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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환 칼럼 ■

[스크랩] 일본 여행기 6

작성자김석환|작성시간06.05.31|조회수42 목록 댓글 0
 

오늘은 다께우찌 부인인 모도코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원래는 친구인 다께우찌가 와야 하지만 바쁜 관계로 그 부인이 오기로 되어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나는 민박집에서 싸구려 헌 비닐우산을 하나 빌려 기내 가방에 꽂고 길을 나섰다. 그 가방에는 일본인 친구들과 화랑 주인에게 줄 선물과 내 전시 홍보물이 가득 들어 있어서 꽤 무거웠다.

비는 질척이고 하루 종일 그 가방을 끌고 다닐 생각을 하니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긴자거리의 브리지스톤 미술관을 찾아 나섰다.

우리의 친구 변 사장은 용케도 잘 찾아냈다. 그 친구는 마치 우리 동경 여행의 가이드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이번 여행 중에 지하철을 몇 번 헤맨 것을 빼고는 매번 거의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 친구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판검사라도 되었으면 우리나라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빛나는 사회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가끔 아쉬워 할 정도다.

난 그 친구에 비하면 오도 가도 못하는 환쟁이이고 그것도 분에 넘친다. 사실 그림도 내 머리로는 벅차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구두수선공이나 좀 인심 써서 단청장이 정도면 내 수준에 딱 맞지 않을까?


미술관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관계로 줄을 서서 기다리다 입장을 했다.

친구와 나는 전에도 봤었지만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기업에서 이런 훌륭한 미술관을 만들어 그 많은 그림들을 사 모았다는 것이 부럽기만 했다.

우리가 흔하게 미술책에서나 볼 수 있는 작가나 작품들이 즐비했다. 그 옛날 선견지명이 있어서 이런 작품들을 하나하나 사 모았을 터이니 그 예술사랑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서둘러서 전시 작품을 훑어 본 후 동경역의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모도꼬가 웃는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안내를 받아 긴자 근처의 화랑을 두어 개 돌고 올 12월에 다께우찌와 같이 전시할 전시장을 찾아갔다. 우리가 전시할 전시장은 의외로 크고 좋은 전시장이었고 그 바로 밑에 층은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화랑이 있어서 비록 초청전은 아니지만 나름의 성과를 기대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화랑주인도 의외로 서글서글한 모습이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젊고 예뻤으며 친밀감이 들어서 인상이 좋았다.

나는 가지고 간 팜프렛과 시디를 건네주고 준비해 온 간단한 선물도 내 놓으니 의외로 좋아 한다.


화랑을 나와 골목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같이 먹었다.

가격은 만만치 않은 식당이었지만 맛은 영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적당히 때우기만 하고 식당을 나왔다. 사실은 화랑을 더 구경을 해야 할 노릇이었지만 내가 일본 작가들과 만날 약속도 있고 비도 오고 가방은 무겁고 해서 나는 먼저 모도꼬와 함께 화랑을 들어가고 나머지는 시내관광을 더 하고 저녁 오픈 시간에 우에노에 있는 만찬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시장까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려서 나는 약속시간보다 근 한 시간 가까이 늦게 도착을 해서 정작 일본작가들과의 미팅은 물 건너간 상태라서 인사만 하는 것으로 대실할 수밖에 없었다. 꾸물거려 온 것이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모도꼬와 헤어질 때가 되어서 선물을 건네주려고 했더니 내일 남편한테 전해 주란다. 그도 그럴 것이 내일 다께우찌가 차를 가지고 나와 만나기로 했는데 굳이 멀리까지 짐을 들고 갈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무거운 짐을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면서 동경시내를 끌고 다닌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다.


만찬장에는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손님들도 없고 만나기로한 일행도 한명도 없었다.

대신 같이 간 일본 작가들은 만찬 준비에 분주하기만 했다.

한 참을 지나서 드디어 올 손님들이 대부분 자리를 메웠다.

대부분이 일본 측 작가들이고 우리 일행이 전부라고 할 정도이고 그 외에 무슨 교육위원이나 시의원이나 국회의원 비서관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평론가라는 사람이 축사를 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사람이 우리나라 이야기를 했다.

즉 때린 사람은 금방 잊어도 맞은 사람은 오래 기억을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때린 사람 편에 있는 일본 사람으로서 이 자리를 빌어 한국 측 작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 다는 뭐 그런 식의 인사말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참으로 희한한 일을 여러 번 겪고 만난다.

