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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폴 칼슨(Paul Carlson)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8.24|조회수49 목록 댓글 0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폴 칼슨(Paul Carlson)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진료하는 Paul Carlson (좌)

폴 칼슨(Paul Carlson: 1928-1964)은 캘리포니아주의 칼버 시티(Culver City)에서 스웨덴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스파크 대학(North Park University)과 스탠포드(Stanford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으며 소년시절부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조지 워싱턴 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 의과대학을 1956년에 졸업하였다.

단기 선교사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폴과 그의 아내 로이스(Lois Calson Bridges)는 1961년에 콩고(그 당시는 벨기에 령)로 가서 구호활동을 도왔다. 이 경험은 그로 하여금 1963년에 의료선교사로 콩고로 가게 하였다. 그는 복음주의 언약교회(Evangelical Covenant Church)의 파견을 받아 콩고 우방기(Ubangi)주의 와솔로(Wasolo) 마을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1964년에 공산주의자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심바(Simba)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 나라의 두 번째 큰 도시인 스탠리빌(Stanleyville, 지금의 Kisangani)을 장악하였다. 1964년에 있었던 교회회의에서 칼슨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1964년과 1965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받고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친구 여러분, 만약 우리가 기꺼이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를 위해서 기꺼이 고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폴과 로이스는 반군이 와솔로로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폴은 로이스와 두 아이(Wayne, Lynette)의 안전을 위해서 가까이에 있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Central African Republic)으로 데려다주고 자기는 홀로 와솔로로 돌아왔다. 그들은 무선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9월 9일에 그는 마을에 소요가 있었음을 전하고 저녁에 떠날 것이라고 연락을 하였다. 로이스가 들은 다음 소식은 폴과 세 명의 가톨릭 신부가 잡혔으며 병원이 불탓다는 소식이었다. 9월 24일자로 된 짧은 편지에서 폴은 이렇게 썼다. “나는 여기서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아는 것은 그분과 함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메시지는 10월 21일자로 된 종이쪽지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의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향한 내 생각들은 그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5일 후에 심바 방송은 칼슨을 ‘용병인 칼슨 소령’이라고 허위포장 하였으며 그를 체포하여 스탠리빌로 압송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칼슨 소령’은 호텔에 억류되었으며 그는 반란군의 가장 유용한 홍보용 포로였던 것이다. 그는 매일 모의처형을 위해 행진을 하였고 많은 구타를 당하였다.

늦은 11월에 칼슨은 다른 미국인 포로들과 함께 다른 호텔로 옮겨졌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칼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앞날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단지 지금 하루를 살 뿐이며, 그날을 위한 주님을 신뢰할 뿐입니다.”

그들은 4일 동안 그곳에 함께 있었는데, 비행기의 소음이 포로들을 깨웠다. “밖으로 나가라! 밖으로 나가라!”는 심바들의 외침이 복도를 통해서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 보니 벨기에 낙하산 병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칼슨은 광장에 모인 250명의 백인 인질 중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관총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왔다. 갑자기 심바들이 인질들을 향해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칼슨과 다른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집으로 피했고, 그들은 현관에 도착하기 위해서 석조벽을 넘어야 했다. 칼슨은 다른 선교사에게 먼저 벽을 넘어 가도록 하였다. 다른 선교사가 먼저 담을 넘고 그의 손을 칼슨을 위해 뻗었다. 그 때 다섯 발의 총성이 울렸고 칼슨은 거리에 쓰러졌다. 후에 그 선교사는 말했다. “나를 먼저 가게하고, 그는 나를 살리기 위해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콩고의 순교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콩고인 목사가 장례의 주례를 담당하였다. 수 백명의 콩고 기독교인들이 폴이 사역하였던 카라와(Karawa) 마을로 꽃과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찾아와서 마을에 뿌렸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희생한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링갈라(Lingala)어로 새겨진 폴 칼슨 무덤의 비문에는 요 15:13절의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쓰여 있다.​

남편이 죽은후 그의 아내 로이스는 1965년에 그의 전기 『몬강가 폴』(Monganga Paul)을 저술하였다. 몬강가는 의사라는 뜻이다. 그의 사후 사람들은 ‘폴 칼슨 의료 프로그램’(Paul Carlson Medical Program)을 만들었는데, 이 기구는 2000년에 확대되어 ‘폴 칼슨 동반자’(Paul Carlson Partnership)로 운영되고 있다. 이 기구는 중앙아프리카의 의료, 경제개발, 교육을 위한 비영리기구로써 시카고에 근거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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