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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회의 실상

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4. 고난의 행군1- 농촌 아낙네로 거듭나기

작성자무시칼수록 용감해져야 한다|작성시간16.09.24|조회수984 목록 댓글 5

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4. 고난의 행군1-농촌 아낙네로 거듭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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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북녘동포
기사입력: 2016/09/23 [18:3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시절 최전연 군부대를 찾아왔다가 돌아간 길을 바라보며 환송하는 북 여군들, 이런 최전연 부대까지 부대가 있는 곳에는 관련 군인가족들이 생활하는 마을이 있는데 북은 그런 마을에서 농사를 지어 군인들을 보살피는 자력갱생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딸이 3살이던 1997년 남편이 군부대 려단군의소 군의관으로 임명받아 우리 식구는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내 나이가 29살이라고는 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한시도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본 적 없고 더욱이 지방에 전혀 가본 적 없는 나로서는 참 당황스럽고 두려웠다.
부모, 형제를 떠나 멀리 지방에서 그것도 군인가족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연약한 내가 꽤 감당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안해로서 남편이 가는 길을 어차피 따라야 하니 나는 마음을 다잡고 가족들과 재미있게 생활하던 직장동료들의 바래움을 받으며 기차를 타고 내가 나서자란 정든 고향, 평양역을 떠났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사방 산들에 둘러쌓이고 주변에 자그마한 마을이 점점이 자리 잡고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는데 처음으로 접하는 시골풍경이라 다소 신비스럽기도 하였다.
그 마을 곁에 우리 군부대가 있었고 한번 시내로 나가려면 1시간정도 차를 타고 가야했다.

 

평양의 온수난방아파트에서만 살다가 지방의 석탄을 때야하는 단층집에서의 모든 생활은 많이 낯설었다.

 

지방에 내려와 그곳 산골사람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고난의 행군“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기부터 우리 북녘에는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우선 극심한 자연재해, 홍수와 가뭄으로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들었고 계속되는 경제난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또한 북은 고난의 행군 전까지 동유럽에 트랙터 등을 대량 수출하는 등 세계 진보적 국가들과의 교역이 활발했었는데 소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로 복귀되면서 사회주의시장이 무너졌다.

 

다음으로 미국과 제국주의 연합세력이 세계 최악의 대북경제봉쇄정책으로 에너지와 식량을 수입할 수 없도록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우리는 호시탐탐 북을 붕괴시키려고 남쪽에 많은 핵무기와 세균무기를 끌어들이고 해마다 한미군사훈련을 진행함으로써 한반도에 항시적인 전쟁위협을 가져오는 상황 속에서 다시는 외세에 나라를 빼앗길 수 없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핵위협에 대처하여 핵억제력을 키워나가야 했다. 바로 선군정치였다. 

 

▲ 북 영화 '자강도 사람들'이란 고난의 행군 극복기를 담은 북 영화에 나온 대용식품들, 고난의 행군시절 멀을 것이 부족하자 니탄(이탄)이라는 흙까지 파내어 밀가루 등과 버무려 니탄떡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니탄 중에 갈대니탄만 먹어도 큰 해는 없다고 한다. 그저 허기나 달래는 음식이지 무슨 맛이 있겠는가.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식량이 부족하여 인민들에게 식량배급을 할 수 없었으며 전기가 없어 저녘마다 캄캄한 방안에서 등잔불과 함께 해야하는 등 일상생활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웠다.

 

흥년 세월엔 뱀이 조이삭을 먹는다는 말도 있다.
사람도 먹을 게 없는데 집에서 기르는 개들도 먹을 게 없으니 강냉이 밭에 들어가 풋강냉이가  익기 전부터 먹어버리군 하였는데 그래도 얼마나 여위였는지 배가 등 뒤에 가 붙어 마치 굶주린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강에는 물고기가 자취를 감추고 산에는 산짐승이 말라버렸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어린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송기떡을 해먹기도 하였다.
소나무 껍질을 삶고 삶아 부드럽게 한 후 거기에 강냉이 가루를 뿌려 범벅을 하면 송기떡이 된다.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시절 정말 어려워 나물죽을 먹고 식사를 거르는 일도 있었지만 누구도 국가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모든 주민들은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 후대들에게는 외세의 침략이 없고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였으며 그 길에서 자신의 청춘과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쳤다.

