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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인디언의 사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10.20|조회수42 목록 댓글 0

인디언의 사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는 코네티컷 해담(Haddam)에서 열 아이 가운데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9살에, 어머니를 13살에 잃고 고아가된 그는 유산으로 받은 땅을 일구며 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사역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는 그의 형 느헤마이어(Nehemia)가 예일을 마치고 목사가 된 것을 보고 그의 뒤를 따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그가 사역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과 맞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그는 ‘원죄’와 ‘하나님의 주권’ 교리에 반발하였다. 하나님의 법은 그에게는 너무 엄격하게 느껴졌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그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느꼈다. 사역자가 되려는 계획은 있었으나 아직 그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으며 그는 당연히 교회의 정식 회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 결정적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1739년 7월 어느 금요일 아침에 그는 숲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영적으로 잃어버린 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모든 종교적인 노력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강요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틀 후(1739년 7월 12일)의 일기에서 브레이너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나는 다시 고독한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이 내 영혼의 이해력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외부적인 빛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것은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내적인 이해력이었다. 이런 생각을 나는 전에 가져본 일이 없었으며 흉내도 낼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새로운 세계에 와 있다고 느꼈다... 이 때 구원의 길이 무한한 지혜, 적절함, 그리고 탁월함으로 나에게 열렸다. 왜 내가 전에 다른 구원의 길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나 자신의 방법을 버리고 사랑스럽고 축복되고 좋은 길을 따르지 않았는지 궁금해 하였다. 만약 내가 내 자신의 의무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거나, 내가 이전에 고안한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나의 영혼은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왜 세상은 이와 같은 구원의 길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따르지 않는지 궁금하게 생각되었다.”(1)

이렇게 그는 회심을 체험하였고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예일에 입학하였다. 다음해에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예일에 대각성(Great Awakening)을 일으켰다. 1741년 졸업식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설교자로 초청되었는데, 학교는 부흥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뜨거움을 진정시켜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교수단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학생들의 편에 서서 대각성은 순수한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브레이너드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토마스 클랩(Thomas Clap) 총장을 비롯하여 이사진과 교수단은 부흥운동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이들을 위선자나 회심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학생들은 우선 공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자백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3학년인 브레이너드는 친구들과 많은 시간 동안 영적인 주제에 대해서 토의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교수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그의 친구가 브레이너드에게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의자만큼의 은혜도 없다.(He has no more grace than this chair.)”고 말하였다. 함께 참석한 한 신입생이 이 말을 들었고 결국 클랩 총장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브레이너드는 소환되었고 그런 말을 한 것을 인정하였다. 총장이 그에게 공적으로 사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브레이너드는 사적으로 한 말을 가지고 공적으로 사죄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라고 거부하였다. 결국 이것은 저항의 행위가 되었고 그는 예일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에 코네티컷에서는 법으로 예일, 하버드, 혹은 유럽의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목사로 임용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브레이너드는 사역자의 길이 막힌 것이었다. 그는 총장에게 자신의 잘못을 빌면서 학생들에게 공적으로 사죄할 길을 열어달라고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의 퇴학은 그의 삶에 새로운 사역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1742년 코네티컷 댄버리(Danbury)의 선교협회로부터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선교협회는 그를 메사추세츠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파송하였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인디언 선교를 위해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2) 그의 첫 번째 과제는 메사추세츠 카우나우믹(Kaunaumeek)에 있는 모히칸 인디언(Mohican Indian)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재산이 필요하지 않았던 브레이너드는 땅을 팔아 친구의 학비를 대주었다. 43년 4월부터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천막집에 살면서 인디언이 먹는 음식을 먹으며 인디언처럼 살았다. 그러나 1745년 봄까지도 그의 선교 사역은 힘들고 열매가 별로 없어보였다.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하였으며 결핵은 악화되었고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였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지내야만 했다. 기도도 묵상도 독서도 할 수 없었다. 이 적막한 황무지에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조차 없었다.”(1745. 4. 30.)

