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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환 칼럼 ■

[스크랩] 통도사를 다녀와서

작성자김석환|작성시간06.09.10|조회수103 목록 댓글 0
 

오랜 만에 통도사엘 가게 되었다 엄밀히 말해 통도사 입구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오랜 동안 한번 내려오라는 친구의 간곡함도 있고 해서 나는 차를 몰아 달려갔다.

4시간 넘게 달려서 통도사에 도착을 했지만 일 때문에 서울에서 내려오는 친구는 두어 시간은 더 걸려야 도착을 하는 지라 나는 먼저 내가 아는 ‘니산 도예’에 들렸다.


그곳에 있는 장작 가르는 기계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오래 전부터 작업실 근처에 계시는 선배분이 그 나무 빠개는 기계를 만들고 싶어 하셨는데 마침 우리 친구 중에 그런 것을 잘 만들 수 있는 친구가 있고 그 원형이 그 공방에 있고 해서 마침 내려 온 김에 그것을 먼저 사진을 찍어 그런 것을 잘 만드는 또 다른 친구에게 보여주고 비용이 어느 정도 드는지를 뽑아 봐서 제작 가능성을 타진해 봐야 하는 것이다.


전부터 어느 정도 알음이 있는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이리 저리 사진을 찍고 설명을 듣고 한 후에 생각을 해보니 전에 대충 봤던 것보다 제작이 훨씬 어려울 것 같다. 거기다 주인의 제작비용을 들으니 만드는 것이 장난이 아닐 것 같다.

그래도 이 구석 저 구석을 찍은 후에 친구가 기다리라고 한 다실 ‘다요’로 갔다.


미리 전화를 받았는지 친구와 주인 여자가 차를 대는 곳까지 나와서 여간 친절하게 맞이해 주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이처럼 친절한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 처지거늘 너무 분에 넘친다 싶다.

다실 다요는 여기 저기 주인의 따뜻한 손길에 익고 익어서 어느 구석 카메라 앵글에 구도가 안 맞는 곳이 없다.

특별히 돈을 들인 구석은 없어 보이지만 갖가지의 야생화와 장신구의 적당한 배치와 흙벽과 한옥 부자제의 조화는 시골정취와 잘 어울리게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참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은 후에 자리에 앉으니 주인이 들어 와서 차를 내려 주는데 일곱 가지 차 성분이 들어간 특별히 만든 차로 좀 강하기는 하지만 맛이 그만이란다.

냄새에 둔한 나로서는 그 강함이 오히려 좋기만 하다.

주인의 조심스런 말투는 착 가라앉아서 듣는 나도 덩달아 가라앉게 만든다.

그 잔잔함이 인생의 오랜 연륜에 의해서 만들어진 어투라서인지 몸에 밴 안정감이 듣고 보기가 좋다.


원래 차를 좋아 했고 그러다 보니 다기도 여럿 모았고 또한 이처럼 다실도 만들게 되었으며

모든 실내장식을 이 개월에 걸쳐 직접 만든 것이란다.

사실 둘러보니 특별한 재주를 부려 장식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수수하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솜씨의 장식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다기들이 여러 종류고 갖가지며 문외한이 내 눈에도 모두가 특징이 있는 그 나름의 작품성이 돋보이는 것들이다.


그 중 균열의 미를 잘 살린 한 개를 가리키며 특별한 느낌이 난다고 하니 안으로 들어가 같은 작가의 같은 기법의 다완을 한 개 들고 나오는데 그것은 더 특이해서 균열의 특이함이 꼭 나무들을 그린 풍경화 같기만 하다고 했더니 그러잖아도 어떤 산수화 그리는 화가 손님이 와서 그런 비슷한 말과 함께 자기에게 넘기라고 했단다.

건성으로 대답은 했지만 건넬 마음이 없어서 지금도 고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끼는 것은 왜 줍니까? 그냥 고이 간직하세요” 하니 자기도 고개를 끄덕인다.

우연한 균열에 의해 만들어진  선의 느낌이 그처럼 특별한 느낌을 자아내니 그런 느낌은 분명 두 번 만나기가 힘들 것이다.

장인의 손길과 고민을 떠나서 그처럼 우연하게 경이로운 작품이 만들어 지는 것이 역시 장작 가마의 특별한 맛이고 또한 그런 우연의 효과는 예술 영역에서나 가능한 경이로움일 것이다.


