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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90년대 국대 감독들은 어떻게 선임되었을까.

작성자사월|작성시간10.07.13|조회수570 목록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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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국가대표 팀의 수장을 뽑는 것에 대해 여러 말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오늘 나온 기사를 보면 다시 감독 선임을 일주일 뒤로 연기한다고 발표하였는데요, 협회의 감독 선임 작업이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간 협회에서 계속해서 흘렸던 말들을 종합해 보면 일순위가 허정무 감독의 연임이었던 것 같아요. 그 다음의 차선책이 정해성 코치의 감독 승격이었던 것 같구요.

헌데 두 분이 모두 고사했지요.

따라서 협회의 입장에서도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버렸습니다.


일찌감치 허정무 감독 이후의 감독 선임에 대해 국내 감독으로 가겠다고 공언했던 축협의 입장에서 외국인 감독을 알아보기는 어려울 듯 하구요.

그렇다면 현재 국내의 전, 현직 지도자들 가운데 축구 철학과 전술 능력 그리고 인맥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어린 대표 선수들과 어울릴 수 있는 50대 초반의 감독이 선임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기까지야 조금만 축구에 관심 있는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일 텐데요, 아래 내용은 90년대 이후 협회의 국내 감독 선임 과정을 통해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재임기간                                                                                    감독           코치


07년 12월 7일 ~ 10년 6월 30일 (남아공 월드컵)                         허정무         정해성

06년 7월 1일 ~ 07년 8월 3일                                                     베어벡         홍명보

05년 10월 1일 ~ 06년 6월 30일 (독일 월드컵)                           아드보카트     베어벡

04년 6월 24일 ~ 05년 8월 23일 (아시안컵, 동아시아대회, 월드컵 예선)

                                                                                               본프레레      허정무

04년 4월 20일 ~ 6월 15일 (파라과이, 터키전)                             박성화(감독대행) 

03년 2월 3일 04년 4월 19일 (아시안컵 예선, 동아시아대회, 월드컵 예선)

                                                                                               쿠엘류        박성화

                                                                 

02년 11월 18일 ~ 02년 11월 20일                                               김호곤(감독대행) 

01년 1월 1일 ~ 02년 6월 30일 (2002 월드컵 본선)                        히딩크        베어벡

98년 10월 14일 ~ 2000년 11월 13일 (2000 올림픽, 아시안컵)       허정무       정해성

98년 6월 22일 ~ 98년 6월 25일 (98 월드컵 벨기에전)                  김평석(감독 대행)  

97년 1월 8일 ~ 98년 6월 21일 (98 프랑스 월드컵 예선, 본선)       차범근       김평석

96년 2월 15일 ~ 97년 1월 7일 (UAE 4개국대회 및 96 아시안컵)    박종환      정해성(최만희)

95년 10월 20일 ~ 95년 10월 30일 (사우디 방한 경기)                   고재욱      박경훈

95년 9월 16일 ~ 95년 9월 30일 (보카 주니어스 방한경기)             정병탁      조윤환

95년 8월 1일 ~ 95년 8월 12일 (브라질 방한 경기)                         허정무      이장수

95년 4월 26일 ~ 95년 7월 31일 (95 코리아컵)                              박종환      최만희

94년 7월 24일 ~ 95년 2월 26일 (94 아시안게임)                         비쇼베츠    김성남

92년 7월 8일 ~ 94년 7월 23일 (92 다이너스티컵 및 94 미국 월드컵) 김 호     조광래

(유기흥,허정무) 

91년 5월 22일 ~ 91년 7월 27일 (91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고재욱     허정무

90년 8월 9일 ~ 90년 10월 23일 (90 베이징 아시안게임)                박종환     김희태

90년 7월 3일 ~ 90년 8월 8일 (90 다이너스티컵)                           이차만     김희태

88년 10월 6일 ~ 90년 7월 2일 (88 아시안컵, 90 월드컵 본선)        이회택     이차만

위의 도표는 축구 협회 홈페이지에 있는 역대 대표팀 감독 명단 가운데 90년대 이후의 감독 명단만을 가져온 것입니다.


