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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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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선미|작성시간17.08.21|조회수114 목록 댓글 0
송경동(宋竟東, 1967~ ) / 금은돌
“내 생에 아름다운 날 또다시 올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늦은 밤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우편물 한 묶음을 내놓는다
종로경찰서 영등포경찰서 서초경찰서 남대문경찰서 서울중앙지법
골고루 다양한 곳에서 여섯 통의 소환장이
한날한시에 와 있다 기네스협회라도 보낼까

한 장은 기륭전자 비정규직과 함께 을지로입구 사거리에서 붙었던 날
한 장은 쌍용차 해고자들과 대법원 앞에서 한번 붙었던 날
또 한 장은 LGU+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 벗들과 함께 국회 앞에서 한판 하던 날/ 또 한 장은 그 모든 이들과 함께 갔던 청와대 앞
또 한 장 중앙지법에서 온 것은 세월호 추모집회 관련 재판 소환
우리 기준으로는 기자회견에 추모제거나 문화제거나 측은지심이거나 양심과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연대……
저들 기준으로는 미신고 집회 주최 집회시위에관한법률위반 해산불응 구초제창 피케팅 기준소음초과 건조물침입 특수공무집행방해 일반도로교통방해……//
빨리 간이 쫄아들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아이를 위해
쇠고기 장조림을 졸이려고/ 메추리알을 잔뜩 사온 날이었다
장조림을 하느라
저토록 간절하게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편지들을 자세히 읽어줄 틈도 없다
이제 나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는 이들은
대부분 경찰들과 검사 판사들뿐이다
근래엔 18번을 이선희의 ‘인연’으로 바꿨다
얼마 전 희망버스 주동으로 1심에서 실형 2년을 선고받고
간신히 보석으로 살아나온 날이었다
가사가 참 맘에 들었다
“2년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그 다음 구절이 더 좋았다
“내 생에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다시 올 수 있을까요”
그 다음 구절은 또 어떠한가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처음 시작도 참 좋다
“약속해요. 이 순간이 다 지나고 다시 보게 되는 그날
모든 걸 버리고 그대 곁에 서서 남은 길을 가리란 걸……”//
그런다고/ 나를 향해 돌아선
아이의 마음이 돌아설까마는/ 짭짤하니 좋다
무엇이/장조림이?
내 인생이?

송경동(1967~ ) / 전남 보성 출생.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 등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유가족을 향해 캡사이신을 쏘겠다고 위협하는 광장. 그가 있었다. 도로교통법과 집시법 위반이라며, 유가족보다 더 큰 소리로 광장 안의 사람들을 협박하는 그곳에 시인이 있었다. 벽을 돌아간다. 경찰버스가 세워놓은 철벽을, 인위적인 장벽을 돌고 돌아간다. 광장이 휘어진다. 버스를 주차하는 기술, 버스와 버스 사이, 법조문을 외우는 기술. 어두웠지만, 시리도록 사방이 밝다. 광장은 소도일까. 순간, 악수를 하며 스쳐 지나간 송경동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깃발 가지러 가요.” 시인의 일상은 현장이다. 현장 싸움은 계속되고, 아슬아슬한 공기는 아수라장이 되기에 십상이다. 그 안에서 울고 웃는 사이,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전선. 시인의 전선에 소환장이 날아든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부름이다. 경찰과 검사와 판사들이 그를 사랑(?)한다.(〈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지난 4월 22일은 세월호 재판 1심 구형을 받는 날이었다. 실형 1년이 구형되었고, 5월 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선고를 받는다. 23일엔 ‘희망버스 항소심 구형공판’을 받았다. 실형 3년이다. 최종 선고는 6월 11일이다. 그는 당당하게 법정에 선다. 그의 광장은 법정으로 이어진다. 광장은 포클레인 위로, 구치소 안으로, 점거 농성 현장으로, 옥상으로 이동한다. 밀실에 잠겨볼 겨를도 없이 광장이 또 다른 광장을 부른다.
시인의 아내와 아이는 송경동이라는 사람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수배 중일 때, 부산구치소에 있을 때, 점거 농성 중에, 포클레인 위에 있을 때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소박한 밥상 위에서 따듯한 대화를 나눌 시간도 부족하다. 소환장이 한꺼번에 날아든 날, 그는 가족을 위해서 장조림을 졸인다. 장조림 졸이느라, 한꺼번에 도착한 요구에 응할 수 없다. 한순간이라도, 아내와 아이가 함께하는 평범한 밥상이 귀하다. 가족에게 향할 사랑을 2015년, 우리가 대신 받고 있다. 사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제발 다치지 말라고 말한다. 멀리서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얼마나 뼈저린 실패를 맛보았을까. 좌절한 적은 없느냐고 묻는다. 시인은 오히려 담담하다. 애초부터 아예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단다. 과정 중에 있을 뿐이란다. 현장에서 새로운 주체를 만나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을 뿐이란다. 큰 성과가 없어도 함께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옥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곳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진실을 억압하고 한 개인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공간이지만, 감옥은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단련의 공간이다.(실제적인 감옥 생활은 19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세 번 다녀왔다. 사회적인 이슈와 관련해서 투옥된 것은 2011년이다. 수배생활 육 개월 뒤, 구속되어 3개월 수감생활을 했다.) 1970~ 80년대 우리 선배 시인들이 거리에서 감옥에서, 최전선에서 목소리를 내고, 투옥되는 일이 잦았다. 2000년 이후로는 젊은 작가들에게 이런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젊은 시인들은 광장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고민이다. 밀실로 들어가버린 것일까. “우리 선배들은 늘 현장에 있었던 걸요.”라면서 약한 자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제는 밀실과 광장 사이, 그 어느 제3의 지점 즈음에서 틈을 벌리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이런 게 자유가 아닐까요?” 시인은 거꾸로 발화한다. “많은 이들이 일상적인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지만, 사실은 참고 살아요. 길들어 왔기 때문이죠. 모순의 현장에서 아픈 이들과 함께하고, 목소리를 내고 함께 움직이면서 힘을 얻어요.”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란다. “자유를 행사할 수 있어서 사실은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아니, 이 말 참 ‘짭짤하니 좋다.’ 소환장을 하루에 여섯 통이나 받아들고 내뱉는 시인의 이 말. 따가운 햇볕에 말리고, 침잠시키고, 또다시 말리고 말린 이 말, 문득, 빛난다, 소금처럼. “한때 한 번 광장에 왔다고, 몇 년 잠깐 참여한다고 그게 다인가요? 생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전선에 닿아 있는 거죠.”
그의 눈빛을 기억한다. 광장에서 휘날리던 생생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깃발 가지러 가요.” 진심이 담긴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송경동은 온몸을 다해 자유를 외치는, 아름다운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의 18번이라는 이선희의 〈인연〉을 불러주고 싶다. “내 생에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다시 올 수 있을까요” 화려한 불꽃처럼 사는 시인과 노래하고 싶다.
 
 금은돌 kimdoldol@hanmail.net / 2008년 《애지》(평론) 2013년 《현대시학》(시) 등단. 저서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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