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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열전 ③ 구제하고, 가르치고, 양자삼고 - 한국에 파송된 호주 첫 여선교사 이사벨라 멘지스(Belle Menzies)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5.13|조회수42 목록 댓글 0

선교사열전 ③ 구제하고, 가르치고, 양자삼고

한국에 파송된 호주 첫 여선교사 이사벨라 멘지스(Belle Menzies)

앞서 선교열전에서 보았듯 부산 경남지역은 호주선교부의 특별한 선교지였다. 호주장로교 선교부에 맡기신 땅 끝이 바로 부산이었던 것이다, 이 중 더욱 특별함은 호주선교부 여성 선교사들의 열전이다. 맥켄지 선교사 이야기에서도 소개하듯 그의 첫째 딸 헬렌과 간호사인 둘째 딸 캐더린은 다시 한국에 와서 부산일신병원을 설립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처럼 호주선교부의 여성 선교사들의 왕성한 활동 뒤에는 처음부터 호주장로교회 여선교회연합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선교 롤 모델이라 불리는 한국에 파송된 첫 호주 첫 여선교사 이사벨라 멘지스(Belle Menzies)의 역할이 컸다.

 

호주에서 온 첫 선교사 데이비스 선교사, 그가 부산에 온지 하루 만에 폐렴으로 34년의 생을 마감하게 되자 호주장로교회는 첫 선교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며 1891년 10월 다시 5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 한 사람이 바로 멘지스였다. 이때 멘지스는 여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있는 동안에는 결혼할 수 없다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처녀의 몸으로 한국 파송 선교사에 지원했다. 페리와 포셋 그리고 빅토리아장로회 청년연합회가 파송한 맥케이 목사와 그의 부인 사라와 함께 40여 일긴 항해 끝에 일본을 거쳐 1891년 10월 12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첫 사회복지시설인 미오라 고아원을 시작하고 이를 모체로 1895년에는 일신여학교를 설립했다. 그런가 하면 버려진 아이를 입양했다. 구제하고… 가르치고… 양자삼고… 그녀가 살아온 부산에서의 삶이다.

미오라 한 손에는 빵 다른 한 손에는 복음을

 

부산진에 거처를 정한 멘지스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여성과 중심으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한국고등신학연구원 김재현 박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멘지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은 먼저 한글을 배우는 일이었다고…. 멘지스는 한국어 선생 심상현을 만나 공부하였다. 이후 어린이들을 위한 성경 공부반을 운영하면서 한국인 전도부인과 함께 지역을 순회하였다. 이 와중에 극심한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 신체적 장애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1893년 미오라 고아원을 설립했다. 호주 원주민 언어로 안식처란 뜻의 미오라. 한 손에 빵과 다른 한 손에 복음을 전한 이곳은 부산진 고아들의 양식과 영혼의 안식처가 되었다.

 

멘지스의 초기 사역에서 한국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 가장 중요한 사역은 여학교의 설립과 이를 통한 교육활동이었다. 멘지스는 고아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어학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서 3년제 소학교를 설립했다. 시간이 지나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좌천동에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새롭게 건축해 개교하였는데, 지금 동래여고의 전신이라고 한다. 이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첫 교육기관이자, 이 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그녀는 첫 번째 교장을 맡아, 여성 교육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나중에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1919년 부산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이끈 주역이었다. 고등과 학생 11명은 태극기 50여 장을 만들어 3월 11일 밤 9시에 좌천동 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부산감옥에서 복역하였다.

 

멘지스 선교사와 민신복

 

멘지스 선교사는 집 앞에 버려진 아이를 양녀로 삼고 양육하였는데 그 아이가 민신복 여사다. 이에 대해 이상규 교수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913년 11월 어느 날 이른 새벽 멘지스 선교사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불길한 예감에 뜰에 나가보니 집 앞 꽃밭에 한 아이가 버려져 있었다. 아이는 누더기 옷으로 싸여 선교사집 앞에 버리고 간 것이다. 날이 밝자 깨끗이 씻기고 우유를 먹인 후 경찰에 신고하자 경찰은 선교사가 양육해 주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결국 미혼 여선교사인 멘지스가 입양하기로 했다. 그래서 멘지스의 양녀가 된 것이다. 멘지스는 신복이라고 불렀다. 비록 세상의 부모는 그를 버렸으나 주님 안에 새로운 축복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녀가 결혼할 당시 멘지스 선교사는 한국에서 은퇴한 이후였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을 축하해 주었고, 그들을 위해 동구 좌천동의 한옥 한 채를 사 주었다.

 

신복을 직접 찾아 그녀의 삶을 녹취한 이상규 교수는 “신복이 기억하는 멘지스 선교사는 더 없이 좋은 분”이라고… “한국의 된장국을 즐겨했고,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헤어진 양말도 길어서 신을 만큼 알뜰했는데, 남에게는 관대하여 늘 사랑을 베풀었다”고 말했다.

여선교사의 어머니

 

멘지스 선교사는 호주선교부의 대모였다. 그녀는 35세의 나이로 내한하여 1924년 은퇴하여 호주로 돌아갔고, 호주에서 약 10년을 더 사시다가 1935년 7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특히 선교부의 첫 여성 선교사였기 때문에 여선교사들에게는 어머니와 언니처럼 선교지에서의 크고 작은 문제와 과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녀는 후배 선교사들로부터 흔히 호주 선교부의 어머니로 불릴 만큼 선교부 선배이자 어른이자 지도자였다. 특히 온화한 성격, 풍부한 인간미, 그리고 그녀의 사려 깊은 생활은 한국인들에게도 진정한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자신의 건강과 연로한 모친을 돌봐야 하는 이유로 190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호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국을 사랑한 멘지스는 191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1912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1924년까지 전도와 교육 등 값진 선교사역을 계속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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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열전 이야기를 연재하며 전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의 ‘부산지방에서의 초기 기독교’(한국교회와 역사연구소)과 한국고등신학연구원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을 참고문헌으로 편집하였다. 이밖에 맨켄지선교회, 호주선교사묘원 경남선교120주년 기념관 등의 사료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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