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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료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9.25|조회수29 목록 댓글 0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

보구여관. 여성환자가 남자의사에게 진료 받기를 꺼리는 풍습 탓에 여의사를 파견하여 부녀자와 어린아이들만을 따로 치료하는 병원을 개설해달라는 요청으로 1887년 이화학당 구내에 개설되었다.

코로나 19 돌림병과 싸우는 의료진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벌써 3년 가까이 이 병과 싸우고 있으니 의료진들의 피로감은 이미 극에 달해 있을 것이다. 확진자가 폭증하여 병상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접하며 전쟁 배경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이 장면은 순전히 상상에 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투가 한창인 전쟁터의 야전병원에서 자꾸 몰려드는 부상자들을 감당하지 못해 이리뛰고 저리뛰는 의료진들의 모습이다. 그 장면 속 전쟁은 화생방 전쟁이다.

병원 드라마 주인공은 대부분 의사이거나 어쩌다 여자 환자가 주인공일 수는 있어도 간호사가 주인공인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간호사는 항상 조연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간호사는 여성비율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직업이고, 종합병원의 경우 3교대로 한밤중에도 쉬지 못하고 근무해야 하는 고된 직업이기도 하다. 여성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은 직업 중에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직업이 있을까. 간호사 직업은 인간의 생명을 돌본다는 사명감이 없다면 견뎌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간호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86년에 이 땅을 방문하여 제중원에서 알렌 의사, 헤론 의사와 함께 일하면서 민비의 시의로 봉사했던 미국 북장로교의 여성 선교사 애니 엘러스였다. 한국인 간호사가 양성되기 시작한 곳은 1903년의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Nurses' Training School)로 설립자는 미국 북 감리교 해외여성선교회 소속의 마가렛 에드먼드(Margaret Jane Edmunds)간호사이자 선교사였다.

1902년 9월 3일, 뉴욕에서 마가렛 에즈먼드는 조선에서 선교를 하다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두 여성 의사 선교사 로제타 홀, 메리 커틀러와 함께 런던을 거쳐 조선으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이들은 9월 18일에 런던에 도착하였으나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로 인해 동양으로 오는 배편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간신히 구한 배편은 웨일즈에서 출발하여 흑해를 거쳐 상하이에 정박했다가 고베로 가는 화물선이었다.

여객선을 기다리느니 이 배를 타는 것이 빨리 서울로 데려다 줄 것으로 기대하고 이들은 이 배에 승선했다. 그런데 장마, 노동 쟁의, 인종 폭동, 크리스마스 휴가 등 온갖 사정으로 기항지마다 하염없이 머무르게 되면서 서울에 도착한 것은 반년도 더 지난 1903년 3월 18일이었다.

마가렛 에즈먼드 (1894)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계획한대로 돌아가던가. 계획대로 안 되어 속 끓이다가도 뒤돌아보면 다행이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들이 함께한 6개월의 항해 시간은 마가렛 에즈먼드가 두 선배로부터 한국 선교활동에 가장 필요한 한국어를 익히는 시간이었고, 세 의료인이 간호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커리큘럼을 짜는 시간이었다. 만약 계획했던 일정대로 서울에 도착하여 곧바로 세 사람이 환자들과 씨름하기 시작했다면 그 해에 간호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을까.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사 두 사람과 간호사가 온전히 그렇게 긴 시간동안 함께 토론하고 공부하고 계획할 시간이 그들에게 주어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보구여관은 미 북감리교 해외여성선교회가 여성교육을 위한 이화학당을 설립한 직후, 이화학당 옆에 세운 여성들을 치료하기 위한 최초의 여성병원이었다, 로제타 홀은 그 병원의 두 번째 의사였고, 메리 커틀러는 세 번째 의사였다. 이들은 함께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간호원 양성학교를 세우는 과업을 시작했고, 12월부터 5명의 간호사 지망생들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로제타 홀 (1890, 왼쪽)과 메리 커틀러(1910, 오른쪽)

​학생 다섯 명 중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보구여관에서 로제타 홀, 메리 커틀러 등 의사의 업무를 보조하고 환자를 간호하면서 병원 업무에 꽤 익숙했던 두 여성이 있었다. 그들이 5년 후에 보구여관 간호학교의 첫 졸업생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정식 간호사가 되었다.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 이 두 첫 간호사의 인생 이야기는 소설보다도 더 드라마틱하다.