이제껏 일본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이처럼 자진해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피력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오히려 나와도 피하는 게 일반적이다.


더군다나 정치적인 자리도 아니고 그럴 분위기도 전혀 아니건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전혀 예외였다.

맞은 우리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데 오히려 때린 사람이 도둑이 제발이 저린 격으로 그런 말을 하다니 고마운 마음도 들었고 또한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그런 내 마음을 그 사람한테 나중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어서 시상식이 있었다.

대체로 일본 작가들은 격식을 좋아하는 통에 상이란 상은 이름 지어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만들어서 사람들을 계속 불러 세워서 상장과 트로피를 주었다.

그런데 대부분이 비서관들이 상을 대신 주다보니 상을 받는 측은 대부분 나이가 들고 주는 측은 젊어서 상을 주고받는 모습은 기이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런 격식이 이 그룹을 있게 하는 원동력인 모양이다. 일본이란 사회는 우리보다도 더 그런 일정한 틀에 연연하는 그런 사회이고 여기 전시 회원들이 대부분 아마추어로 작품을 하다 보니 그런 격식이 더욱 요구되는 모양이다.

나도 한 개 받았는데 상 이름도 길어서 잘 기억도 안 나지만 트로피는 엄청 큰 것이었고 아이러니 하게도 트로피 맨 꼭대기에 있는 인물상은 붓을 들고 있어야 할 손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트로피 자체의 그 번쩍거림만 중요하지 그 모양이나 무게나 재질 등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상을 받는 사람들이나 주는 사람이나 모두 엄숙하기만 한데 일전에 다례의식을 할 때처럼 유독 우리 측 작가들만 희희낙락이다. 잠시의 해프닝이 무겁던 시상식 장에 양념처럼 웃음이 번지게 한다.


긴 수상의 통과의례를 끝내고 만찬 시간이 되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 멀리서 어떤 사람이 들고 있는 회 조각을 구경만 했을 뿐 정작 입에는 넣지를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일본 아줌마가 다가와서 한국에 다녀왔다는 둥 파리에서 전시를 하고 왔다는 둥하면서 말을 거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대개는 처음 보는 일본 사람들은 내 입에서 튀어 나오는 영어 같지 않은 영어가 무서워 먼저 말을 걸지 못하지만 이 여자는 그래도 외국 여행을 좀 다녀 본지라 보통의 나이든 일본 여자들과는 달리 그래도 영어가 좀 되었다.


대화가 끝나고 나서는 내 입에 들어갈 마땅한 음식이 없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상도 타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또 손님대접도 받은 것이라서 흐뭇하기만 했다.

밖은 여전히 질척거렸지만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이처럼 딱딱한 행사로 마감할 수 없다는 대중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선술집을 찾았다.

안주만 먹으면 술값은 공짜라는 어느 술집에 자리를 했다.


그 곳은 젊은 애들로 이미 꽉 차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앉을 자리는 남아 있었다.

여덟 명이 쪼그리고 앉아 일본 ‘사케’를 마시기 시작했다.

간간히 안주도 나왔지만 안주라는 것이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시켜도 개수만 늘고 액수만 늘어 날 뿐이었다. 일종의 상술이었다.

난 부족한대로라도 이미 행사장에서 대충 식사를 한 터라서 그런지 그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대체로 나오는 안주가 가격에 비해서 푸짐하지도 맛깔스럽지도 않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 날 때 계산서에는 삼만 엥이 넘는 돈이 씌어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질척거리는 우에노 공원 근처를 얼쩡거리다 재  작년에 친구와 왔을 때 들렸던 국수집에 들어갔다. 나야 기억이 까마득하건만 친구는 용케도 잘 기억을 찾아내서 그 곳에 우르르 들어가서 우동이며 메밀국수를 시켜 먹었다.

대부분 배가 불러서 둘이 한 그릇을 같이 먹었다. 역시 국물이 여전히 맛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민박집으로 돌아 올 때는 다들 약간 풀이 죽은 모습들이다.

비가 와서 라기 보다는 오늘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기에 그럴 것이다.


