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신앙의 인물들

이인자로 만족한 사람 외콜람파디우스 (Johann Oecolampadius)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31|조회수36 목록 댓글 0

이인자로 만족한 사람 외콜람파디우스 (Johann Oecolampadius)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외콜람파디우스(Johann Oecolampadius: 1482-1531)는 매우 독특한 이름이다. 그의 성(姓)은 Heussgen으로 알려져 있다. 이 철자 외에도 Husschyn, Hussgen, Huszgen 등이 있다. 호이스겐(Heussgen)은 어원적으로 ‘집의 빛’(독일어로 Hausschein)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당시에 많이 통용되던 방식으로 이것을 다시 그리스어로 표현한 것이 외콜람파디우스가 된 것이다. 그리스어 oiko는 집이라는 뜻이며 lampad는 등불이라는 뜻이다.

잘 알려진 종교개혁자들에게는 그를 따르는 후계자가 있었다. 예를 들면 루터(Martin Luther)에게는 멜랑히톤(Philip Melanchton)이, 칼빈(John Calvin)에게는 베자(Theodore Beza)가, 쯔빙글리(Ulrich Zwingli)에게는 블링거(Heinrich Bullinger)가 있었다. 외콜람파디우스는 쯔빙글리의 사후 그의 후계자로 초청을 받은 인물이었다.

잘 알려진대로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지역의 종교개혁의 지도자였다. 쯔빙글리는 쮜리히에 있었고 외콜람파디우스는 바젤에 있었다. 그 당시 바젤은 스위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학문적 도시였다. 그래서 흔히들 바젤을 ‘스위스의 아테네’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젤은 라인 강변에 자리하며 독일, 프랑스와 접경 지역에 있는 도시이다.

외콜람파디우스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조숙한 아이인 그는 12살에 라틴어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곧 그리스어를 통달하였다. 그는 또한 히브리어에서도 매우 독보적인 학자였다. 그는 튀빙겐(Tübingen)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루터파 신학자가 된 멜랑히톤의 친구가 되었다.

1515년에 그는 바젤의 성 마틴교회(St. Martin Church)의 목사로 부름을 받았고 그 다음해에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자인 외콜람파디우스는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하는 일을 도왔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서 그는 1520년에 바젤을 떠나서 수도원에 들어가 일시적으로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522년에 다시 바젤로 돌아와서 교회에서 설교하며 바젤대학교에서 신학교수가 되어 죽기까지 머물렀다.

Basel

1522년에 그는 쯔빙글리와 친구가 되었고 개종하였다. 그 당시에 그는 루터와 쯔빙글리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로마교의 화체설을 공격하였으며 신앙고백의 오용과 마리아 경배를 공격하였다. 그의 열정적인 반대운동으로 1529년 2월에는 기존 교회의 계급질서를 타파하도록 시의회를 설득하고 미사를 폐지하였으며 쯔빙글리 방식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마르부르크(Marburg) 회의 이후에 쯔빙글리의 성찬론을 받아들여 상징설을 주장하였다.

외콜람파디우스의 사역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성경을 강해함으로써 교회개혁을 위한 기반을 닦았으며 예배에 회중 찬송을 도입하였고, 성찬참여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함께 받았다.

1531년 쯔빙글리가 카펠 전투에서 죽자 쮜리히의 개혁자들은 외콜람파디우스가 쮜리히로 와서 쯔빙글리를 대신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초청을 거절하였다. 그의 생각은 스위스 종교개혁의 지도자인 쯔빙글리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바젤에서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5주 후에 그는 안타깝게도 심한 병에 걸렸다.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안 그는 그의 가족들과 하인들과 함께 성찬을 거행하였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자 외콜라파디우스는 말했다. “성찬은 나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참 믿음의 표지이다.”

그의 생의 마지막 저녁에 바젤의 10명의 목사들의 그의 침상 곁에 모였다. 외콜람파디우스는 물어보았다. “무슨 새 소식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외콜람파디우스는 말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곧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1531년 11월 24일 새벽이 밝아오면서 그는 시편 51편 1절의 말씀을 반복하였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태양이 떠오를 때 ‘집의 빛’인 그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태양과 같이 빛나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났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