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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약에서의 삼위일체(2).

작성자성령충만땅에천국|작성시간22.12.23|조회수33 목록 댓글 0

구약에서의 삼위일체(2).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사신다.

이는 세상의 기본질서, 곧 시간과 공간의 질서 가운데 들어오셔서 사신다는 말이다.

이는 부모가 어린 자녀의 세계에 들어와서 그들의 수준에 맞춰서 대화하고 함께 걷는 것과 같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자기 백성과 만나시고 대화하며,

그들과 식사와 교제 그리고 역사적인 동행을 하신다.(창15:1-6)

이러한 하나님 사역은 옛적에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이는 구약의 계시가 진행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님과의 식사 교제를 생각해 보라.

아브라함 때는 여호와의 사자 모습으로 오셔서 식사의 교제를 하신다.(창18:1-8)

그러나 모세제도 안에서는 휘장 밖 성소의 떡상의 떡으로 하루에 두 번 식사 교제가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떡상의 떡을 흠향하시면,

먼저 하나님께서 진설된 떡을 드신 후에는,

하나님 상에서 물려낸 떡은 제사장의 양식이 된다.

이처럼 아브라함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과 교제하신다.(창18:17-21)

이러한 하나님의 교제는 종말에 보내신 아들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직접 오셨기 때문이다.

오순절 이후에는 부활의 영으로 믿는 자들과 한 몸을 이루신다.

이처럼 성령을 보내심에서 율법에서의 일은 하늘에 속한 일로 온전케 된다.(히10:1-14)

따라서 성경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본체론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여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영원세계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적인 하나님을 말한다.

구약성경은 사람 중보자를 통한 하나님 사역을 기록하고,

신약성경은 아들을 통한 하나님 사역을 증거한다.

 

구약에서의 하나님 사역 방식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영을 주신 중보자를 백성에게 보내셔서 역사하신다.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 영은 어떤 영인가?

모세가 하나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영이다.(민11:16-17)

모세가 종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영이다.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성령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이다.(갈4:1-3)

모세와 이스라엘이 종된 백성으로 행하도록 하는 종의 영이다.

따라서 모세 율법은 종으로 행하게 하는 종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온전히 행하였다면 그는 의로운 백성이다.

그러나 그는 종으로서 의로운 백성일 뿐이다.

세례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그러하다.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사울이 여기에 해당된다.(빌3:6)

이처럼 성령은 신구약 백성과의 관계를 따라 역사하시는 영이시다.

율법 아래에서는 두려워하는 종의 영으로(민11:24-26),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들의 영으로 역사하신다.(롬8:15)

율법(구약성경)은 종된 백성으로서의 자태를 요구하는 종의 도리이며(갈4:1-3),

그리스도 복음은 아들로서의 자태를 요구하는 아들의 도리이다.

따라서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에는 항상 모세의 율법과 대비한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권면하여 복음의 통치 아래에 세우기 위함이다.

율법의 짐과 멍에에서 구원을 받아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세의 율법(구약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 가운데 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세는 종된 중보자이다.

이는 휘장 밖 죄 아래에 세워진 사람 중보자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휘장으로 가리우신 하나님만을 알 뿐이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교제한 중보자가 아니다.

이는 모세가 명한 율법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경륜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 안의 영원한 뜻과 질서는 모세에게는 봉인된 비밀이다.

이는 조선 시대에 머슴은 집주인의 안방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집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안방 밖 마당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장벽의 관계에 있는 자가 종이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그러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휘장으로 가리우신 하나님만을 알 뿐이다.

그들은 모세가 증거한 이상의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여호와께서도 모세를 통하여 행하신 이상을 이스라엘에게 행하지 않으신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속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모세를 믿음으로 그를 보내신 여호와를 믿고 섬겼다.(출19:9, 요5:46-47)

그들은 모세의 말, 곧 율법에 순종하여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가 하는 일은 여호와의 일이다.

이처럼 여호와와 성령과 모세는 사역적인 면에서 같다.

이것이 옛 언약 아래에서의 하나님 사역이다.

 

본체론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자들의 근거 구절이 창세기 1:26-27절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라고 기록한다.(창1:26)

이 구절은 삼위일체를 말하고자 함께 언급된 구절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어전회의 내용을 말한다.

이는 세상창조는 하나님의 성소를 마련하는 일이고,

인간창조는 창조된 세상을 함께 경영할 동반자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라고 말씀하시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관리할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게서는 창조된 세상 경영을 위하여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자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만이 하나님과 의논하고 동행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적인 존재이다.

인간만이 하나님과 만나고 대화하고 교제하고 의논할 수가 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근거구절인 욥기서와(욥1:6-12)와 열왕기서도(왕상22:19-23) 하나님의 어전회의를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본체론적인 삼위일체를 말하기 위한 구절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질서는 종말에서야 비로소 나타나서 증거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의 증거를 통해서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질서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기 이전에는 봉인된 비밀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으로 오시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은 계시란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일반론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계시에 대한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은 계시란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각 시대 언약에 의거한 하나님 사역이다.

하나님 사역의 내용은 백성과의 관계를 따라 달라진다.

언약적인 관계를 따라 계시의 내용과 질이 달라진다.

이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 교제와 동행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불연속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성경은 본체론적인 삼위일체를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역을 통한 사역적인 삼위일체를 말한다.

하나님의 본체와 속성도 하나님의 사역을 통한 본체와 속성을 말한다.

 

성경은 성경 기자가 신앙적인 의도와 목적을 따라 기록한 하나님 사역의 기록이다.

이는 하나님 사역을 취사 선택하고 편집하여 기록한 구원 역사이다.(눅1:1-4)

성경 기자들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에서의 하나님을 사역을 기록한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시대와 장소를 아우르는 초시대적인 교훈집이 아니다.

이는 신구약을 아울러서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

성경은 역사적이고 문자적이며 문법적인 하나님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성경 기자의 의도와 목적을 따라,

기록할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당대의 문자적인 의미를 알아야 한다.

당대의 단어와 문장의 의미는 문맥에서 한정된다.

따라서 성경 언어와 문장은 단 하나만의 의미만을 갖는다.

문맥을 떠난 의미와 해석은 이단들이 선호하고 유용하는 해석방식이다.

동일한 언어와 의미를 신구약에 적용하는 것은 이단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이는 이단이 자신들의 뜻과 의견을 대입하여 자신들의 의도를 정당화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석된 의미는 성경적이라고 할지라도

본문의 의미를 파괴하는 경건한 거짓말이며 이단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창세기 1;26절이나 욥기서 1:6-12절, 왕상 22:19-23절들은

본체론적인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지 않다.

이는 하나님의 어전회의를 설명하기 위한 언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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