언젠가 어떤 도예가가 조그만 진사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색이 너무도 오묘해서 자기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색으로 너무나 감탄스럽기만 할 뿐인데 누군가가 그것을 알아보고 엄청난 가격에 팔라는 것을 한마디로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런 색깔이 도예 만들기 수십 년에 처음이고 앞으로도 그런 색이 나올 가능성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코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그런 작품이란 것이다.


그 당시 그 말을 듣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 작품을 보니 무지한 나로서는 그 작가의 특별한 느낌에 다가 갈 수가 없었다. 비록 그림을 그리는 나지만 역시 색에 둔하다 보니 그런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도자기 면에 터져서 만들어 진 선들의 나열은 분명히 오묘한 조화 그 자체이고 감탄스럽기만 하다.


그럴 즈음 친구가 도착을 하여 우리는 이야기와 함께 수제비를 한 그릇씩 시켜 먹었다. 녹차와 밀가루를 섞어서 만들었다는 수제비는 또한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별스런 장소에서 별스런 음식을 먹으니 그 맛이 더욱 배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친구의 숟가락질은 영 신통치가 않다.


어제도 밤늦게 까지 과음을 하고 오늘 아침, 점심을 굶었지만 특별히 밥맛이 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근 삼 개 월을 그리 지나고 있단다. “오늘은 술 못 먹는 나를 만났으니 술을 거르게 될 것이고 너무도 잘 된 일이군!”하였지만 그 친구는 오랜 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매일 술과 시원찮은 밥 한 끼로 그처럼 오랜 시간을 버틴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 친구가 특별히 안색이 나빠 보이지 않으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런 삶의 방식은 잘못 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늘 즐거운 마음으로 살면 다 괜찮다는 친구의 말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이어서 자기 토굴에 가자고 하여 따라 갔다.

원래 멋있던 옛날식 정자에서 서너 해를 살았는데 정리하고 나와 이곳에 자리 잡게 된 지가 얼마 안 된단다.


비가 샜던지 비닐로 지붕을 온통 둘러쌓은 방이 두 개인 시골집을 스님 한 분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자기에게 방 한 개를 줬단다.

따라간 집 안채를 지나 고추밭과 배추 밭 사이를 수십 미터 지나가면 또한 작은 텃밭과 함께 자리한 남향의 조그만 집이 있는데 작은 마루와 부엌이 있는 방이 두 개인 집으로 정면 방은 스님의 방이고 옆방은 친구의 방이다.


방안에 들어서니 그 바닥에 놓여있기도 하고 벽에 걸려 있기도 한 그 친구의 그림들, 다구가 놓여 있는 차상, 누구로부터 선물 받았다는 목어, 별 그림, 개량 한 복 몇 벌, 향꽂이와 약간의 책들 등이 한지로 잘 발라진 사면의 벽 안에 갇혀 있다.

잡다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정갈하게 놓여져 있는 모습은 구도자의 방 그 자체다.

사실 한 켠에는 정한수인 듯한 물 한 그릇이 놓여 있다.

딱히 누구에게 라고 할 것도 없이 기도를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런 ‘정처’가 있는 그의 모습과 정처가 없이 떠돌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아주 대조적이기만 하다는 생각이 일견 들었다.

그래서 인지 그는 무엇인가 자기의 확신에 찬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려고 애쓰는 모습이지만 내가 보는 것은 한 쪽 눈에서 다른 눈으로 흘러 빠져나가고 듣는 것도 한쪽 귀에서 다른 귀로 빠져 나가기만한다.

선물이라며 나무 판 위에 있는 도자기 중에 밥그릇 하나를 집어주는데 유약 칠 해 진 모습이 마치 오래 사용해서 닿은 것 같은 모양으로 앙증맞은 크기와 함께 그 정겨움이 언어 표현 이상이다.


친구가 준 도자기를 가슴에 보듬어 안고 방을 나와 우리는 니산 도예로 갔다.

거기서도 이미 잘 아는 사진가 내외와 니산 도예 주인 내외가 이미 멋 진 저녁을 막 마친 후였다. 사실 우리에게도 ‘꼼장어’ 무침 저녁을 같이 할 것을 권했지만 간발의 차로 불발이 되었었다. 하지만 아직 그 잔재가 남아 있는 지라 이미 부른 배에도 불구하고 젓가락질을 또 할 수밖에 없었다.


