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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만 원짜리 한 장 9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3.15|조회수38 목록 댓글 0

만 원짜리 한 장 9

초저녁부터 내린 비에 젖은 세상에 혼자인 듯
초라한 점퍼 차림으로 걸어가던 남자는
시작과 끝을 모르는 비를 습관처럼 맞으며
국밥집 앞에서 멈춰서서는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놓았던 만 원짜리 하나를 매만지더니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돈도 없이 국밥을 달라는 거였니?”

 

“아니에요.
분명히 주머니에 넣고 왔는데 오다가 잃어버린 것 같아요“

 

“여하튼 국밥은 줄 수 없다.”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울먹거리고 있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애원한 듯 다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엄마가 아무것도 못 드시고 있어요
제가 내일 국밥값을 꼭 가지고 올게요“

 

“널 뭘 믿고 주니”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점퍼 차림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더니
“사장님…. 이 아이 밥 값 여깄어요“

 

“아닙니다. 저런 애들 버릇돼요“

 

남자아이는 중년의 남자에게 허리까지 고개를 숙여 보이며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내일 꼭 갚아 드릴게요“라며
등에 기댄 긴 그림자가 되어
누워만 계신 엄마 걱정에 황급히 문을 열고 뛰어나가고 있었다

 

아이가 골목길을 돌아 그 모습이 사라지자
비에 젖은 꽃의 슬픔처럼 주인 없는 바람을 따라
국밥집을 나가 버린 남자의 흩어진 그림자를 밟고
굽은 달을 따라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아이는

 

"저기 사장님...
좀 전에 제 밥값을 대신 내주신 그 손님 가셨어요?"

 

"너 나가자마자 시킨 국밥을 취소하고 가셨는데 왜?"

 

“잃어버린 돈을 찾았거든요”

 

“그 손님이 사준 거니까 돌려줄 필요 없으니 어서 가“

 

“남한테 신세 지면 반드시 갚아야 된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놈 참 별난 놈일세….”

 

다음 날 초 저녁이 물든 식당은
밀려드는 손님들로 가게 문이 닫히기 무섭게
열리는 통에 정신이 없던 그때

 

“저 사장님 어제 그 손님 오늘도 안 오셨나요?“

 

“허허 그놈 참...
없는 놈이 자존심은 있어서는….“

 

그렇게 오가는 해와 달을 따라 몇 번을
더 국밥집 유리창에서 기웃거리던 남자아이는

 

"그럼 이 돈을 사장님한테 맡기고 갈테니
그 손님 오시면 꼭 좀 전해주세요"

 

빗물처럼 쌓여진 날들을 뒤로하고
6년이란 시간이 더 흐른 어느 낯선 날

 

병실에 누워 잠든 엄마의 손을 꼭 붙든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청년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6년 전 국밥집에서
잃어버린 돈을 찾아 주인에게 다시 전해준 그 남자아이였다.

 

“제가 수술비는 꼭 마련해 올 테니
수술부터 먼저 시켜주시면 안 될까요“

 

“병원 규정상 그건 좀 힘듭니다”

 

간호 병동 앞에서 누더기로 기워입은 가난 앞에
눈물로 사정을 하던 남자는 북받쳐오는 설움에
옥상 공원에 앉아 소주 두어 병으로 망가진 시간만 바라보다
벤치에서 잠이 들었다

 

황급히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엄마…. 엄마.
저희 엄마 어디 갔어요?"

 

"좀 전에 수술한다며 간호사들이 와서 모시고 갔는데.."

 

"밤새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

 

남자는 바람에 쫓겨가는 구름처럼 간호사 병동으로 뛰어가서는

 

“저희 어머니 어디로 모시고 간 거죠?”

 

“김정자 환자 좀 전에 수술 들어갔습니다”

 

“아직 병원비….”

 

남자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간호사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을 하고 있었다

 

“원무과에서 연락이 왔는데
어느 분이 오셔서 계산해 주셨다는데요“

 

“누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나요?”

 

“아참...
이걸 전해 달라며 주시고 가셨데요“

 

간호사가 남자에게 전해준 봉투엔
낯선 편지와 낡은 만원짜리 한 장이 들어있었다

 

(오랜만일세….
국밥집에서 보고 6년 만에 자네를 이 병원에서 우연히 지나다
간호사에게 사정하고 있는 자네를 보게 되었네

 

6년 전 그날
사업 실패로 모든 걸 잃고 마지막 저승 가는 길에
든든히 배나 채우고 가려고
다시 들렸던 그 식당에서
자네가 내게 남겨놓은 그 만원짜리 한 장이 내게 큰 용기를 주었네
굳이 갚지 않아도 될 만 원짜리 한 장을 되돌려주려는
자네의 그 마음으로 살다 보니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게)

 

그리고 ​이 귀한 돈을 원래 주인인 자네에게
돌려줄 수 있어 이제야 마음의 짐을 벗은 것 같네)

 

​빗속에 눈물을 감추고 울던
지난 이야기들이 새겨진 편지를 눈물로 읽어 내려가던 남자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가슴으로 움켜쥐며
기억에 번지는 눈물을 마저 흘려내고 있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실려 나오는 엄마의 모습에
몸을 일으킨 남자는
“엄마…. 괜찮아?“

 

뜻하지 않은 행복에
이게 얼마 만에 웃어보는 행복인지
마냥 헤아릴 수 없는 기쁨에 젖어 웃음 짓던 시간 너머로
퇴원을 하게 되던 날

 

"간호사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퇴원하게 되어 저희도 기뻐요"

 

"저 이게 제 연락처인데요
수술비 대신 내주신 분이 혹 연락 오시면 꼭 좀 전해주세요."

 

햇살 쏟아지는 거리로 울음을 감춘 미소와 함께
엄마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병원 복도에서 내려다보며 같은 미소로 웃고 있던 남자는
보이지 않는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간호사가 전해준 쪽지를 바람에 날려보내며….

- 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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