45년 6월에 브레이너드는 선교협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고, 뉴저지의 크로스윅성(Crossweeksung)에 있는 인디언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약함 중에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8월 8일의 일기를 보면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65명 정도였는데 예배 중에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이런 일은 거의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오후에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남녀노소를 합하여 65명가량이 참석했다. 말씀을 전하는 동안 저들 가운데 말씀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임위에 내리는 듯하더니 모든 사람을 압도해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놀라운 힘에 사로잡힌 듯하였다. 불어난 홍수나 휘몰아치는 격류가 무게와 압력으로 그 앞에 거치는 것들을 휩쓸어 버리는 현상에나 비유할 수 있을까?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엎드려졌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어린이들도 술주정뱅이도 모두 눈물로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하며 울부짖어 기도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기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브레이너드는 이러한 ‘은혜의 소나기’가 1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1745년 11월 3일의 일기를 보면 그날 브레이너드는 어린이 여섯 명과 성인 여덟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성인 중 한 여인은 80세였고, 남자 두 사람은 유명한 술주정뱅이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살인자였다. 브레이너드는 이들의 삶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보기까지 세례를 미루어왔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변한 것을 보고 세례를 베풀면서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이날 14명에게 세례를 베풀어 총 47명의 세례신자를 갖게 되었다. 46년 11월까지 그는 그곳에서 사역하였고 130명의 인디언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의 결핵은 더 악화되었고 결국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1747년 5월 더 이상 그는 사역을 계속 할 수 없었다. 그 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를 자기 집으로 오도록 하였고 병을 추스르게 하였다. 이미 서로 알고 사랑하던 둘째 딸 제루샤는 그를 정성껏 간호하였다. 브레이너드는 ‘제루샤와 함께 있는 것은 천국의 한 단면’이라고 기록하였다.

1747년 10월 2일 그는 마지막 일기를 썼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제루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대와 차마 이별할 수 없소.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 영원을 함께 누릴 것이요. 나의 영혼은 오늘 하나님의 품에 고이 안깁니다.... 오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1747년 10월 9일 브레이너드는 2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브레이너드를 돌보던 제루샤도 같은 결핵에 걸렸으며, 다음해에 숨을 거두었고 가족들은 그녀를 브레이너드 곁에 묻어 주었다.

아버지 에드워즈는 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넉 달 가량 지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딸 제루샤를 저 세상으로 데려가셨다. 닷새 정도의 짧은 병을 앓다가 제루샤는 18세의 나이로 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브레이너드와 매우 흡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죽기까지 19주 동안 계속 그를 돌보면서 함께 지냈다. 그녀는 그를 매우 기쁜 심정으로 보살폈다. 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 그는 우리에게 그녀의 너무나도 진심 어린 사랑을 흡족해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하늘나라에서 그녀와 만날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브레이너드는 헌신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을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브레이너드에게 주셨던 기도의 삶을 주시기를 바란다. 또한 이와 같은 기도로 참된 부흥과 선교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1749년 조나단 에드워즈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편집해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The Life and Diary of Brainerd)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브레이너드가 살았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일기는 오늘날까지 계속하여 출판되고 있으며, 현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엄 캐리를 비롯해 열거하기 힘들만큼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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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nathan Edwards는 그가 편집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서 이날의 페이지의 맨 위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주일, 1739년 7월 12일, D.B.에 의해서 영원히 기억될 날”

(2) 예일로부터 브레이너드의 축출 사건은 또 다른 역사로 이어지게 된다. 예일을 졸업한 장로교 목사인 Jonathan Dickinson과 Aaron Burr Sr.는 브레이너드의 복학 노력에 관심을 보였으나 학교가 이를 거부한 것에 대해 실망을 하였다. 그들은 장로교인으로서 예일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었고 그들 자신의 학교를 시작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1746년 10월 22일에 뉴저지 칼리지(The College of New Jersey)가 디킨슨의 집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학교는 후에 Princeton 대학이 된다. 브레이너드는 이 학교의 첫 번째 학생으로 여겨졌으나, 이때에 그는 사역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다. 브레이너드의 축출은 결국 프린스턴의 기초가 된 것이다.

(3) William Carey, John Wesley, Henry Martyn, Robert Morrison, Robert Murray McCheyne, Andrew Murray, Jim Elliot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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