휘황찬란한 만월을 감싸며 오락가락하는 구름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시골에 사는 이들의 커다란 기쁨 중에 하나 일 것이고 불로 소득 중에 하나 일 것이고 공짜로 느끼는 즐거움중의 하나 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앉아 있는 마루 끝과 내 등 뒤의 벽 사이의 틈을 빠져나와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 넝쿨 같은 줄기가 하나 오롯이 지붕 쪽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그것이 담쟁이 넝쿨이 아니고 더덕이란다.

아니 햇빛 가리개 지붕이 있는 공간에 그런 식물이 자라고 혼자서 유독 씩씩하게 벽을 타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원래 평상이 없던 그 곳은 더덕 밭이었는데 붙박이 침상을 만들기 위해 다 뽑아 먹고 마루를 깔고 got빛을 살짝 가리는 ‘썬라이트’ 지붕도 만들어 달았는데 어느 날 용케 뽑히지 않고 살아남은 한 놈이 그 틈 사이로 삐져나와 자라기 시작해서 지금은 이리도 크기만 하단다.


작년 봄에 친구와 양구에 가서 생전 처음 더덕을 캤던 생각이 난다. 친구가 가르쳐 준 대로 열심히 더덕 잎을 찾아 캐서는 집에 가지고 와 술을 담 근 것이 지금 냉장고 위에 덩그런히 있는데 그 때의 더덕 입 줄기라는 것이 한 뼘이 넘을까 말까 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도대체 이 벽을 타고 간 줄기는 삼 미터는 족히 될 터이니 그 뿌리는 얼마나 영글었을까 생각하니 은근히 탐까지 났다.


흰 벽면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할 때는 방해가 안 되도록 더덕 줄기가 타고 올라간 끈을 이리 저리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져 놓고 맨 끝은 고리에 연결을 해 놓아서 평상시에는 이처럼 지붕 쪽으로 걸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처럼 이리저리 움직이게 만들어 놓은 것이 인간에게는 편리한 노릇이지만 더덕으로서는 좀 번거롭고 자라기에 불편하기만 할 법한데 입이 무성하기만 하니 그 또한 신기하기만 하다.

시골 생활의 여유가 참말로 별스런 자연과의 교감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조금 남은 ‘꼼장어’ 무침을 작살을 내고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분들과 인사를 하고 친구가 가자는 야외카페로 갔다.

그 근처에 있는 그곳은 또한 묘한 곳이다. 원래는 언양 일대를 먹여 살리던 자수정을 캐던 탄광지대였지만 지금은 폐광이 된 곳으로 일부는 체험학습장으로 쓰기도 하고 우리가 간 곳은 야외카페로 이용하고 있는 그런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이상하기만 한 그런 곳이다.


넓은 공간에 덩그런 하게 동그란 연못이 있고 그 한 가운데 정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가 말하자면 무대고 연 못 주변 나무 밑으로 간이 탁자와 의자가 있어 객석 겸 술자리인 셈이다. 우리가 도착을 하니 손님은 한 명도 없는데 그 정자 안에서 한 명은 섹스폰을 한 명은 전자 피아노를 연주 중이다.

우리 둘이 자리를 하니 약간 고지대이고 늦은 밤이고 또한 늦여름의 날씨라서인지 시원한 정도가 아니고 춥다.

반팔 차림의 나로서는 추위를 견디기가 만만하지 않다.

추위를 이기려면 양주를 먹어야 한다면서 친구가 10만원을 내 놓으면 알아서 해 달란다.

이미 그들은 다 내통이 되어 있는 사이들인 듯 거래가 아주 간단하다.


자리에 앉아 내온 간단한 안주에 양주 한 모금을 꽉 찬 뱃속에 살짝 부어 넣으니 속이 적당히 얼얼한 맛이 술 못 먹는 나도 알맞게 좋다.

이어서 먼저의 그 두 분이 연주를 한다. 무지하게 감동스런 그런 상황이 쉽게 될 법한 일이련만 딱히 그럴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그 환경에 취했다.

거푸 몇 잔을 마시던 친구는 맥주를 또한 더 시켜 섞어찌개로 위 속에 붓고는 무대로 나간다.

