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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환상곡과 안익태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11.14|조회수37 목록 댓글 0

한국환상곡과 안익태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국경이 있다.”

안익태의 생애와 예술은 이 한마디 속에 다 담겨있다.

“세계 각국의 청중들은 나를 환영하는데 왜? 나의 조국은 어찌하여 나를 냉대하는가?” 이렇게 마지막 탄식을 쏟으며 고국을 떠나 머나먼 스페인 땅에서 1965년 9월 17일 쓸쓸히 운명했다.

그 순간 전세계는 경악했다. TV가 없던 시절 영국 BBC 방송은 12시 정오 뉴스에 긴급방송을 전했다.

“방금 전 세계적 지휘의 거장 안익태가 서거하였습니다. 큰 별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다시는 진정한 정통 베토벤을 듣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라는 방송 보도였다.

스페인 정부는 3일동안 정부 관공서에 조기가 계양되었고 각 방송사에서는 조가가 울려퍼졌다.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 위대한 거목이 쓰러졌을 때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은 우리 가슴에 진정한 용기와 단결을 일깨워준 안익태의 참 뜻과 참 모습을 이해하고 보살펴 주지 못했고 오히려 일부인들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그의 공적을 뭉게 버렸다.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은 우리 대한민국 민족의 발자취와 수난을 엮어 한편의 역사를 그린 대서사시이다. 고요한 아침 찬란히 떠오르는 동해의 태양, 세계를 향하여 끝없이 헤쳐나가는 검푸른 바다, 반만년 역사 위에 한민족의 기상이 용솟음치는 아침의 나라, 찬란하고 아름다운 나의 조국, 금수강산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봄의 정경과 추수한 기쁨을 나누는 농부들의 흥겨운 가락소리... 그러나 일제 침략과 야욕 한일합방, 이어지는 탄압 그리고 항거, 계속되는 독립운동과 3.1운동. 어려운 민족의 고난 속에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6.25 전쟁과 남북분단의 아픔, 찢어지는 가난, 굶주림과 어려움 속에서 굴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지혜와 슬기를 모아 조국의 변영과 영광의 미래로 나아가자는 한국환상곡! 끝 부분의 합창은 우리의 염원이요, 민족의 절규요, 간절한 기도요, 소망이다.

조국이 일제에 합방을 당하여 우리 민족이 희망을 잃고 있을 때 뜻한 바 있어 그는 음악예술의 세계를 향해 달려갔고 마침내 세계 거장으로 우뚝 섰다. 그는 그가 염원한 뜻대로 한국환상곡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기상과 혼과 얼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안익태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암울할 때 그 해 12월 5일 평양부 계운에서 태어났다. 도산 안창호, 의사 안중근 등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순흥 안씨 집안 안덕훈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1918년 평양숭실학교 중학부에 입학 교장 선생 마우리 선교사에게서 투철한 기독교신앙과 민족의식 그리고 안익태가 특별히 음악에 뛰어난 소질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마우리 박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쳤다. 특히 주일에 교회 성가연습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보냈는데 익태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즐겁고 귀중한 시간이었다.

하루는 민족관과 신앙이 투철한 숭실중 8명이 친일파 앞잡이 선생과 3.1운동에 가담했다가 평양감옥에 갇힌 동포들을 구출하려고 숲속 언덕에서 모의하다 발각되어 쫓아오는 일본순사를 필사적으로 피해 교장 사택으로 도망간 안익태를 얼굴과 손,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본 마우리 박사가 급히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시켰다.

마우리 박사는 평양에서는 일본순사들이 안익태를 불순분자로 지목 특별 감시 속에서 더 이상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한 그는 경찰서장을 만나 자신의 보증속에 일본의 본거지인 동경으로 유학보낸다.

1926년 동경음악대학에 입학한 안익태는 어김없이 꼭 여름방학 때에는 서울 종로 YMCA 강당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주도로 귀향 첼로 독주회를 개최하였다. 말이 음악회였지 실은 동포들을 모아놓고 음악을 통해 민족의 얼과 혼을 일깨워주는 사상 고취 집회였다. 그리고 다음 날은 아펜젤러 교장의 후원으로 이화, 배재학당 학생들을 위한 정동교회에서 연주회를 개최하였는데 곡목 중에는 매번 우리나라 애국가 곡은 아일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을 의무적으로 넣었다.

감시가 심한 일본순사들은 이 곡이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리고 연주회가 끝나면 다시 평양으로 고당 조만식 선생이 기다리고 있는 평양 YMCA강당에서 음악회를 개최했다.