이그레이스는 성도 알려지지 않은 복업이라는 여종으로 1882년 9월 9일,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 괴사병에 걸려 걸을 수 없어 기어다니게 되자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보구여관에 환자로 들어온 복업은 메리 커틀러와 로제타 홀의 여러 번에 걸친 괴사한 뼈 제거 수술과 재활치료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병원에 머무는 동안 메리 커틀러와 전도부인 여메리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정동제일교회에서 그레이스(Grace)라는 세례명으로 1897년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복음을 가르치고 환자를 돌볼 수 있도록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레이스는 병이 치료된 뒤, 집으로 돌아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녀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오전에는 이화학당에서 기초 과목과 영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병원에서 보조로 일하게 되었다.

김마르다는 의처증이 심한 남편으로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받아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콧등의 일부를 절단당하고 버림받은 가련한 여성이었다. 남편은 두 아이를 데리고 사라져 버려서 아이들과도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보구여관에 환자로 오게 된 이 여성은 메리 커틀러의 수술로 코를 복원할 수 있었다. 1894-1895년부터 보구여관에서 조수를 하면서 간호 일을 배웠다. 그녀는 여메리 전도부인에게서 복음을 배워 정동제일교회에서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마르다(Martha)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두 여성에게 기독교는 말 그대로 복음이었고 구원이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은 완전히 새롭게 얻은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전근대적 삶을 던져버리고 전문직 여성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첫 한국 여성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레이스와 마르다는 1906년 1월 25일, 간호사 모자를 수여받은 예모식(가관식)을 가졌다는 기록을 보면 2년 동안의 교육을 마치고 예비 간호사의 자격을 얻은 듯하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그레이스는 후에 독립운동가이자 수원 삼일중고등학교의 설립자가 된 이하영 전도사의 공개 청혼을 받았다. 그녀는 4개월 동안 심사숙고하다가 결혼 이후에도 공부와 병원일을 계속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청혼을 수락했다. 1907년 1월, 이들은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하영의 아내가 되면서 이씨 성을 갖게 되어 이그레이스가 되었다.​

이하영과 이그레이스의 결혼 (1907년 1월)

1908년 11월 5일,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는 5년 동안의 교육과 실습을 마치고 정식 간호사가 되었고, 이후 보구여관에서 근무했다. 1910년 이그레이스의 남편 이하영은 평양의 이문골 교회로 발령이 났다. 그러자 이그레이스는 로제타 홀, 메리 커틀러가 근무하던 평양의 광혜여원으로 옮겨 수간호사로 근무하며 수술시 마취를 담당했다.

이그레이스(왼쪽)와 김마르다는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 자격증을 얻었다.

1913년 말, 김마르다가 광혜여원 수간호사겸 병동 담당 간호사로 임명되자, 이그레이스는 로제타 홀의 조수 겸 왕진담담 간호사가 되었다. 그 후 산파 과목을 이수하여 1914년 조선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의생 면허를 받았다. 의생 면허는 1914년에서 실시한 새 의료 규칙으로 부족한 의사 수요에 대응하여 실무 경험이 많은 의료 인력들 중 시험에 통과한 이들에게 의사 면허증을 주는 제도였다. 이로써 이그레이스는 우리나라에서 의사 면허증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광혜여원의 수술 장면, 오른쪽 끝이 이그레이스, 왼쪽 두번째 로제타 홀 의사

이그레이스는 남편이 1919년 3.1운동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자 남편과 함께 고난을 함께하는 의미로 자녀들과 함께 콩밥을 지어먹으며 옥바라지를 하였다고 한다. 출옥한 남편은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서 목회 활동이 어려웠다. 이하영은 1923년 강릉교회에 임명되어 4년간 시무한 뒤 휴직하다가 1931년 스스로 은퇴했다. 이 시기에 이그레이스는 강릉에서 개업의로 활동했다. 미국 북감리교 해외여성선교회의 1925년의 년차 보고서에 의하면 강릉에서 1924년 6월부터 1925년 5월까지 1년 동안 200명의 여성과 어린이를 치료하고 4명의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이후 이그레이스는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수원으로 돌아와서 거북산 아래에서 산파소를 운영하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들을 교육했다고 한다. 남편 이하영 목사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 83세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녀의 사망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우리나라 간호역사의 시작은 이렇듯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다. 이 두 여성들에게서 시작된 간호사들의 역사는 100년을 넘기면서 우리나라 의료 발전에 협력해 왔다. 이런 이들이 간호사의 역사를 시작하였으니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자세, 혹은 사명감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녀들의 영적인 자산, 즉 그녀들의 헌신과 공로를 잊지 말아야겠고 오늘도 의료 현장에서 묵묵히 돌림병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그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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