원래 가수인 친구는 두어 곡을 같이 하더니 아예 혼자 무대를 독차지 하고는 열심히 불러 젖힌다.


주인이 빌려 준 긴 옷에도 불구하고 춥기만 한 나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친구가 노래가 끝날 때마다 ‘앵콜’이란 말없이 박수만을 쳤다.

친구는 그 분위기에 자기를 함몰 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것 같았고 나도 그런 친구의 맘을 헤아려 흥을 돋우고 박자도 맞춰줘야 하겠지만 그게 잘 안되었다. 추위가 흥을 뺏어 갔다.


주인도 추운지 자리를 옮기잖다.

우리는 적당히 주변을 정리하고 그 괴상하기만한 야외카페를 나왔다.

아마 그 카페는 올 영업을 이번 주 까지만 해야 할 것 같다. 그 넓은 곳에 천막을 칠 수도 없을 것이니 추위에 떠는 손님들을 마땅히 붙들어 놓을 만한 용 트는 재주가 없는 한 그리 될 것이다.


시내에 다시 나와서 친구와 그 음악가들은 술을 한잔 더 할 모양이다.

나는 원래 친구의 방에서 자기로 한 계획을 포기하고 그들과 헤어져 찜질방을 택했다.

‘동양 최대의 찜질방’이라는 간판에 걸맞게 값도 팔천 원으로 시골치고는 비싸고 컸지만 사람은 없어서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하다.


옷장에 옷을 집어넣고 샤워를 한 후에 나의 잠자리 무기들을 챙겨서 찜질방이란 방향표시를 보고 귀신에 홀린 사람이 그러하듯이 약간 미로 같은 복도를 마냥 따라가니 드디어 넒은 공간에 도착하게 되었다.

나는 파란 불이 켜져 있는 아무도 없는 커다란 방에 들어가 여러 장의 얇은 요를 겹으로 깔고 한 장의 요로 둘둘 말아 베개를 만든 후 나머지 한 장을 대충 엉성하게 몸에 감고는 나 혼자만의 잠을 깊이 자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파리가 날 집요하게 건드려 쌌다.

한 참을 발버둥 대다 결국 밖으로 나왔다. 수면실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고 그 안에 부부인 듯한 사람이 널브러진 포즈로 자고 있는 조그만 이층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귀마개를 한 내 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소리가 있다.

사람이 내는 소리 같으면 귀마개와 눈 덮개로 중무장한 나의 잠을 여간해서는 방해 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건 무슨 물 떨어지는 소리다.

처음에는 찰랑 대는 소리를 내다 갑자기 “철부덕!”하는 소리가 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계속 작든가 계속 크던가 하면 별 문제가 없으련만 들릴락 말락 하다 갑자기 커지는 소리에 미칠 지경이 되는 것이다.


하도 궁금해서 일어나 내려 보니 그게 작은 물레방아다.

물이 조금씩 차다 다 차면 “철부덕!”하고 떨어지는 것이다.

내려가서 물 흘러내리는 꼭지의 방향을 틀어 놓을까 말까하다 그래도 그 전모를 제대로 알았으니 귀마개가 내 잠을 해결해 주겠지 하며 그냥 누웠다.

역시 사람의 관념은 허접대기 잡소리보다 훨씬 위대한 것이다.

나는 깊은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옆에서 자던 부부중 남편인 듯한 사람이 그 아내를 소리에 이침이 되었다. 몸에 손을 대면 안 되는 사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무 데고 잡고 흔들어 깨우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 깨우는 바람에 남까지 깨운단 말인가? 인간들은 대부분이 자기중심적인 동물이다. 사자들도 사냥할 때는 협동을 하건만 인간들은 그저 남 생각이나 같이 살겠다는 의지가 빈약하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같이 살려면 기본적인 룰이 필요한 법이다.


머리카락을 안 말리고 잔 덕에 온통까치머리를 한 모습으로 목욕탕으로 가서 이 닦고 샤워한 후에 옷을 챙겨 입고 친구의 집으로 갔다. 친구와 함께 장이 선 골목을 적당히 구경을 하며 시장통 해장국집에 도착 했다.

시장통에 어울리지 않게 적당한 품위와 약간의 미모를 겸비한 주인아줌마가 내온 해장국은 우선 정갈하고 시원해 보인다.