보시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들 보이시지요.

한편으로는 즐거움을 주었던 분들도 계시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함을 주었던 분들도 계십니다.


먼저 90년대의 감독 선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90 이탈리아 월드컵입니다.


이 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은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의 월등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실제 월드컵에서는 3전 전패, 1득점 6실점이라는 처참한 성과를 거두고 귀국하게 됩니다.

이러한 대표팀의 참패는 한국 축구 특히 국내 프로 리그에도 엄청난 파급 효과를 양산하여 가뜩이나 위축되어 있던 국내 리그를 거의 고사시킬 정도였습니다.

물론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회택 감독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요.

사실 이회택 감독은 우리나라 역대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입니다.

86 멕시코 월드컵 감독이었던 김정남 씨가 스타 수비수 출신에 온건한 성향의 감독이었다면 이회택 감독은 선수 당시에 얻었던 ‘풍운아’라는 별명이 보여주듯이 매우 강인한 성향의 감독이었습니다.

우리 젊은 축구팬들께서 쉽게 이해하시려면 차범근 선수가 등장하기 이전의 한국 축구의 대표 스트라이커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또한 88년에 협회장에 취임한 당시 김우중 전 대우 그룹 회장 역시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성공을 위해 대단히 많은 노력을 쏟기도 했었습니다.

만약 이 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이 선전을 했다면 축협 역시 김우중 체제를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랬다면 대우의 부도와 함께 축구 협회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참 세상 일이란 것이 일장이 있으면 반드시 일단이 있는 법인가 봅니다.


이탈리아 월드컵의 충격이 한국 축구에 끼친 영향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92년에 열린 아시안컵 지역 예선에서 태국에 1-2로 패하면서 본선 진출이 좌절되었거든요.

2년 후에 열릴 94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이 불투명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축구 협회는 이전과는 다르게 국대 감독을 명예직이 아닌 전임 감독 체제로 전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후보로 올려놓았던 사람이 박종환 당시 일화 감독, 고재욱 당시 LG 감독, 그리고 유럽에서 연수중이었던 김호 감독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술 위원회에서 투표까지 간 결과 고재욱 감독을 누르고 김호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 사상 최초의 전임 감독에 임명되었지요.


그 이후 김 호 감독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도하의 기적’을 이루며 3년 연속 월드컵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고 94 미국 월드컵에서는 전 대회 우승팀인 독일, 그리고 스페인, 볼리비아와 한 조에 속하게 되었고 2무 1패라는 호성적을 거두며 전 국민의 환영 속에 귀국을 하게 됩니다.


김 호 감독이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후, 잠시 비쇼베츠 감독이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감독을 맡게 됩니다만 그 이후 대표팀 감독 선임은 초유의 헤프닝을 벌이게 됩니다.


바로 감독에게 긴 시간을 주지 않고 당시 K리그 감독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단발성으로 감독 자리에 앉힌 것이지요.


95년 10월 20일 ~ 95년 10월 30일 (사우디 방한 경기)              고재욱      박경훈

95년 9월 16일 ~ 95년 9월 30일 (보카 주니어스 방한경기)        정병탁      조윤환

95년 8월 1일 ~ 95년 8월 12일 (브라질 방한 경기)                   허정무      이장수

95년 4월 26일 ~ 95년 7월 31일 (95 코리아컵)                         박종환      최만희


위의 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95년 4월부터 10월까지 무려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K리그의 감독들이 돌아가면서 감독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는데요, 아마도 당시가 축구계 내에서 가장 주류와 비주류 간의 싸움이 치열했던 시기였습니다.


축구협회는 오랫동안 관선 인사로 회장을 선임해 왔습니다.