훗날 안익태가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혼과 투철한 애국정신은 고당 조만식 선생과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인격과 애국심을 보고 배워 일평생 삶에 지표로 삼았다고 술회했다.

일본 동경음악 유학시절 더욱 더 일본순사들의 감시가 심해져 그는 미국으로 유학 갈 것을 결심한다. 필라델피아 음대와 커티스 음악학원에 입학한 그는 뛰어난 재질에 필라델피아 필하모닉 상임지휘자인 스토코프스키에 발탁이 되어 특별한 총애를 받는다.

음악대학을 졸업할 당시 뉴욕에서의 작곡 콩쿨에 한국환상곡이 입선되었다. 콩쿨 규정에 따라 작곡자가 직접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휘대에 올라선 안익태는 뉴욕 카네기홀 뉴욕 필하모닉 단원들을 쳐다보며 싸인을 보내고 지휘를 시작했다. 그러나 단원들은 지휘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잡담만 하고 있었다. 순간 안익태는 ‘동양인이라 깔보는구나’ 지휘가 시작되었는데도 소리는 내지않고 심지어 킥킥 웃는 단원들. 그는 견딜 수 없는 지휘자의 굴욕감과 모멸감 도저히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안익태는 지휘봉을 꺾고 내려왔다.

“먼 훗날 내가 다시 뉴욕필을 지휘할 때 거장이 된 나의 모습을 너희들이 보리라!” 마음 속으로 다짐하였다. 그는 정통 음악 본거지인 독일로 건너가 다시 도전해 볼 것을 결심한다.

독일 도착한 안익태는 1936년 6월로 그 날도 일본의 탄압과 헐벗고 굶주린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일평생 그가 좋아하는 성경구절(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를 암송하며 새벽 묵상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아침에 떠오르는 햇빛이 창문을 통해 비추는 그 순간 애국가 악상이 떠올라 마지막 부분과 한국환상곡의 미비한 부분을 완성했다.

화사한 어느 봄날 아침, 독일 작곡가 R.슈트라우스의 집 앞에 그날도 남루한 옷에 악보(한국환상곡)를 옆에 끼고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그는 당시 세계 최고의 작곡가 집 구경만 하는 것도 행복하게 생각했었다.) 마침 뜰 안에 유모와 3살된 손녀가 놀다 잠깐 유모가 집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그만 연못에 빠지고 만다. 순간 안익태는 악보를 내던지고 깊은 연못으로 뛰어들어 R.슈트라우스의 손녀를 구했다.

이것이 천운의 기회가 되어 R.슈트라우스의 직계 수제자가 된다. 슈트라우스가 아들같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가 된 안익태는 세계적인 거장들과 이 때부터 교류가 시작된다. 물론 여기에는 각별한 R.슈트라우스의 사랑과 보살핌이 있었다. 때로는 베를린 필 하모닉 정기공연 때 아프다는 핑계로 대신 급히 안익태를 지휘시킨 적도 몇 번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영국 로얄 필하모닉, 멘체스타 심포니, 런던 필하모닉, BBC 방송 오케스트라, 런던심포니, 파리심포니, 로마심포니, 스위스취리히, 부다베스트 교향악단, 로마방송 교향악단, 필라델피아 교향악단, 보스턴 심포니, 신시내티 심포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뉴욕필하모닉, 로스앤젤레스 심포니, 비앤나필하모닉 그리고 수십번의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는 거의 다 지휘하고 다녔다.

세계 거장 안익태가 지휘할 때는 어김없이 꼭 한국말로 된 한국환상곡이 연주되었다. 그 당시 일본정부는 각국에 파견한 외교관들로 하여금 안익태는 일본인이라고 선전하며 또한 노골적으로 한국환상곡을 못하도록 회유와 협박이 들어왔다. 심지어 아사이, 마이니치, 도쿄신문들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 지휘자 애키타이 안이라고 선전했다.

1942년 3월 로마심포니 정기연주회 날, 그 날도 어김없이 한국말로 된 한국환상곡과 베토벤 3번 영웅을 지휘하고 있을 때 청중석에서 세계적 지휘자의 음악을 감상하러 무솔리니가 직접 참관했다. 잠시 후 무대 뒤 지휘자실로 하얀 쪽지가 왔다.