나는 먼저 약간은 퍽퍽한 선지를 숟가락으로 쪼개 먹어 ‘건데기’를 죽인 후 밥을 말아 아침치고는 좀 과하다 싶게 먹었다. 그 만큼 맛이 있었다.


식사 후 어제 만남 사진가 내외가 하는 한복집에 들렸다.

손님맞이로 나온 것이 마침 내가 좋아 하는 냉동고에 얼린 황남빵이다.

누가 호도과자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 따뜻한 호두과자를 얼른 냉동고에 넣고 나중에 조금씩 꺼내서 가스렌지에 데워 먹으면 그만이란 말을 한 적이 있다. 언젠가 그리 한번 해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비슷한 맛을 음미하게 된 것이다.


늦은 아침을 배불리 먹은 배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상황이지만 나의 식탐은 그리 쉽게 포기하고 돌아앉을 리가 없는 지라 몇 개를 거푸 집어 먹었다. 배를 걱정할 즈음 갑자기 입구에서 “안녕들 하시지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어찌나 청아하고 확신에 찬지 안녕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다.

이어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나는데 멋있는 벙거지 모자에 얼굴이 다부지게 생긴 한 스님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 양반은 말도 걸걸하니 시원시원 했지만 말끝마다 너털웃음이고 그 웃음이 엄청 길어서 좀 어색할 정도다.

그래도 그 웃음 가득한 얼굴에 좀 시끄럽다손 치더라도 아무도 얼굴을 찡그릴 수는 없을 그런 모습이다.

나이가 우리보다 두어 살이나 많을까 싶은데 나보다 대여섯이 위인 내가 아는 어떤 선배화가가 자기한테 형이라고 부른단다.

의아해서 물으니 예순 둘이란다.

너털웃음에 잠시 나이를 홀린 모양이다.

알고 보니 그이가 우리 친구의 옆방에 사는 바로 그 분이란다.


그러다 막 나오려는데 그 한복집 주인이 나한테 선물이라며 윗도리 개량한복을 한 벌을 입어보라고 주는 것이 아닌가?

청바지에 작업복으로 입으라며 건네주는데 황토물과 감물 등으로 천연 염색을 한 면 옷으로 그야말로 작품인 옷이다.

그러잖아도 탤런트 이영애한테 급히 전해 줘야 할 옷이 있는데 오늘 서울 올라가서 내가 직접 전해 주고 그 녀도 만나 볼 생각이 없냐고 농담으로 말하던 그녀니 그녀의 옷의 솜씨가 사실 예술 자체인 그런 훌륭한 옷이고 그 만큼 알아주는 분이다.


크기도 마치 자로 재서 재단이라도 한 양 너무도 딱 맞으니 참으로 별스럽다는 생각이다.

내가 올 줄 알고 준비한 옷도 아닐 것이고 어제 늦은 밤에 돌아오자마자 내 옷 만을 만들었을 리도 없고 설령 그렇더라도 어찌 눈짐작만으로 재단해서 이처럼 정확히 맞는 다는 말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하면서 그 집을 나와 다시 친구의 집으로 가 스님 방에 자리하고 앉아 차를 마셨다.


스님의 너털웃음과 함께 차를 마시는 동안에 스님 손님인 모녀와 친구 손님인 내가 아는 울산의 사진작가해서 방이 제법 꽉 찼다. 이야기는 역시 그 방의 주인이 주로 이끌어 가고 그 때마다 목젖이 훤히 다 보이도록 너털웃음을 웃어 싸는데 자세히 보니 편도선이 안 좋았다. 군에 있을 때 이비인후과에 간호 보조로 있던 나의 얼치기 의료지식으로 볼 때 그 양반 가끔 편도선으로 고생할 것 같고 의사를 제대로 만나면 그거 떼 내는 수술도 받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 양반이 내 직업을 들더니 자기가 아는 어는 화가 이야기를 하는데 참으로 특이한 이야기이다.

그 화가가 어찌나 효자로 소문이 자자하던지 지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나 궁금하던 차에 마침 그 양반의 화실에 같이 가게 되어서 궁금증도 풀 겸 갔는데 역시 그 작업실에 가니 먼저, 그 뒤로 십오 분 거리에 있는 그의 어머니 무덤으로 자기를 데리고 가서는 꼭 살아 있는 이한테 그러듯이 “어머니! 저 아무개 왔습니다.” 하고는 절을 하더란다.