내셔널리즘이 강한 축구를 역대 정권이 가만히 내버려 둘 이유가 없었지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회장에 임명함으로써 보다 쉽게 축구를 통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 78년 신동아 건설 회장인 최순영 씨가 협회장에 취임하여 10년에 가까운 장기 집권을 했고 다시 88년에 전 대우 그룹 김우중 회장이 협회장에 취임하였으며 다시 93년에 정몽준 씨가 협회장에 취임하게 되는데요, 문제는 후임 회장이 들어 올 때마다 전임 회장의 업적을 지우는 방식으로 자신의 입지를 세웠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임 회장 하의 축구인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연이 닿은 인물들끼리의 이전투구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러한 맥락이 지금도 축구계에 학연이나 지연 등의 ‘인맥론’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정몽준 씨의 집권이 장기화되고 02 월드컵 유치와 같은 거대한 사건이 터지게 되자 이전의 축구인들이 설 자리가 많지 줄게 되었어요.

제 생각에는 지금이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 예를 들어 축구 감독 선임 문제나 협회 내 인사 문제 등 - 지금의 축구 협회가 과거의 축구계 인사들을 끌어안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을 통해 하나된 모습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축구계 발전을 위한 길이 아닌가 합니다.


국대 감독 선임을 정몽준 씨와 그 주변 사람들이 돌려 가며 해 먹는다는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축협이 도입한 ‘K리그 감독의 순번대로 국대 감독 돌려 먹기’는 그 자체로도 여론의 비판을 받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전임 감독을 두지 않고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감독을 하다 보니 국대의 경기력이 안정되지 못 했고 이는 자연히 96 아시안 컵의 비극을 낳게 됩니다.


제가 지켜 본 바에 의하면 90년대 한국 축구에는 세 번의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참패, 두 번째는 96 아시안 컵의 비극,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감독 경선이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 간 축구계 내부에서 곪아 왔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 대회가 바로 96 아시안 컵이었습니다.


96 아시안 컵에 출전하기 전만 해도 이 팀에 대한 국민들이나 언론의 기대는 대단하였습니다.

83년 멕시코 청소년 대회 4강 신화의 명장에다가 프로 리그 93-95년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한 커리어는 박종환 감독을 명장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했구요, 게다가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 아니라는 그의 이력은 많은 축구팬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매번 국대 감독 후보에 올랐지만 그 때마다 번번히 탈락한 것이 협회 내 주류 인사들의 계획적인 훼방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당시 박종환 감독의 국대 감독 선임은 축구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선수들은 어땠습니까.

협회 내 인맥을 통한 국대 선발이 아니라 당시 K리그에서 가장 폼이 좋은 선수들로만 구성하여 명실상부 K리그 올스타를 선발하는 등, 이번에야말로 축구 협회가 발상의 전환을 하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획기적인 안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최악의 결과를 거두게 되지요.

예선에서부터 삐걱대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 주던 국대 팀은 간신히 예선을 통과한 후, 8강에서 숙적 이란을 만나게 되지만 2-6이라는 참패를 당하며 탈락하고 맙니다.


한국 축구사를 연구해 보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미스테리한 사건이 바로 96 아시안 컵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첫 번째는 94 미국 월드컵 이후, 축구 협회가 보여 주었던 우유부단한 태도입니다.

94 미국 월드컵에서 전임 감독제를 도입했다면 그 이후에도 협회는 전임 감독을 두어 감독의 축구 철학이 지속적으로 국대 팀에 녹아들도록 했어야 했습니다만 협회는 주류 인사들만 해 먹는다는 여론에 휘둘리면서 갈지자 행정을 펼쳤지요. 그러다 보니 여론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면서 자신의 정책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무려 7개월 동안 네 명의 K리그 감독이 돌아가면서 감독에 선임되었고 이전의 비쇼베츠 감독까지 포함하면 5명의 감독이 94 미국 월드컵 이후, 96 아시안컵까지 난립하는 등, 지속적인 감독직 수행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어요.


