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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중국에서의 브니엘 운동 레이튼(Albert Kato Reiton:李順)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7.01|조회수46 목록 댓글 0

중국에서의 브니엘 운동 레이튼(Albert Kato Reiton:李順)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Albert Reiton 1978, 1960년

레이튼(Albert Kato Reiton: 1882-1980, 중국명 李順) 목사는 미국 위스콘신주 볼드윈(Baldwin)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자랐다. 12세 때 그는 부모님의 질병과 가정에 불어 닥친 경제적 파탄으로 절망 가운데 헤매다 예수님을 믿고 자신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8세 때 그는 양조장에서 일한 일이 있었는데 한 때 알코홀 중독에 빠지기도 했지만 크게 회개하였다. 24세가 되던 해 직장생활도 안정되고 교회생활도 성실히 행하던 때에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악의로 그의 신앙까지 저주하며 모욕하는 상사 때문에 직장을 사직하게 되었다.

그는 부모님이 계신 아스토리아(Astoria)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께 특별한 인도를 구하던 중 갈라디아서 1장 15-16절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레이튼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어려서 폐렴에 걸렸을 때 ‘익어서 추수 때가 된’ 거대한 들판이 있다고 말씀해주시던 그 비전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바다 건너에 있는 선교의 들판으로 자신을 부르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곳은 중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레이튼은 자신이 선교사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며칠 뒤 레이튼은 길을 가던 중에 길에 떨어져 있는 한 장의 종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집어 읽게 되었는데 그것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크리스천 사역자 성경훈련학교’의 전단지였다.(1)

그는 그 학교를 졸업한 후 알래스카 주노(Juneau) 시에 가서 그곳 브니엘 교회에 출석하였다. 거기서 그는 에드나 그리어(Edna Greer)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약혼을 하였고 약혼기간 중에 그리어는 중국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었다. 레이튼이 가진 중국에 대한 비전을 알지 못한 채 그리어는 그에게 파혼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중국에 대한 선교의 사명을 주신 것을 알게 되었고 놀라움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들은 1909년 11월 15일에 결혼하였고 바로 다음날 배를 타고 중국을 향해 출발하여 한 달 뒤에 홍콩에 도착하였다.

홍콩에서의 선교사 생활은 쉽지만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늘 하나님의 인도를 믿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들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수중에는 단 40달러 밖에 없는 상태였다. 가지고 있던 돈이 다 떨어져 6일 동안 죽으로 견디다가 6일째 오후에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문밖에서 노크소리를 듣게 되었다. 밖에는 전혀 알지도 못하던 두 사람이 와서 계란, 야채, 과일, 고기, 버터 그리고 빵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전달해 주었다. 그 일이 일어난 바로 몇 시간 후에 로스앤젤레스 브니엘선교회에서 보낸 20달러가 든 봉투를 우체부로부터 받게 되었다. 브니엘선교회에서 보낸 선교비가 엉뚱한 곳으로 잘못 배달되었다가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이런 체험을 통하여 그들의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그들은 광동어를 배우며 개인전도를 열심히 하였다.

레이튼은 1909년 12월 ‘남중국 브니엘성결선교협회’(South China Peniel Holiness Mission)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은 1951년에 ‘중국 브니엘선교회(China Peniel Missionary Society)가 된다. 드디어 레이튼 부부는 광동성 자오칭(肇庆)의 한 고아원에서 원무를 담당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들 부부는 2년 동안 열심히 일하였고 과로로 인해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레이튼은 아내의 병이 심해지자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그의 아내는 1912년 1월에 일본 고베의 한 병원에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레이튼은 여러 지역을 방문한 후 알래스카 주노로 돌아가게 되는데, 거기서 홍콩에 있을 때 늘 그들 부부에게 연락을 취하며 선교회의 일을 보고 있던 에타(Rose Etta Femmer)를 만나게 된다. 주노에서 일 년 동안 머무르며 레이튼은 에타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고 그녀 또한 해외선교에 소명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청혼을 하게 된다. 1913년 1월 20일에 그들은 레이튼의 부모가 있던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결혼을 하고 그해 4월에 함께 홍콩으로 돌아갔고 레이튼은 중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레이튼 부부는 홍콩에서 사람들이 ‘서양귀신들’에게는 집을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거처할 곳도 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겨우 집을 구하고 사역을 감당하려고 바쁘게 준비하였지만 처음 한동안 중국인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힘이 들었다.

1914년 11월 22일에 레이튼 부부는 자신들의 첫 브니엘 교회를 홍콩의 구룡반도에 있는 상하이 거리에 열게 되었고, 그의 33세 생일이던 1915년 2월 7일에는 4명의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그들은 요우마띠(油麻地) 브니엘교회의 첫 교인들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기독교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첫 현지인 목사가 되었다. 상하이거리에서 이 교회가 시작되던 날 선교사인 해몬드(Elmer & Hattie Hammond) 부부가 그들의 자녀들을 데리고 방문하였는데, 그때 만난 9개월 된 밥(Robert/Bob Bruce Hammond: 1914-2002)은 훗날 레이튼의 사위가 되어 중국 브니엘선교회를 이끄는 인물이 되었다.

