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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15)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29|조회수32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15)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2:14-16)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 빌 2:14 우리는 바로 앞 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대하여 상고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심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기쁘신 뜻은 세상적인 가치관과는 다른 것이었음도 확인하였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소원은 “부자 되십시오!”, “권세자 되십시오!”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말하며,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만난 빌립보라는 도시는 마케도니아의 첫 성이며(행 16:12) 또한 큰 무역도시기이기 때문에 각종 거짓과 술수, 사치와 허영이 난무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일반 시민들의 희망사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가 굳이 그들을 불러 물어보지 않아도 부귀영화(富貴榮華)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귀영화만 보장된다면 약간의 사기, 도적질, 거짓행위들로 인한 원망과 시비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망”(γογγυσμῶν)이란 한마디도 말하면 모든 일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불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시비”(διαλογισμῶν)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그와 다툼을 일삼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재판정에서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말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내세우고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을 강조한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빌 2:15-16 그런데 사도는 이와 같은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15절은 “이는”(ἵνα, so that, because)라고 시작을 함으로써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에게 너희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흠이 없고 순전하여”(ἄμεμπτοι καὶ ἀκέραιοι)라고 합니다. 여기 “흠이 없고 순전하여”란 말은 “비난할 것이 없고(blameless) 세속에 때 묻지 않은(innocent)”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불순물이 전혀 섞이기 않은 순도의 금속과 같은 것으로, 죄로 말미암아 불순해지지 않은 삶을 묘사합니다(마 10:16; 롬 16:19; 고후 11:3; 엡 5:27 참조).

바울은 왜 이와 같은 주문을 하였을까요? 당시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γενεᾶς σκολιᾶς καὶ διεστραμμένης)였습니다. 여기 “어그러지고”(σκολιᾶς, crooked)란 마치 척추가 뒤틀려 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일탈된 모습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즉,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벗어나, 제 멋대로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잠 2:15; 사 53:6 참조). 그리고 “거스르는”(διεστραμμένης)이란 말은 어그러진 상태를 넘어서 더 멀리 일탈의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는 죄로 가득한 세상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주님은 이를 “패역한 세대”라 하였습니다(마 17:17). 그런데 이런 모습이 그때 만이었겠습니까? 지금도 예외일 수 없을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를 없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원망과 시비를 없이하도록 요구한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비록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고 할지라도 너희들은 그들과 같은 정체성에 매몰되지 말고,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τέκνα Θεοῦ, ἄμωμα … ἐν οἷς φαίνεσθε ὡς φωστῆρες ἐν κόσμῳ)라 합니다. 즉, 너희는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별된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흠 없는 자녀”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떻게 들어날까요? 또한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바울사도는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려”(ἐν οἷς φαίνεσθε ὡς φωστῆρες) 한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φωστῆρες)이란 어두움과 반대되는 것으로, 당연히 빛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이 빛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즉,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의 삶을 통하여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 자신이 빛을 발광하는 그 자체의 빛이 아니라,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빛의 사명을 감당하므로 인하여 우리를 보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도 주님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게 함으로 인하여 “생명의 말씀”(λόγον ζωῆς)이 또한 밝히 드러내어지고 이를 통하여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원망과 시비를 없이함으로 흠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으로, 생명의 말씀으로서의 삶을 살 때에 바울 자신이 비록 감금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17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동안의 “자신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할 것이라”(οὐκ εἰς κενὸν ἔδραμον οὐδὲ εἰς κενὸν ἐκοπίασα) 합니다(갈 2:2 참조). 물론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면 바울사도만이 아니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의 삶 역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이와 같은 일로 인하여 또한 “그리스도의 날”(εἰς ἡμέραν Χριστοῦ)에 “자랑이 될 것이라”(καύχημα)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날”이란 우리가 죽어 주님 앞에 설 때, 또는 주님의 재림을 맞을 때에 주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라 주님이 칭찬하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저, 세상에 사는 동안 이렇게 살았습니다.” “저, 참으로 복음에 따라서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왔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어떻게 말씀 하실까요? “그래, 참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신실한 삶을 살았구나. 나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자꾸나.”라고 하시지 않겠습니다. 이것을 기대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흠 없는 자녀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원망과 시비를 없이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명의 말씀”, 곧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내기를 당부한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겠죠. 우리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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