두 번째는 박종환 감독의 지휘 스타일에 있습니다.

박종환 감독은 이전에 청대를 지휘할 때나 클럽 팀을 맡았을 때도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훈련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문제는 국대에 뽑힐 정도의 선수라면 이런 강압적인 방식은 결국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다음의 세 번째 문제와 연결됩니다.


세 번째는 선수들의 항명 파동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렸지만 당시 모 선수를 필두로 해서 몇 몇 선수들이 박종환 감독의 지도 스타일에 반감을 품고 항명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기 중에도 선수들이 파벌을 형성해서 자신들끼리만 패스를 주고받았다는 것이 대회가 끝난 후 언론을 통해서 밝혀지기도 했어요.


특히 세 번째 문제는 한국 축구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간 한국 축구가 다른 축구 강호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경쟁력은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팀워크였는데 이것이 이 대회에서는 전혀 발휘가 되질 않은 거예요.

협회는 이를 매우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였습니다.

또한 감독의 선수 장악 능력 부족이 발생한 이유를 박종환 감독의 지나친 카리스마 이외에도 국가 대표를 경험하지 못 했던 것으로 꼽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국대에 차출되는 선수들은 대부분 청대, 올대, 국대까지 엘리트 코스를 거친 자존심 강한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는데요, 이들을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다음 감독으로 차범근 감독을 선임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네 번째로 박종환 감독의 전술 실패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96 아시안 컵 당시 박종환 감독은 스위퍼인 홍명보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올리고 막 수비수로 전업한 김주성 선수를 스위퍼에 두는 파격을 단행하였습니다.

나름 참신한 발상이기는 했습니다만 타이밍이 문제였어요.

훗날 김주성 선수는 대우에서 스위퍼로 변신하여 대우가 3관왕을 이루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당시에는 수비수로 전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거든요.

결국 이러한 전술 실패가 수비 조직력의 와해를 불러오게 된 이유라는 것이지요...


이 처럼 96 아시안 컵은 한국 축구에 여러 가지 숙제를 남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협회에게도 몇 가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K리그를 믿지 못 한다는 것과 두 번째로 선수 장악을 위해서는 카리스마(감독 개인의 능력) 보다는 국대를 경험했다는 외형적 조건이 더 중요하다는 것 말이지요.


이 트라우마는 제법 오랫동안 유지되구요, 지금도 국대 감독 선출 과정 중에는 반드시 언급될 정도입니다. 그 만큼 축구 협회의 트라우마가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종환 감독의 실패로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통과가 불투명해지게 되자 협회는 그 동안 협회와 평형선을 달리던 또 한 명의 비주류 인사에게 SOS를 보냅니다.

바로 차범근 감독이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차범근 감독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았습니다.

일단 외형적으로도 압도적인 경력이 자랑했을 뿐 아니라 비록 프로 리그에서 우승하지는 못 했지만 어느 정도 지도자 경험을 한 차범근 감독은 당시 고조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협회가 빼들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습니다.

차범근 감독을 설득하기 위해 협회에서 여러 가지 루트를 사용한 끝에 결국 차범근 감독의 동의를 받아내게 되고 차범근 감독을 통해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치루기로 결정을 하게 되지요.

다들 아시듯이 ‘도쿄 대첩’을 포함한 빼어난 성적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되지만 정작 월드컵 본선에서는 토털 풋볼의 원조인 네덜란드에게 0-5의 참패를 당하는 등, 졸전을 펼치며 대회 중 감독 교체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대회 이후 차범근 감독은 ‘프로 리그 경기 조작설’의 여파까지 겹치며 수 년 동안 한국 축구와는 담을 쌓고 살다가 03년에 수원 블루윙즈의 감독에 선임되며 국내 무대로 되돌아오게 되지요.


