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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을 선택한 김마르다·이그레이스, 한국 최초 간호사가 되다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9.25|조회수73 목록 댓글 0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 김마르다·이그레이스, 한국 최초 간호사가 되다

한국인 최초 간호사는 1908년 보구녀관 간호원양성소를 1회로 졸업한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다. 1908년 11월 5일 열린 보구녀관 간호원 양성소 1회 졸업식에 대해, 1933년 출간된 「조선간호사」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졸업생 2명의 수는 적지만 장래 그들의 다수 자매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 봉사의 새 영역에 투신할 것에 대한 예고로 보아 의미심장하다. 조선간호부 선발대가 수천 년 전통적 구습의 강한 성벽을 용감히 쳐 부시고 사회로 뛰쳐나와 봉사의 입장 뿐 아니라 근대여성운동의 견지로도 매우 중요한 새 직업에 헌신한 그 점에 대하여 우리는 그들에게 흠앙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김마르다의 본명, 나이, 신분에 관하여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출생연도는 1870년대 초, 신분은 양반도 노비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3년, 남편에게 심하게 폭행당해 코 일부와 오른손 손가락을 잘린 ‘김씨 부인’을 사람들이 보구녀관에 데려왔다. 김씨 부인은 치료를 받은 후에 남매인 자녀를 찾고자 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가족을 잃은 김씨 부인은 세례를 받아 마르다라는 이름을 얻었고 감리교 선교회와 정동의 보구녀관, 그리고 동대문의 볼드윈진료(Baldwin Dispensary)소에서 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회복했다.

이그레이스는 1883년 출생으로 본명은 이복업이다. 김마르다와 마찬가지로 보구녀관에 환자로 왔다. 원래 어느 집안의 사비(私婢)였는데 다리가 불구인데다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정도가 되자 주인이 집 밖으로 내보냈고, 버려진 이복업을 사람들이 보구녀관에 데려온 것이 인연이 되었다.

김마르다는 치료를 받으며 낮에는 가사를 돕는 명분으로 보구녀관에서 몇 년간 요리와 빨래, 청소 등 병원의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밤에는 입원 환자를 보살피는 ‘의료 보조인’, 일종의 간병인 역할을 했다, 한글과 성경을 배우며 신앙심과 성실성을 인정받은 김마르다는, 빨래와 같은 단순 노동은 중단하고 기도를 이끌고 전도를 하게 됐다. 김마르다는 또한 감리회에서 동대문에 여학교를 설립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그레이스는 당시 여의사였던 로제타홀과 커틀러로부터 여러 차례 수술을 받은 뒤 걸을 수 있게 된 후 “보구녀관에서 숙식하며 일할 테니 학교에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그레이스는 김마르다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잡일을 하다가 곧 서양인 선교의사를 돕고 환자를 간호하는 일로 옮겨갔다.

김마르다가 열성적인 기독교 전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면, 이그레이스는 학업과 병원 운영 관련 업무에서 뛰어나 서양인 선교사의 통역으로 큰 도움이 됐다. 이그레이스는 손재주가 뛰어난데다가 재봉틀 사용법까지 익혀 병원 물품을 만들었다. 특히 이그레이스는 삼베용 바늘이나 붕대를 꼼꼼하게 잘 다뤄,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보구녀관에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학교가 생성된 1903년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는 이 학교의 첫 입학생이 돼 간호사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남다른 책임감과 열정으로 낮에는 학업을, 밤에는 보구녀관에서 환자를 보살피며 간호정신을 배워 나갔다.

1903년 함께 간호교육을 받기 시작했던 다른 동료들은 모두 중단하였으나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는 각고의 노력 끝에 3년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하고 간호사의 상징인 모자를 쓸 수 있었다. 다시 3년이 지나 1908년 11월 5일 한국 최초의 정규 간호학교인 보구녀관 간호원 양성소에서 6년간의 간호교육과정을 마치고 정식으로 졸업한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는 한국의 첫 졸업간호사(graduate nurse)가 됐다. 이는 여성이 근대적 교육을 받을 기회가 극히 드물었던 조선에서는 그 자체로 예외적이었으며 한국최초의 간호사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정식 간호사가 된 두 사람은 보구녀관에서 본격적인 환자 간호 활동을 펼쳐 나간다. 진료와 함께 특히 간호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김마르다는 1909년부터 후학양성에 열정을 쏟았으며, 이그레이스는 1910년부터 수간호사가 되어 환자를 돌봤는데 특히 여성과 어린이 치료에 평생을 바쳤다.

질투심이 많고 의처증이 심한 남편의 폭행에 의해 손가락과 콧등을 잃은 김마르다, 천민의 여종 출신으로 태어나 어릴 때 괴사병에 결려 다리를 절뚝거리는 장애인이 된 이그레이스. 두 사람은 근대 가부장제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당당하게 자신의 직업과 인생을 선택해 한국 간호역사의 문을 연 주인공이 되었다. 보구녀관에 깃든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의 헌신적 돌봄의 간호정신은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한국인 첫 간호사 김마르다, 이그레이스 졸업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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