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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어린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 주기철 목사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10.04|조회수95 목록 댓글 0

어린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 주기철 목사

홍성사에서 출간된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이란 책은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광조 장로님이 쓰셨습니다.
그 책 뒤표지에 주광조 장로님의 글 한 토막이 실려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 주기철 목사, 그 분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두려움에 떨었고, 괴로움에 눈물 흘리던 범인이었다. ...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본다.
아버지의 무엇이 다른 사람과 달랐던 것일까?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그 어렵고 힘든 가시밭길을 외롭게 걷게 한 것이었을까?”

저는 그 답을 찾으려고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제가 너무나도 궁금하였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같이 연약한 자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
그래서 허겁지겁 읽어 내려갔습니다.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날을 기억하는 주광조 장로님은 그 날을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네 번째 구속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조반상을 받고 막 첫 숟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 형사들이 집으로 쳐들어와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는 한참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계시다가 늘 기도하던 동쪽 마루방으로 피해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더 이상 이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저를 빨리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아버지는 우셨고 기둥을 붙잡고 바들바들 떠셨습니다.
그 아버지께 어머니께서 다가가 감싸 안고는 같이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목사님,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교인들에게 보여 주려 하십니까? 온 교인들이 목사님만 바라보고 있는데, 목사님이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아침 두 분의 애처로운 모습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생생한 아픔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미 몇 차례 모진 고문을 당하셨던 아버지로서는 다시 잡혀가서 그 무서운 육체적 고통을 감내한다는 게 두렵고 겁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둥을 부둥켜안고 떨며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과 위협 앞에서 아버지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셨던 범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마친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조용한 모습으로 일본 경찰의 뒤를 따라 나가셨습니다.

어린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 주기철 목사는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투사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전사도 아니었습니다.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아들 주광조 장로는 ‘자신의 생명보다 더 컸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답을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40년 9월 20일,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평양 경찰서에 수감되었습니다.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최후의 길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그 때 목사님의 집을 찾아온 산정현교회 성도 20여명을 보고 집 앞 골목길에서 즉석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이 날 행한 설교가 용인에 있는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입구 오른쪽에 있는 커다란 돌판 위에 또렷이 새겨져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천국 소망이 평범했던 그를 순교자의 길로 이끈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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