아마 역대 대표팀 감독 가운데 차범근 감독만큼 혹독하게 시련을 겪은 대표팀 감독도 없을 거예요.

물론 원인이야 감독인 자신에게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범근 감독이 겪었던 시련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지금도 차범근 감독이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지옥과 같은 순간이었다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감독을 떠나 한 인간에게 너무나 가혹한 처사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 놈의 국가 대표 감독이라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이기에 한 인간을 이렇게 까지 매장시켜 놓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컸던 것일까요.

당시 국민들의 협회에 대한 불신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오죽하면 협회가 차범근 감독의 경질 이후 감독 선임 시에 국대 감독을 경선을 통해 뽑을 생각을 했을까요.

쉽게 말하면 더 이상 자신들이 선임할 능력이 없으니 감독 자리를 투표를 통해 뽑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원한 사람은 이차만, 허정무, 김호곤 이렇게 세 명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리고 투표 결과 허정무 감독이 이차만 감독에게 5% 차이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지요.


협회는 허정무 감독에게 올림픽 대표팀 감독과 국대 감독을 모두 맡기는 강수를 두게 됩니다만 그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시드니 올림픽 조별 예선 탈락과 아시안 컵 결승 진출 실패였습니다.

사실 시드니 올림픽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아시안 컵 결승 진출 실패는 그다지 나쁜 결과는 아니었어요. 전전 대회에서는 아예 아시안 컵 본선에도 오르지 못 했고 96년 아시안 컵에서 8강에서 탈락한 것에 비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박종환 감독과 차범근 감독을 거치면서 협회에 누적된 축구팬들의 불만 속에 허정무 감독은 재임 기간 내내 낙하산 인사의 오명을 들어야만 했습니다.(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말하면 협회의 방패막이가 된 셈이었어요.

그 당시 대표팀 자리는 누가와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 자리에 지원했던 허정무 감독을 용감하다고 해야 할 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허정무 감독이 자신의 안녕보다는 자기를 키워 준 한국 축구를 위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여기에 미안했던지 협회에서도 허정무 감독의 대표팀 사퇴 이후 허정무 감독에게 기술 고문이나 기술 위원회 부위원장직 등의 명예직을 맡기게 되는데요, 여기에서 또 문제가 벌어집니다.

즉, 허정무 감독이 대표적인 친 축협 인사로 낙인이 찍혀 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 낙인은 2010 남아공 월드컵 대표팀 감독 자리 내내 허정무 감독의 이름 옆에서 떠나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결과론적으로는 한국 축구의 자산이 되었어야 했던 두 명의 레전드가 동시에 침몰해 버리고 맙니다.

한 명은 축구 협회에게 버림을 받고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축구팬들에게 버림을 받지요.


우리는 한 명의 인재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만 축구계만 놓고 보면 불과 4-5년 사이에 선수로서 외국에서 가장 성공하였으며 훗날 축구 협회장과 기술 위원장으로 거론되던 두 명의 레전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90년대에 선임되었던 국대 감독들을 통해 그간 어떠한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대충 보셔도 아시겠지만 참으로 파란만장하지요.

거의 2년 간격으로 파란이 일어난 셈이에요.

그리고 이런 과거의 선례를 통해 축구팬이나 협회 모두 배운 부분이 많았겠지요.


아무쪼록 이번 국대 감독을 선출할 때는 가급적 과거의 사례에 반추하여 문제점은 보완하고 가장 적합한 감독을 뽑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만큼 이번 국대 감독의 선출은 향후 10년을 내다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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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상상공작 | 작성시간 10.07.20 잘봤습니다
  • 작성자날아수원 | 작성시간 10.07.21 좋은자료네요~
  • 작성자러시안블루 | 작성시간 10.07.21 그렇군요...오랜세월에 걸쳐서 정리된 자료덕분에 흐름을 한눈에 읽게 되었습니다.
  • 작성자굽신 | 작성시간 10.07.23 새로운 정보를 알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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