조그만 셋집에서 시작된 교회에 많은 영혼들이 찾아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서 교회는 부흥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개종자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더 큰 건물로 이전하면서 빚을 지게 되었지만 레이튼은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다시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다. 교회에는 1,600명의 사람들이 가득차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그들의 기도는 죄와 질병과 가난으로 찌든 영혼들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이후에 레이튼 부부에게 새로운 시련이 닥쳤는데, 그것은 레이튼의 아내와 두 딸이 중국대륙을 휩쓸고 있었던 인플루엔자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레이튼 자신도 장티푸스에 걸려 2주 동안 사경을 헤매게 된 것이었다.(2) 레이튼 가족은 홍콩에 새로 온 선교사 가정에 사역을 맡기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1년간 안식년을 보내며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선교지로 돌아와 의욕적으로 사역하였다. 1928년 레이튼은 첫 성경학교(Bible Training School)를 열었다. 그 학교에는 처음에 12명의 남녀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자신들의 삶을 위대한 사명에 헌신하려고 입학하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훈련을 받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해 헌신하였다.

레이튼은 1930년, 홍콩에서 남서쪽으로 12Km 떨어진 인구 15,000명이 살고 있는 청차우(长州) 섬에 셋집을 얻어 교회를 세웠다. 그 곳은 전기와 수도도 없고 파리와 모기가 들끓는 곳이었지만 사람들은 친절했고 선교사 부부를 ‘예수 사람들’로 부르며 사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를 확장해야만 할 정도가 되어졌고 그 일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 마을에 좋은 땅을 가지고 있던 한 부유한 중국인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 땅을 교회나 학교 용도로만 팔기를 원했다. 아홉 개의 교회 단체들이 그 땅을 사려고 지원했는데 ‘남중국 브니엘성결선교협회’가 첫 번째로 지원하여 그 땅을 구입하였다. 레이튼은 자신이 직접 감독하여 3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청차우교회를 건축했다.

1938년에 레이튼 목사 가족은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상태에 있었고, 또한 많은 미국 교회와 선교회에서 레이튼 가족이 미국으로 와서 하나님께서 중국에서 역사하신 일들을 말해주기를 원했다. 미국으로 돌아가 안식년을 갖던 1939년 6월에 둘째 딸인 헬렌(Helen Elizabeth Reiton: 1916-2005)이 밥 해몬드와 결혼하게 되었고, 레이튼 부부가 홍콩으로 돌아간 몇 달 뒤인 11월에 사위 해몬드 부부가 홍콩에 선교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둘째 딸과 사위가 레이튼의 선교 사역에 합류한 2년 후인 1941년 12월 8일에 갑작스런 일본의 공습이 시작되었고, 5일 후에 구룡반도는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게 되었다. 레이튼 부부와 해몬드 가족은 46일 동안이나 요우마띠교회 옆 레이튼 부부가 살던 사택 안에서 숨어 지내다가 홍콩 섬에 있는 스텐리(Stanley)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1942년 6월까지 포로수용소에 갇혀 많은 어려움을 당했으나 미국과 일본 양측이 포로들을 1대1로 교환할 때 석방되어 1942년 6월 29일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미국에 돌아온 레이튼은 미국과 캐나다를 순방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홍콩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셨고, 레이튼은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5년 말에 홍콩 정부의 요청으로 구호사역을 위한 영구 비자를 받고 홍콩으로 들어간 첫 공식 선교사가 되었다. 그가 홍콩에 다시 돌아왔을 때 홍콩은 1/3이 파괴되었고 매일 밤 600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아사하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브니엘 운동은 레이튼 부부의 헌신적인 섬김을 바탕으로 홍콩을 중심으로 계속 성장해 갔다. 1953년 무렵에 홍콩의 요우마띠 브니엘교회는 이전보다 더 크게 성장하였으며 레이튼은 그 교회에서 14세가 넘는 성인 2,000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954년에는 새 교회당을 봉헌하였다.

아내 에타 레이튼(Etta Reiton)은 44년 동안의 충성스러운 사역을 마치고 1957년 7월 25일에 홍콩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한 동료 사역자는 “우리 모두는 그녀가 죽었을 때 엄마를 잃은 고아들처럼 느껴졌다”라고 그 마음을 표현했다. 아내의 사후 그는 독신으로 지내다가 1963년 에타의 동생인 로이스(Lois)와 결혼하고 1년간 함께 홍콩에 체류하였다.

레이튼 목사는 1964년 82세로 은퇴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텍사스에 정착하였다. 그는 1980년 12월 3일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기까지 평생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하며 진심으로 주를 섬겼다. 그는 13개의 교회당을 세웠으며, 학교 3개와 유치원 1개, 고아원 1개와 성경학교 1개를 세웠다. 또한 그는 병원사역과 다양한 구호사역을 감당하였다. 후에 그는 사위 해몬드 목사의 도움으로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완 및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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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학교는 후에 캘리포니아주 아주사(Azusa)에 위치하고 있는 아주사 태평양대학(Azusa Pacific College)으로 발전하였다.

(2) 레이튼은 세 딸을 두었다. 첫 딸은 1923년 8살 되던 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둘째 딸 헬렌은 해몬드의 아내가 된다. 셋째 딸 역시 선교사의 아내이다.

(참고도서) Helen E. Hammond & Robert B. Hammond, Bondservants: Missionaries’ Experiences During the Siege of Hong Kong and History of V.O.C.A. Peniel Missions. 10th ed. (Pasadena, CA: Voice of China & Asia,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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