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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천동설인가 지동설인가? 갈릴레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6.14|조회수52 목록 댓글 0

천동설인가 지동설인가? 갈릴레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이태리 피사(Pisa)에서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죽은 날(1564년 2월 18일)에 태어났다. 그 해는 영국에서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갈릴레오는 그 시대의 지도적인 천문학자로서 파두아 대학교(University of Padua)의 교수였다.

1610년에 그는 자신이 새로 고안한 망원경을 이용하여 천체를 관찰하였다. 그의 망원경은 30배 정도를 확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하여 태양의 흑점, 달의 표면의 모습, 목성이 가지고 있는 네 개의 위성 등을 보게 되었다. 그는 관찰을 기초로 코페르니크스가 한 세기 전에 이야기한 지동설이 옳다고 말하였다. 화성, 금성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처럼 목성 주위에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있는 것이다. 즉 우주의 태양중심설을 옹호한 것이다. 파두아의 다른 교수들은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해서 천체를 바라보는 것마저도 거부하였다. 갈릴레오는 이것을 그가 파두아 대학을 떠나야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갈릴레오의 결론은 지동설인가 천동설인가 하는 질문에 관하여 공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곧 갈릴레오는 성경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1615년에 갈릴레오에게는 형식적인 반대(protest)가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중세교회가 이단자를 다루는 특별 재판소인 종교재판(inquisition)의 이전 단계라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그에 대한 비판에 답변하기 위해서 로마로 갔고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의 견해로 돌아서 줄 것을 기대하였다. 갈릴레오는 그의 생각을 매우 광범위하게 홍보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천문학에 대해서 논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오로 하여금 그의 견해를 버리고 더 이상 논의하지 말도록 하였다.


1616년 2월에 종교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움직임 없이 서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며 철학적으로 오류이며 전적으로 이단적이다.”

그는 감옥에 갇히는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 판결에 순종한다고 선언하였다. 갈릴레오는 1632년에 천문학에 대한 중요한 책을 발행할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가 쓴 책은 『두 가지 중요한 세계 시스템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로 지구와 태양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이해를 설명한 것이었다. 그의 책은 학문의 세계에서 폭넓게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종교재판소는 곧 갈릴레오가 1616년의 판결에 순종하겠다는 약속을 깬다는 이유로 다시 그를 기소하였다. 그는 고문으로 협박을 받으며 1632년 6월에 교회의 견해에 동의를 하고, 지구는 움직임이 없으며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종교재판소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무기징역을 선언하였다. 속죄를 위해서 그는 3년 동안 매일 7개의 참회시를 읽어야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가 감옥에서 3일을 보낸 후 교황은 그의 건강과 고령을 이유로 피렌체(Firenze 혹은 Florence) 근교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연금 상태로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주거는 제한되었으나 그는 자유롭게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수녀인 그의 딸이 그를 위해서 참회의 시를 낭독하였다. 그는 집필에 몰두하여 1638년에는 『두개의 새로운 과학과 관련된 담론과 수학적 증명』(Discourses and Mathematical Demonstrations Relating to Two New Sciences)을 발간하였다. 그 해에 그는 완전히 시력을 잃었고 계속되는 탈장과 불면증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치료의 목적으로 피렌체 여행이 허가되었으나 1642년 그는 발열과 심계항진으로 숨을 거두었다.

갈릴레오는 그의 주장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교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로마교의 교인으로 남기를 원했고, 교회의 결정에 대해서 타협을 시도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비판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문학과 수학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으며 결국 과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1992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사죄하였다. 그의 사후 350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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