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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아버지의 영향력 존 패튼(John Paton)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10.20|조회수44 목록 댓글 0

아버지의 영향력 존 패튼(John Paton)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존 패튼(John Paton: 1824-1907)은 스코트랜드의 덤프라이즈(Dumfries) 가까운 마을의 기독교가정에서 열한 아이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시절 열 세 식구가 방 3개가 있는 조그만 집에서 살았는데, 그는 언제나 그 집에 있던 벽장을 회상하곤 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벽장은 오두막집의 성전이었다. 매일, 그리고 하루에도 여러 번 우리는 아버지가 거기 들어가시고, 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들을 위한 기도가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어떤 영적인 본능 같은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떠오르는 갓난아이의 미소와도 같은 행복한 빛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살아가는 의식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반영이었다... 나의 영혼은 어린 시절의 그 장면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외침의 메아리를 듣는 듯하다. 그것은 나의 모든 의심을 승리의 호소로 이끌어 간다. ‘아버지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는데, 왜 나는 그렇게 못한다는 말인가?’”

12살이 되기 전에 패튼은 아버지의 양말 만드는 일을 배웠으나, 그는 이미 자신을 선교사로 바칠 결심을 하였다. 그는 글라스고(Glasgow)에 있는 신학교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나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그와 함께 6마일(약 10Km)를 걸어서 동행해 주었다. 패튼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집 떠나는 길에서의 아버지의 충고와 눈물, 그리고 천국과 같은 대화는 나의 마음속에서 아직도 어제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반마일을 우리는 거의 침묵 속에서 함께 걸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계속하여 침묵 속에서 나를 위해 기도했다.... 약속된 헤어짐의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나의 손을 잠시 굳게 잡으시고 엄숙하고도 정감 넘치는 목소리로 ‘아들아,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시기를,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 너를 번창케 하며, 너를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하시기를....’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으나, 그의 입술은 계속하여 기도하였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껴안았고 헤어졌다.... 아버지는 시야에서 사라졌으나 나의 마음은 너무나 벅차서, 길가로 가서 잠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제방 위에 올라가 우리가 헤어진 그 자리에 아버지가 아직 서 계신지를 보려고 하였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아버지가 제방으로 올라오시며 나를 찾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는 나를 보지 못하였으나, 내가 간 방향을 바라보신 후에 집으로 향하셨다. 나는 눈물로 나의 시야가 가리워도, 아버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길을 재촉하며 진심으로 그리고 여러 번 하나님께 약속하였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결코 슬픔이나 불명예를 드리는 일이 없겠노라고...”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후일 주님을 섬기기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패튼은 먼저 글라스고시 선교회에서 일을 하며 빈민가를 가가호소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빈민가에서 그는 위협과 공격에 시달렸는데, 후에 식인종들을 위해 사역하면서 만나게 될 일들을 위한 완벽한 준비를 한 셈이었다. 빈민가 사역을 시작한지 10여년이 지났을 때 누군가가 패튼에게 남태평양 군도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패튼은 20년 전에 선교사들이 남태평양 군도의 식인종들에 의해서 잡아먹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패튼은 그 당시 뉴헤브리디스(New Hebrides)라고 불리워지고 지금은 바누아투(Vanuatu)로 불리우는 군도에 있는 탄나(Tanna) 섬과 아니와(Aniwa) 섬에서 일하였다. 패튼과 갓 결혼한 매리 앤은 1858년 4월 16일 남태평양을 향해 출발해 11월에 탄나 섬에 도착하였다. 2월 12일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으나 아내는 3월 3일 숨을 거두었으며 아들 역시 17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는 두 사람을 자기 손으로 묻었다. 그는 주님이 아니었다면 슬픔 때문에 미쳐서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홀로 남겨진 패튼은 이 마을 저 마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생명의 위협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피해갔으며, 탄나 섬의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질병도 이겨냈다. 섬 주민들이 보급품을 훔쳐가 굶어죽을 상황에 처하자 패튼은 섬 건너편에 있는 선교사 캠프로 도망쳤다. 하지만 추격자들은 그가 머물던 집에 불을 질렀고 그는 배로 도망쳤다.

1862년에 패튼은 탄나를 떠나 호주와 영국을 순회하면서 선교를 위한 모금 활동을 하였으며, 마가렛 화이트크로스와 재혼하였다. 그들은 1866년에 아니와 섬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놀랍게도 원주민들이 복음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들은 15년간 그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고아원을 세우고 성경을 번역하였다.

나이가 들어 원주민 사역을 할 수 없게 되자 패튼은 호주와 영국, 북미를 순회하면서 선교의 필요성을 알렸다. 사역을 마칠 무렵까지 패튼이 세운 학교에서는 300명이 넘는 현지인 선교사가 배출되었고, 이들은 뉴 헤브리디스 제도를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패튼 부부가 낳은 자녀 10명 중에서 넷은 어린 시절에 죽었으며, 3명은 아버지의 사역을 이어갔으며, 이들과 함께 선교사 부부 20여쌍이 함께 원주민을 섬겼다. 패튼의 가족과 후손들은 1970년까지 바누아투를 섬겼다. 패튼은 1907년 1월 28일 호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죤 패튼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깊은 영향을 받은 축복된 자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기도를 헛되게 하지 않은 아들의 귀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패튼이 한 말 중에 다음과 인상적인 말이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에게 실재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도 실재가 되셨다.”(God was so real to my father, so He became real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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