다음 날 아침에도 똑 같이 “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더란다.


그러기를 매일같이 한단다.

그 옛날 삼년시묘라고 해서 부모님 무덤가에 움막을 짓고 살아 계실 때와 똑같이 모시기를 하였다지만 지금 세상에 그처럼 작업실을 어머니 묘 앞에 지어 놓고 기한도 없이 그처럼 한다는 것이 너무도 특이하기만한데 내막을 들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 화가분이 덜 유명했을 때인지 그림을 그려서는 개인전을 하는데 할 때마다 그림은 팔리지도 않고 가계만 축내기를 반복하기에 그 부인되는 사람이 그 화가가 또다시 개인전을 하려는 어느 날 화가 나서 그 화가의 그림들을 내동댕이쳤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화가의 어머니가 놀래서 그만 절명을 하셨다는 것이다.

화가 난 그 화가는 그 뒤 그 부인하고 이혼을 하고 용인 공원묘지에 어머니를 안장을 한 후 살아 계신 분한테 그렇게 하듯이 매일 같이 들락거릴 때마다 인사를 한다는 것이다.


너털웃음만 웃고 우스갯소리만 하던 스님이 그런 말을 할 때 나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림 그린다는 일이 그런 것이다. 적은 가능성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제멋에 겨워서 사는 삶 그것이 환쟁이의 삶이고 그것을 곁에서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인내와 사랑이 없으면 같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이야 절대적인 것이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면서 자식에 대한 기대를 끝까지 부둥켜안고 살 수 있는 것이지만 남으로 들어온 아내의 인내야 어디 그리 길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그의 삶이기 이전에 모든 예술가들의 삶이고 또한 나의 삶의 분명한 모습이기에 나는 엄숙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스님과 젊은 아줌마가 시장 구경을 간다며 나가고 나는 친구의 방으로 돌아와 친구와 ‘짬봉’을 시켜 먹고는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약간은 졸린 눈으로 맴맴하면서 시간 까먹기를 하는데 고구마를 사 왔다면서 같이 먹자기에 안방으로 건너가 다시 차와 고구마를 들으니 부른 배에도 불구하고  막 쪄 낸 뜨거운 밤고구마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대부분의 낮 시간을 하릴없이 다 까먹고 우리는 작은 음악회가 있을 김해로 향했다.

어제 밤잠을 설쳐서 인지 얻어 탄 남의 차에 멀미 기운이 약간 있을 즈음 김해에 도착해서시내 한 복판의 불교 포교당 같은 곳에 마련 된 음악회장에 들어섰다.

이 근방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클럽을 만들어서 한 달에 한 번씩 음악회를 갖고 또한 그것을 전 세계에 인터넷 중계를 하는 모양이고 우리 친구가 몇 번 초대되어 왔던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한 참 후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음악회가 시작되었고 맨 먼저 우리와 같이 간 김 선생의 ‘가야금 산조’가 연주된다. 원래 가야금의 원조가 가야국이고 마침 여기가 그 옛날 가야국이었으니 그의 연주는 딱 안성맞춤인 셈이다. 국악이 워낙 조용한 음악이라서 맨 먼저 넣은 모양이다. 그런대로 둔한 내 귀에 잔잔한 즐거움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같이 간 친구 옆방의 스님이 나와서 ‘상춘가’가라는 곡을 부르는데 처음에는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가라앉았지만 갈수록 트인 목소리가 나오는데 그 탁 트인 소리가 너무나 듣기가 좋았고 그 분의 일상의 가벼움을 한 방에 뒤엎어 날려버리는 그런 소리이다.

사실 그 분은 범패의 대가란다.

마침 음악회 있기 전에 시간이 나서 안 보이더니 음악회 바로 직전에 나타나서는 무슨 테이프를 보여주는데 그것을 사오는 중이라는 것이다.


마침 여기 근처에 불구 파는 곳이 있어 가보니 자기가 30년 전에 부른 것이 있기에 사왔다는 것이다. 삼십년 동안 생전 신경도 안 쓰고 있던 것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사 왔다는 그런 투다. 유명한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 한 것으로 봐서 불교 음악이지만 나름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던 모양인데 그처럼 문득 생각난 듯이 한다는 것이 납득이 안갈 정도다.

