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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열전 ① 부산·경남지역에 심겨진 북음 - 호주 1호 선교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5.09|조회수43 목록 댓글 0

선교사열전 ①

부산·경남지역에 심겨진 북음

 

호주 1호 선교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소망 없던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고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성경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글 자국어 성경을 마주하며 복음이 자랐다. 고아와 거지들을 모아 학교가 시작되고…,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한 병원이 개설되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머물렀다. ‘건너와서 우릴 도우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묵묵히 순종하며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때 뱃길로 한 달도 더 걸리던 땅끝을 향해 사선을 넘어왔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사랑과 열정 그 순수한 헌신 위에 오늘의 자랑스러운 우리가 지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번 선교사 열전 연재를 시작하며 그 옛날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간 초창기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한국 땅에 전해졌던 복음, 하나님의 세심한 사랑과 섭리가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그 시작으로 먼저 부산·경남지역에 복음을 전한 호주 1호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의 삶을 찾았다. 

 

건너와서 우릴 도우라

 

데이비스, 한국명 덕배시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에서 태어났다. 데이비스의 가족은 독실한 청교도 단체인 플리머스 형제단에 속해 있었는데, 데이비스가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3남매의 실제적인 가장이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20세 때는 누이 사라가 사역하던 인도 남부지역에서 1년 어간 선교사역을 돕기도 하였다. 이것은 선교사로서 그의 생애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건강이 나빠져 다시 호주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다음의 선교를 위하여 준비하였다.

 

데이비스가 한국 선교를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중국주재 성공회선교부 월프 신부였다. 그는 1887년 선교사가 없는 부산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여러 곳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요청이 번번이 거부당하자, 월프는 자신의 부산 방문기와 부산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서신을 호주에 보내고 이 편지가 미션 저널에 실렸다. 그의 글을 읽은 데이비스는 한국이 인도보다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고, 인도로 가려던 마음을 돌려 한국으로 선교하러 가기로 했다. 이 한 통의 편지가 호주의 젊은 청년 데이비스로 하여금 한국으로 그리고 부산으로 오게 한 것이다. 

 

데이비스는 선교 파송을 위해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로 이적하였다. 1889년 8월 5일 데이비스는 목사안수를 받았다. 1889년 8월 17일 멜버른에 있는 스카츠교회에서 파송 예배를 드리고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청년연합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누이 메리와 함께 배에 올랐다. 그리고 1889년 10월 2일 드디어 부산에 도착했는데, 이날이 바로 호주 선교부의 부산선교를 여는 아침이 되었다고 한다. 

한 알의 밀알처럼 부산지역에 날아온 복음 

 

이후 데이비스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인천을 거쳐 10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그를 환대한 것은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었다. 의료선교사 헤론이 말을 타고 영접을 나왔고 스크랜턴 부인이 따뜻하게 맞아줬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언더우드와 교류를 하며 언어를 익혔다. 거기서 5개월간 한국어를 배우며 선교사역을 위한 적응기를 보냈다. 그는 원래 언어의 재질이 있었으므로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5개월이 지난 때에는 일상의 대화는 물론 가벼운 설교까지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데이비스는 서울 지역에는 이미 선교를 개시한 선교부 외에 또 다른 선교사들이 입국할 전망이었으므로 선교사가 전혀 없는 지역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부산으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여기에는 “남의 터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는 당시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할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한반도의 복음의 씨앗이 급격히 심겨진 데는 이러한 영적 영토를 만드는 많은 선교 정책이 공헌했다. 

 

데이비스는 부산이 한국의 관문일 뿐 아니라 일본과 인접해 있어 보다 더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890년 3월 14일 누이를 서울에 남겨둔 채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약간의 전도지와 약품 등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났다. 

문제는 3월이라고 하지만 추위는 계속되었고 그해 따라 잦은 비가 겹쳐 먼 길을 도보로 여행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서울을 떠난 그는 수원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 지방을 거쳐 경상도에 이르는 거리를 약 20일 만에 여행을 마치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절망적인 상태였다. 무리한 도보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곧 폐렴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이날도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부산에 있던 유일한 서구인이었던 캐나다출신 게일 선교사가 데이비스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가 자기 집으로 옮겼다. 일본인 의사가 와서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다음 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데이비스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한국에 온 지 6개월, 이때 그의 나이 불과 34세였다. 너무도 짧은 생애였다. 

데이비스의 죽음, 선교의 못자리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이 지역 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누이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했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한국을 떠났고, 그해 7월 18일 멜버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값진 초석이 됐다. 호주장로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를 계속하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그의 죽음에 충격과 도전을 받은 호주 빅토리아장로회의 여성들은 1890년 8월 25일 여선교회연합회를 조직하여 한국에 선교사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기에 1891년에 제임스 맥케이 목사와 사라 맥케이 부부, 멘지스, 퍼셋, 페리 등 세 사람의 미혼 여선교사 파송을 시작으로 40여 명의 여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됐다.

또 1894년에 아담슨 목사 부부가 파송되었으며, 한국 선교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이후 호주교회는 일제가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한 1941년 전까지 78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부산·경남 지방에 있어 호주장로교회 역할은 대단하다. 진주(1903년)와 마산(1909년 현 창원)지방에 선교부를 설치했다. 그 후 통영(1912년)과 거창(1913년)에 잇달아 선교부를 설치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교회. 학교. 병원 등을 세워 경남지역 복음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들을 통한 자선사업, 교육사업과 성경 교육 등을 통한 신앙교육, 전도사역들은 지금의 부산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당시 부산선교부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나환자들을 돌보는 사역이었다. 나병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병인데 적절한 치료나 보호 없이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으므로 호주 선교사들의 활동은 필요하고도 적절한 사역이었다. 조선에 대한 선교의 꿈을 품고 준비를 하였으나 아무것도 펼쳐 보지 못한 젊은 선교사,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대로 두고 보지 않으셨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순직으로 부산·경남 지방이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 못자리가 되었다. 

 

※ 선교사열전 이야기를 연재하며 전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님과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 김재현 박사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여기에 소개되는 이야기는 ‘부산지방에서의 초기 기독교’(한국교회와 역사연구소)와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을 기본 자료로 편집하였다.

또 호주선교사묘원 경남선교120주년 기념관의 사료를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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