숙소에서 돌아 와서는 주인과 계산을 하느라 내가 늦게 방으로 올라갔는데 방은 2인용 방과 4인용 방 두 개였다. 부부가 한 한 쌍이고 남자 둘에 여자 둘이라 약간 미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마침 김 선생님이 코를 골면서 미리 2인용 방을 점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자연스럽게 4인용 방으로 들어가서 이 닦고 발 닦고 잠을 잤으면 이렇게 저렇게 보기가 좋은 꼴이 되었으련만 머리 나쁜 나는 자는 분을 굳이 깨워 여자들 방으로 몰아  넣었다. 당연히 손 여사님도 남편을 따라 가셨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나는 할 수없이 신이 준 절호의 찬스를 걷어 차버리고 투덜대는 친구와 함께 2인용 방에서 동경의 마지막 밤을 지냈다. 부부도 좋아 하는 것 같지가 않았고 두 여인도 역시 내놓고는 아니지만 날 째려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일이 꼬인다 싶을 때는 얼른 이불 덮어 쓰고 귀

막고 잠이나 퍼질러 자는 것이 그나마 덜 밑지는 장사다.


아침에 일어나 우리는 밥을 먹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들고 여전히 비가 오는 동경거리를 가로 질러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일본 친구가 기다리는 지바 역으로 갔다. 생각보다 기차는 빨리 도착을 했고 우리는 심심함도 달랠 겸 역 입구에 코딱지만하게 붙어 있는 우동 집에 들어갔다. 생각해보면 이년 전에도 친구와 함께 들렸던 곳 같다. 그렇게 상자 같은 곳에서 훌쩍거릴 즈음 친구의 그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즐거운 인사를 끝내고 친구의 안내로 식당을 찾아가다 운동복 파는 가게에 들려 쇼핑을 했지만 난 통 만지기만 할 뿐 마땅한 것이 없었다.

단지 이번에도 걷기가 힘들었던 것을 생각해 특수 깔창이나 하나 살까 하다 그게 효과가 있을 지 의문이 가는 통에 그냥 나왔다. 친구를 따라 어느 식당 겸 술집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지바에서는 꽤 명성이 있는 식당인 모양인데 음식은 썩 입맛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정말로 일본서의 마지막 식사라서 그런지 열심히들 먹는다.


그 친구와 함께 지바의 전시장을 한 군데 둘러보았다. 세 명인지 네 명이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작품 수준이 높았다. 작가 중에 한 여자가 날 아는 척을 했지만 난 통 기억에 없었다.

벌써 한 이십년 가까이 전에 같이 전시를 했었다니 내 나쁜 기억에 그걸 어찌 기억해 낸단 말인가? 미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고 아무리 머리를 비틀어 짜도 그녀와 관계된 예전의 기억은 한 개도 건질 수가 없었다. 안에 있으니 나오나 기억 때문에 애먹는 일을 피할 길이 없나보다. 아직도 살아갈 날이 꽤 남았는데도 이러니 이제 더 나이가 들면 어찌 될 건지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대충 작별을 하고 친구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친구의 차는 꽤 오래 된 반은 짐칸이고 반은 좌석이 있는 봉고였다. 그런대로 우리 여섯이 끼어 탈 공간은 되었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친구에게 선물을 전해주고 작별을 했다.

근 20년이 넘은 친구 사이로 나는 일본에만 오면 늘 그 친구의 신세를 진다.

그래도 한 번도 마다 않고 늘 내 편의를 봐 주는 그 친구에게 이번에도 빚만 지고 가는 셈이다. 국적이나 나이와 관계없이 그 두 내외는 나를 친구라기보다는 동생처럼 늘 넉넉하게 대해준다. 20년이 넘게 받아만 와서 만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을 갖곤 한다.


“우리 전시 팜프렛을 어떻게 할까?”라고 운전을 하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정색을 하면서 무슨 이야기냐고 한다. 겨울에 할 우리 전시 때 팜프렛이라고 했더니 그 전시를 물렸단다. 아니 그런 일이?

이야기인 즉은 내가 일이 있으니 날짜를 당길 수 없냐고 전화를 했었는데 마침 옮길 날자가 없다고 하기에 그럼 그대로 하자고 했더니 내가 시간이 없어서 같이 전시를 못한다고 판단을 하고 화랑에 전화해서 계약을 파기 했단다.

근 20년이나 같이 해온 우리의 개별화되고 특별한 언어 소통의 능력이 그 영어라는 벽에 걸려서 이처럼 엉뚱한 결과를 빚었다는 것이 도통 믿어지지가 안했고 어이없기만 했다.