 

북 주민들은 ‘지금의 고난이 일시적이며 당과 수령만 믿으면 앞으로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고한 신심으로 가득한 혁명적락관주의 속에 하루하루를 내 나라 부강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현 국무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이 끝난 후 잘 정리된 군부대를 현지지도를 하는 모습, 고난의 행군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유난이 최전선 부대 현지지도를 많이 나갔다. 김련희 씨의 수기를 보니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이겨내자며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고난의 행군”의 전 기간을 지방에서 보냈다.

 

부대주변의 농장마을 집에 가보면 하얀 쌀은 눈에 보이지 않고 노란 강냉이쌀(옥쌀)이 드문드문 있고 대부분 산나물이나 감자를 썰어넣어 만든 잡곡나물밥이었다.
어떤 집은 감자 2알로 한 끼를 때우기도 하였고 손님이 오면 제일 난처해해서 일부러 식사 때를 피해 방문하군 하였다.

 

우리 부대에서는 군인들에게 3끼 밥이 다 차례졌지만 아침, 점심식사를 하고 저녁때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군인들이 자신에게 차례진 밥을 줴기밥(주먹밥)으로 만들어 부대 주변 마을 어린이가 있는 집들에 가져다 주군하였다.
그러면 그 집 아주머니들이 다시 부대로 찾아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우리보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먹어야 한다며 항의하군 하였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그 집 문 앞에 몰래 놓고 도망가군 하였다.

 

우리 어른들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만은 절대로 굶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군인가족들의 생활도 넉넉지 않았다.
국가에서 군인들에게 고기와 부식물을 넉넉하게 공급해 주지 못해 우리 군인가족들은 자신들의 가정살림보다 군인들의 식생활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했다.
우리는 군인들에게 고기를 충분히 먹이기 위해 한 해에 고기생산을 80㎏ 수행해야 했다.

 

▲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 후 새로 개건한 인민군 군부대 축사를 현지지도 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련희 씨의 수기를 보면 고난의 행군 당시에는 이런 현대적인 축사나 변변한 사료가 없어 군인가족들이 풀을 뜯고 먹이감을 모아  이런 가축을 길러 군인들을 먹였다고 한다.

 

군인가족들이 집에서 돼지나 염소, 토끼, 오리, 게사니(거위), 개, 등을 길러야 하는데 사료를 대주지 못해 한 가족당 200평의 밭을 나누어주어 그 밭에서 농사를 짓고 집짐승을 길러 부대군인들이 먹을 고기를 보장하게 하였다.

 

군관인 남편과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혼자서 하면서 200평의 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고 집짐승을 길러 한해 80㎏ 고기생산을 해야 하며 부대 군인들이 집 생각을 할세라 명절마다 집에서 갖가지 음식들을 만들어 부대에 나가 군인들의 식탁도 차려주는 일들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우리 부대 군인가족들이 총 30여 가구 정도였는데 모든 가족들이 하루 종일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집에 있는 돼지에게 끼니를 끓여주어야 했고 틈나는 대로 토끼풀을 한 바구니씩 뜯어와야 했다.

 

평양에서 부모님 곁에서 고이 자란 나로서는 너무나 벅차고 힘겨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소하고 어려운 농사일이었지만 국가에서 우리 군인가족들을 믿고 군인들의 생활을 맡겨주셨는데 남들에게 질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야심차게 농사일을 배워갔고 짐승도 길렀다.

 

하지만 처음부터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손에 호미자루 한번 쥐어보지 못한 나에게 200평의 밭이 까마득해 보였고 남들이 몇 고랑을 김맬 때 겨우 한 고랑도 채 못나가는 정도였다.
손에는 물집이 생겨 아렸고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 허리가 쑤시고 다리가 퉁퉁부었으며 저도 모르게 설음으로 눈물이 쏟아졌고 부모님이 그리웠다.

 

우리 부대 군인가족들은 평양에서 와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로 힘들어 하는 내 마음을 알고 자신들의 밭일을 다 끝내고는 모두가 내 밭에 모여와 함께 웃고 떠들며 흥겹게 일손을 도와주었고 어려운 일이 있을세라 친언니심정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정말 군인가족들이야 말로 군인들을 위한 일이라면 네일 내일이 따로 없는 큰 한 가족이었다.