“지휘자 귀하! 연주 후에 수상께서 세계적인 지휘자인 당신을 접견하고자 무대 뒤로 갈 것을 미리 통보합니다 – 수상부관으로부터”

잠시 후 무대 뒤로 나타난 무솔리니는 악수를 청하며 위대한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시여! 오늘 밤 그대의 감동적인 훌륭한 음악회 성공을 축하합니다. 앞으로 로마에서의 음악 일정과 행운을 빌겠소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런 후 며칠 후 지휘자 안익태에게 이탈리아 정부 관계자가 황급히 찾아왔다.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48시간 안에 이탈리아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강력한 항의 각서를 받았다고 하였다. 당신이 연주한 한국환상곡은 항일사항을 고취시키는 것이며, 또한 당신은 일본내란선동혐의로 체포될 수 있으니 제발 빨리 이 곳을 떠나달라는 사정이었다. 그러면서 일본과 동맹한 외교적 관계가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간청하였다.

1944년 파리에서의 음악회 때에는 연합군의 치열한 공습 아래 절친한 친구 지휘자 카라얀과 호텔 지하 방공호에서 두 주일간 같이 지내기도 했는데, 이 때 베토벤의 논쟁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독일 작곡가의 계보는 바하,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 그리고 당대 최고의 거장 R.슈트라우스로 이어진다고 하는 독일음악과 지휘법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카라얀은 베토벤 곡해석은 자기가 정통 독일적자라고 이야기할 때 안익태는 베토벤의 곡해석은 내가 정통이며 내가 적자라고 논쟁을 벌렸다. 그만큼 독일 음악계에서는 R.슈트라우스의 직계 제자인 안익태를 인정하고 있었다.

오늘날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고 잘 알려져있는 모차르트의 잘츠부르크 하계 음악제는 지금도 유명하다.

특히 음악제 때 누가 지휘를 하느냐가 그 시대의 음악계의 최고 인기도를 가늠했다. 이 때 비엔나 필하모닉을 지휘하는데 1944년 6월 하계음악제의 지휘자는 첫날 토스카니니, 둘째날 바인가르트너, 마지막날 안익태가 지휘했다.

1936년 8월 1일 독일 나치 정권 아래 베를린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안익태는 일본 선수 중 한국인 7명이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라톤 손기정, 남승륭, 농구의 장이진, 염은현, 이성구, 축구의 김용식, 권투의 이규환이었다.

안익태는 동포 몇 명을 모아서 열심히 애국가를 가르쳤다. 마지막 날 메인스타디움 경기장에는 검정, 긴가죽 군화를 신고, 기관단총을 어깨에 메고, 철모를 깊에 눌러 쓴 독일 군인들과 비밀경찰 게슈타포들의 삼엄한 경비와 싸늘한 감시 속에 폐막식 전 올림픽 경기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에 각국 정상과 국가 원수들, 수상 그리고 수많은 군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 메워진 가운데 대한의 아들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당당히 뛰어들어왔다. 한참 후 2등 영국의 어네스트 허버, 그리고 거의 동시에 우리의 남승룡 선수가 조금도 피곤함 없이 씩씩하게 3등으로 들어왔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 안익태는 품 속에 있는 태극기를 꺼내 동포 몇 명과 힘차게 목이터져라 애국가를 불렀다. 눈에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1955년 2월 19일 조국을 떠난지 25년만에 이승만 박사 80회 탄신축제를 위한 특별초청이었다.

서울 도착 후 경무대를 방문한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은 빨리 조국에 들어와서 음악 발전에 힘써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음악계에서는 질투와 질시의 눈으로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쌓아놓은 음악 입지가 흔들릴 것을 생각하고 노골적으로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하였다.

1960년 3월 23일-24일, 이화여대 강당에서의 연주였다. KBS 교향악단과 서울시립 교향악단 연합으로 연주 전날까지 연습했던 베토벤 5번 ‘운명’ 악보가 연주 당일날 없어졌다. 하는 수 없이 드보르작의 9번 ‘신세계’ 교향곡으로 급히 대체했다. 물론 한번도 리허설이 없는 초견 연주회였다.

도저히 일반상식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후 잃어버린 악보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발견되었다. KBS 단원 바순 연주자가 윗사람의 지시로 책방에 악보를 팔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양심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안익태는 개의치 않고 그 후에도 봄이면 꿈에도 못잊을 조국에 돌아와 영구 귀국할 것을 희망했으나 반대자들에 의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배웅 나온 몇몇 친지들에게 고뇌에 찬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조국이여! 내 동포여! 왜 나를 이렇게 홀대하십니까? 외국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고 그러십니까? 아니면 애국가를 잘못지었다고 꾸짖는 겁니까?”

코리아 환타지를 품에 안고 전 세계를 누비며 꼭 한국말로 고집하며 지위한 지휘자 안익태, 세계 곳곳에서 우리 조국과 민족의 혼을 앞세우던 안익태, 그러나 그의 조국은 끝내 그를 외면했고 이역만리에서 그는 그렇게 쓸쓸히 영원한 나라로 떠나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를 우리에게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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