전시 한다고 전시장도 둘러보고 화랑 주인에게 선전해 달라고 팜프렛과 작품 사진 시디며 선물까지 전해주고 왔으니 그 화랑주인 생각이 얼마나 복잡하고 헷갈렸을까 생각하면 화대신 웃음이 절로 났다.

 언어 소통의 벽이 어찌 이처럼 어이없는 상황을 만들었단 말인가?

옆에 타고 있던 우리 친구도 어이가 없는지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다께우치도 한참을 난감해 하다가 화랑에 전화를 걸더니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답이 없단다.

어안이 벙벙해 하는 나를 안심시키려고 내일 자기가 화랑에 다시 알아봐서 해약한 것을 살릴 수 있나 알아보겠단다. 일본처럼 예약문화가 잘 되어 있는 곳에서 한 달 전에 지운 계약을 살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나도 만약 계약이 결국 성사가 안 되면 깨진 계약금은 반은 내가 변상하겠노라고 짐짓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우리의 언어소통의 해프닝을 커버 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럴 즈음 공항에 도착을 했다. 나는 그와 작별을 하기 전 가지고 온 선물을 주었다.

그 중에는 도자기 다완이 한 개 있었는데 워낙이 도자기 선생인 다께우찌한테 그것을 준다는 것이 좀 걸렸다. 그래서 다른 친구에게 그것을 주려고 했지만 와이프가 선뜻 그것을 다께우찌에게 주라고 했던 것이다. 무슨 결정을 할 때는 칼로 무 자르듯 하는 와이프가 때론 신기하게보일 때가 있는데 그 일도 그랬다.


그 도자기로 말하면 한참 전에 문경의 절간에서 선물로 받아 온 것인데 아주 특이한 다완이다. 나는 도자기를 잘 모름으로 그 그 그릇의 생성과정에 대한 가치는 잘 모르지만 그 모양 자체가 기이하다.

색은 짙은 암버 색과 약간은 밝은 시엔나 색하고 섞여서 무겁게 느껴지고 짐짓 깊이감을 자아내지만 사실은 무지하게 얇고 가볍고 표면이 거칠고 모양도 조금은 경박하다 하겠다.

거기다가 위 아가리 부분은 원형이 아니고 한 쪽이 약간 찌그러졌다.

그래서 그런 것은 늘 신세만 지는 친구에게 준다는 것이 걸렸다.


또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니라서 그 가치도 정확하게 모르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는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아는 법이고 그 친구는 그 도자기의 가치를 나처럼 겉 넘지를 안했다. 나중에 귀국 후 전화가 왔는데 나는 준 것도 잊고 있었는데 그 도자기 이야기부터 하면서 대뜸 “무지하게 비싼 거지? ”하는게 아닌가?

그 말에 나의 우매함 때문에 명품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 들어가서 수속을 마치고 길기만한 게이트까지 한참을 걸어갔다.

그 사이 여러 개의 면세점을 지났지만 결국 나는 선물 한 개도 사지 못했다.

외국 여행을 여러 번 했지만 이번처럼 철저하게 쇼핑을 못한 경우는 처음이다. 못한 정도가 아니고 한 개도 없다.


일본 작가들이 선물로 준 과자하고 종이 사케 몇 개 다께우찌가 준 쥬수 캔 몇 개 그게 일본서 한국으로 가지고 가는 전부이고 내가 돈을 주고 산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이제 한국에 없는 것이 없고 어차피 자잘한 것을 사가지 가보니 집에서도 반기지도 않고 오히려 짐만 되는 통에 그렇다. 그렇다고 눈이 확 튀어나올 만큼의 명품을 살 형편도 그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이처럼 된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이 비슷할 것 같다.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약간 귀가 아픈 사이에 착륙을 해버린다.

우리는 일행과 작별을 고하고 셋이서 내 차를 타고 또한 평촌과 분당으로 돌아오니

드디어 4박 5일의 여행이 거짓말처럼 후딱 끝나버렸다.

하지만 즐거웠던 기억은 돌 판에 새긴 기억처럼 또렷하기만 하다.

가끔씩 생각의 가방에서 꺼내 참기를 묻힌 걸레로 문질러 기억이 더욱 윤이 나도록 문질러 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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