 

봄부터 여름에는 뙤약볕에 지칠 정도로 힘들었지만 가을에 한해 농작물을 수확할때는 참으로 흐뭇했다.

 

강냉이, 완두콩, 팥, 감자, 고구마, 제법 농사군이 다 된 것 같았다.
하지만 해보지 않던 육체적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평양에서부터 앓고 있던 간경화로 그만 쓰러져 군의소에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해 있는 기간 부대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우리 집의 짐승들과 밭일을 도맡아 해주었고 우리 딸도 자신들의 집에 데려다 외롭지 않게 잘 돌봐주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하고 남의 아픔을 항상 자신의 아픔으로 감수하고 한사람이라도 뒤떨어질세라 손잡아 이끌어주는 친혈육같은 가족들이 곁에 있기에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 온다해도 무섭지 않고 이러한 가족들과 우리 군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다른 가족들은 한해에 돼지를 두 마리씩 길러내는 집도 있는데 우리 집 돼지는 야속하리 만큼 무게가 나가지 않았다. 한해에 돼지 한 마리 50㎏, 개 한 마리 10㎏, 토끼 10마리 30㎏, 이정도 밖에 더는 능력이 안 되는것 같다. 어떤 가족은 한해에 1톤의 고기생산을 해서 부대 군인들의 식생활에 큰 기여를 해서 높이 평가 받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너무 부끄럽지만 내가 군인들의 친누이가 되어 진정으로 그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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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시칼수록 용감해져야 한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9.24 러시아 중국의 자본주의화
    구상무역(물물교환 형태의 등가무역)으로
    경제를 이끌던 조선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셈이죠.

    모든 국제교역은 다 차단되고
    조선도 곧 무너질것이라고 본 미제는
    제네바 합의도 무시한체 중유공급과 원전건설을
    중단했을뿐 아니라
    견제 세력이 다 사라진 상황에서의 미제는
    조선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모든 무역에대한 제재를 시작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무시칼수록 용감해져야 한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9.24 연이은 자연재해와
    모든 교역수단을 미제에의해 차단당한
    조선은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죠.

    "배부른 개가 될것이냐"

    "존엄한 늑대가 될것이냐"

    이 갈림길에서
    조선은 후자를 선택하였고
    엄청난 고난을 겪었죠.

    단지 배고픔뿐만 아니라
    수시로 들이대는 미제의 침략기도와(팀 스피리드 핵전쟁훈련)
    제3세계와의 공정한 교역마져 차단하려는
    미제는 국제무대에서마져
    군사 정치적 총 역량을 동원하여
    조선을 고립 압살시키기위해
    미친듯이 날뛰었죠.
  • 답댓글 작성자무시칼수록 용감해져야 한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9.24 무시칼수록 용감해져야 한다 김련희씨는 이것을
    생생하게 증언하고있는겁니다.

    풀뿌리를 캐어먹는 한이있어도
    기필코 고난의 행군을 헤쳐나온
    조선의 지도자와 인민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싶네요.

    피맺힌 한과 설움으로 일구어낸
    조선의 오늘과 핵무력은
    거져 말 몇마디로 정리될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러시아 중국 다 믿을놈 없습니다
    오죽하면 베트남마져(고난의 행군시절) 조선을 깐보고
    무시했는지...
  • 작성자마바리 | 작성시간 16.09.24 80년 이전에는 남한의 2.5배의 경제력을 갖은북한인데
    미국의 제재로 역전 시켜졌는데
    지금에서는 군사력으로 앞지른 셈이네요
    대단 한 국민성입니다.
    미국이 물러 갈까요?
    너무 거대한 먹잇감이라 사생결단이 나올수도 있을지~~
    엿튼 한반도 내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죽어야 할 결정들이
    미국과 북한에 의해서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는것 같군요~
  • 작성자똑쏘리 | 작성시간 16.09.24 나의 어머니는 함경도 출신으로 찐한 함경도 아바이 사투리를 쓰셨는데
    난 아직도 함경도 사투리를 들으면 꿈속으로 들어가는것 같다.
    "쌍느느 간나새끼"
    이게 결코 욕이 아닌걸 다른 지방새끼들은 모르지비
    이뻐 죽겠을때 표현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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