암튼 그게 한 개 있기에 사왔다는 것이다.


그처럼 나름의 일가가 있는 분의 목소리라서 인지 상춘가는 듣기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아무도 가야금 산조 때와 마찬가지로 ‘앵콜’을 위치는 사람은 없다.

이어서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역시 목소리가 우렁찬 우리 친구가 제일 인기가 좋았다. 앵콜곡도 여러 곡하고 끝 무렵에는 다시 나와 몇 곡을 더 불렀다.

노래 부르기 전에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막걸리를 먹어야 하는 우리 친구는 이번에도 두어 잔의 막걸리를 들이켜서인지 목소리가 우렁찬 것이 나도 듣기가 좋았다.


그런데 사실 더 듣기 좋았던 것은 어느 여자 가수의 노래였다.

그녀는 허연 새치가 꽤 섞여 있는 머리에 어깨가 훤하게 들어난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적당한 미소에 가지런한 이를 한 우리또래의 운동가요 전문 가수 인 모양인데 그녀가 입이 아닌 가슴으로 부른 ‘산사에서’란 곡이 너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특히 그 ‘길가의 낙엽은 발목을 붙잡고 절간의 종소리는 세상의 이치를 일깨운다“는 부분은 그녀의 표정과 함께 각인되어 하나의 감동적인 그림을 보는 기분이었다.


원래 하룻밤을 김해에서 자기로 하고 왔지만 우리는 그냥 통도사로 넘어가기로 하고 모두 통도사로 돌아와 다시 스님 방에 자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문제의 그 테이프를 듣는데 목소리를 길게 빼는 우리나라 전통 가곡의 맛이 참으로 청아하게 우러나오는 그런 목소리의 그런 노래였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시골을 가다 갓을 맨 어느 노인이 시골 논 한가운데의 정자에서 부르던 그 노랫소리 같았다. 자연을 향해 듣는 이 없이 자기 흥에 빠져서 내 지르는 소리. 인간이 내는 소리가 아닌 대지의 기운이 지르는 그 소리 그거였다.

그런 훌륭한 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내 앞에 앉아 나에게 차를 딸아 주고 있는 현실이 믿어 지지 안했다.


늦은 시간으로 그 소리를 몇 분 듣지 못하고 우리는 식당으로 가서  술잔을 대했다.

나는 빨리 찜질방으로 가고만 싶었지만 사진작가인 우 선생하고 우리 친구는 술이 더 고팠다. 나는 할 수 없이 자리를 채우고 앉아 쓴 소주를 한 잔 반이나 마시고는 겨우 그들을 부추겨 자리를 일어 날 수가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찜질방에 가서 또한 나 밖에 없는 커다란 방에 자리를 깔고 잠자리에 드니 늦은 잠에 곤하기만 하다.


아침이 되어 옆에서 나는 핸드폰 소리에 나도 덩달아 잠에서 깨었다. 한 번 울렸으면 얼른 일어나서 나가던지 잠그던지 하면 될 것을 계속 울리게 내버려둔다.

분명 어제 늦은 밤에 잘 때는 나 혼자였는데 내 잠을 깨기 위해 일부러 들어온 사람이 있나보다. 역시 인간은 동물의 본능적 생활방식에 훨씬 못 미친다.

인내로 계속 ‘뒹굴렁거리다’ 일어나 샤워하고 통도사 경내로 들어가 백운암에 올랐다.

약간 안개가 낀 산의 정취가 정처 없이 탁하기만 한 내 마음을 정하게 만드는 것만 같아서 너무 좋았다.


암자에 올라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온통 안개구름뿐으로 보이는 것이 없다.

그저 허허로운 내 마음만이 구름위에 둥실 떠다니는 것만 같다.

산을 내려와 빈속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추풍령 휴게소에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고 집에 오니 이박삼일이 한 마장의 꿈 마냥 지나가 버렸다.

 

 

 

 

 

 

 

 

 

수제비.

 

벽을 타고 자란 더덕.

 

만월.

 

만월과 등.

 

연못 속 정잠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친구.

 

 

 

 

 

 

 

 

 

백운암 오르는 길.

 

배운암에서 바라 본

 

배운암 뒷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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