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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글판 2022년 여름편 김춘수 <능금>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6.05|조회수171 목록 댓글 0

광화문글판 2022년 여름편
<능금>

 
김춘수, 능금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능금 /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깊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시집 『꽃의 소묘(素描)』(1959)

 
○ 광화문글판이 2022년 여름을 맞아 김춘수 시 ‘능금’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광화문글판 여름편을 장식한 글귀는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로, 김춘수 시인의 시 '능금'에서 가져왔다.
 
○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김춘수 시인은 1992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하는 등 문학계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발간한 뒤 2004년 투병 직전까지 왕성하게 집필한 우리나라 대표 시인이다.
 
* 김춘수(金春洙, 1922 ~ 2004)
시인. 경남 통영 출생.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시를 써서 ‘인식의 시인’으로 불린다.
시집으로 “구름과 장미”(1948), “꽃의 소묘”(1959), “처용”(1974), “쉰한 편의 비가”(2002) 등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김춘수 시인의 '꽃'은 대표적인 국민 애송시이기도 하다.
 
○ 김춘수 시인의 능금에서 발췌한 여름편 문안은 저마다 내면의 힘과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음을 되새기자는 의미를 담았다.
바다가 스스로 파도를 일으켜 끊임없이 움직이고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특징을 사람의 잠재력에 비유했다.
 
○ 한국인 최초로 '어린이책 노벨상'이라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은 이수지 작가의 작품이 들어간 것도 눈길을 끈다.
이번 디자인은 이 작가의 그림책 '파도야 놀자'에 발표된 작품 중 하나다.
 
○ 이 시는 '능금'이 익어 가는 자연 현상을 통해 무한한 그리움의 성숙과 자연의 교감(交感)에 의한 충만함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는 가을 햇살과의 교감으로 충실히 익어가는 '능금'을 통해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고, '능금'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밝히게 된다.
이와 같은 결실과 성숙의 신비를 화자는 '그리움', '축제', '애무의 눈짓', '세월', '감정의 바다'와 같이 함축적 의미가 풍부한 시어를 구사하여 드러내고 있다.
 
1연에서 '능금'은 '그리움'을 통해 성숙하여 아름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되며, 결국 스스로의 '무게'로 인해 떨어진다.
이때의 '그리움'은 '능금'의 본질로서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힘이라 볼 수 있다.
 
2연에서는 '가을'의 사랑에 찬 교감으로 충실히 익어 가며 '그'와 합일된 '능금'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즉 '이미 가버린 그 날(과거)'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미래)' 사이인 '이 아쉬운 자리(현재)'에서 충실히 내적 성숙을 추구하는 '능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3연에서는 이렇게 충실히 익어 가는 '능금'이 구체적 자연물이 아닌 추상적 관념임을 밝히고 있다.
즉, 화자는 '능금'을 따라가다 '푸르게만 고인 /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를 발견하는데, 이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귀결이라 볼 수 있다.
시인은 '능금'을 통해 생명의 무한한 그리움과 충만함이 이루는 신비로운 내면세계를 그려 보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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