벌을 완화하고 피해 신고는 비밀을 보장해 준다고 한다. 이런 현수막을 학교마다 교문에 걸어놓다 보니 일반 사람들에게는 마치 학교가 무슨 폭력의 소굴쯤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 문구도 알량하게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간첩 자진 신고, 총기 자진 신고” 같은 경찰 용어 아닌가? 이처럼 협박하는 투의 현수막을 건다고 해서 학교폭력이 없어지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걸 보고 얼마나 신고가 들어오는지도 의심스럽다. 경찰서와 교육기관이 합동으로 학교폭력을 강력히 단속하고 처벌한다는 것을 겉으로 내보이려는 자기 만족 행정일 뿐이다.

 

지난해에 이미 경기도교육위원회가 열릴 때 이러한 학교폭력 신고 현수막의 문제점을 도교육청 업무보고 자리에서 지적하였는데 올해도 여전히 똑같은 게 내걸렸다. 그래서 다시 도교육청 담당부서에 연락을 해 문구를 학생들의 정서에 맞게 개선하도록 요구하였다. 또 현수막을 무슨 자랑거리처럼 교문에 걸지 말고, 학교 안이나 담장 부근에 붙이도록 전달했다. 그러자 공문을 다시 보내고 장학관이 현장을 점검하면서 현수막 문구와 거는 위치가 달라졌다. 이래서 경기도 지역은 좀 나아졌다. 하지만 이 학교폭력 신고 현수막은 경찰청과 교과부가 함께 전국으로 시행하는 사업이다. 그러니 전국의 모든 학교가 두 달 넘게 이런 볼썽사나운 폭력 신고 문구를 아무 생각없이 걸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것도 아침저녁으로 우리 꽃같은 아이들이 드나드는 교문 앞에 말이다.

 

고등학교와 대학 입시철마다 학교 앞에 나타나는 합격자 현수막은 어떤가? 특목고 입시전형이 끝나면 중학교 앞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합격자 명단 현수막이 걸린다. “축 특목고 00명 합격”이라는 글귀 옆에는 과학영재고, 자립형사립고, 국제고, 과학고, 외국어고에 들어간 아이들 명단이 주르르 올라 자랑을 한다. 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마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대형 현수막에 서울대를 비롯한 서울권 4년제 대학교, 교육대, 의학과, 한의학과의 합격생 명단을 빼곡하게 실어 놓는다. 심지어 대학 서열에 따라 명단의 글씨 크기도 다르다.

 

입시철에 거리를 오가다 학교 앞에 걸린 이런 현수막과 마주칠 때면 천박한 우리 교육현실에 서글퍼진다. 어쩌다 학교라는 곳이 교육 장사치들이나 할 짓을 서슴없이 따라 하는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학교가 척척 상급학교에 합격하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만 다니는 곳인가? 현수막 아래를 오가는 시험에 떨어지거나 인기학교에 못 간 아이들의 심정은 왜 헤아리지 못하는가? 결국 학교의 입시 실적 과시 놀음에 비인간적인 경쟁만 부추기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더욱 절망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 아닌가. 하긴 이름이 올라간 아이들에게도 이런 현수막이 교만함이나 특권의식에 빠지게 할 수 있으니 결코 이로운 일이 아니겠다.

 

학교 사회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현수막이 하나 더 있다. 교원 인사철이 되면 걸리는 학교장 부임 축하 현수막이다. 예전에는 잘 볼 수 없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학기가 바뀔 때쯤이면 “000 교장선생님의 부임을 환영합니다”는 현수막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우리 동네의 초등학교에도 올해 초 5층 건물에 학교장 부임 현수막을 엄청나게 크게 걸어 놓아 멀리서도 보였다. 물론 새로 오는 학교장을 환영하는 마음이야 나무랄 것 없지만 마치 정치인 나서듯 그렇게 크게 떠벌일만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학교 안에다 작고 소박하게 환영하는 글을 걸어두는 것이 교육자다운 본디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새로 부임하는 다른 선생님들 이름과 함께 올리면 더 아름답지 않겠나.

 

학교의 현수막은 걸리는 자리가 학생들이 드나드는 교문 앞이라서 그 영향력과 상징성이 상당히 크다. 그 글귀 한 마디가 학교 구성원들의 의식이나 지향을 상징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학교 앞에 걸리는 현수막의 용어와 내용에 좀더 관심을 갖고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바람직한지 따져 보았으면 좋겠다. 학교 선생님들끼리 의논도 하고 문제점도 밝혀서 ‘상급학교 합격자 명단’ 같은 것들은 걸지 말았으면 한다. ‘학교폭력 자진 신고’ 같은 글귀도 아이들의 정서에 알맞게 다듬고 고쳐야 한다. 나도 교육위원 활동을 하면서 경기도교육청의 바뀐 교육지표처럼 ‘민주시민 육성’이 학교현장에서 뿌리내리도록 이런 작은 일부터 하나 하나 꾸준히 고쳐나갈 생각이다.  (2009,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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